"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작업노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lassics
이동: 둘러보기, 검색
(Nodes)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1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20번째 줄: 20번째 줄:
 
===1차 원고===
 
===1차 원고===
  
쇼와(昭和) 8년(1933) 고적조사 복명서 기록을 보면 보물 제58호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은 불신과 대좌만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
보물 제58호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은 쇼와(昭和) 8년(1933) 고적조사 복명서 기록을 보면 불신과 대좌만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본 고적조사 복명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주도로 이뤄진 '''고적조사사업'''의 출장 결과보고서이다.
 
본 고적조사 복명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주도로 이뤄진 '''고적조사사업'''의 출장 결과보고서이다.
불두는 분실되었으나, 불신의 균형 잡힌 자세와 어깨, 가슴 그리고 옷주름 표현에서 사실적이고 섬세하다는 평가와 함께 통일신라 후반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불두는 분실되었으나, 불신의 균형 잡힌 자세와 어깨, 가슴 그리고 옷주름 표현에서 사실적이고 섬세하다는 평가와 함께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유사한_양식의_불상사례 통일신라 후반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본 불상의 불두는 <문화유적 보수정화지> 보고서를 바탕으로 1981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본 불상의 불두는 <문화유적 보수정화지> 보고서를 바탕으로 1981년 이전에 제작되어 붙어진 것으로 보인다.
 +
 
 +
 
 +
'''일본어 번역 (日本語 翻訳)'''
 +
 
 +
昭和八年(1933)の古蹟調査復命書の記録を見ると、宝物第58号の安東安寄洞石造如來坐像は仏身と台座だけの残られている状態で発見された。この古蹟調査復命書という文書は日帝強占期に朝鮮総督府の主管で行われた古蹟調査事業の出張報告書である。仏頭は失われたが、バランスを取った仏身の姿と肩、胸、袈裟のひだの表現が事実的で繊細だと評価される。この仏像は統一新羅時代の後半期に造られたと思われるが、ただ仏頭だけは文化遺蹟補修淨化誌に基づいて1981年以前に新たに造られた。
  
 
=='''문맥요소'''==
 
=='''문맥요소'''==
34번째 줄: 39번째 줄:
 
| B00-0058-0000 || Heritage || (보물_제58호)_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
 
| B00-0058-0000 || Heritage || (보물_제58호)_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
 
|-
 
|-
| 선정인 || Concept || 선정인 ||
+
| 항마촉지인 || Concept || 항마촉지인 ||
 
|-
 
|-
 
| 수인 || Concept || 수인 ||
 
| 수인 || Concept || 수인 ||
41번째 줄: 46번째 줄: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불두_수리|| Event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불두_수리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불두_수리|| Event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불두_수리 ||
 +
|-
 +
| 통일신라 || Concept || 수인 ||
 +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 Object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
 +
|-
 +
| 국립중앙박물관|| Actor || 국립중앙박물관 ||
 +
|-
 +
| 조선총독부박물관|| Actor || 조선총독부박물관 ||
 +
|-
 +
| 조선고적조사|| Event || 조선고적조사 ||
 
|}
 
|}
  
49번째 줄: 64번째 줄: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B00-0058-0000  || isDesignatedAs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B00-0058-0000  || isDesignatedAs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 선정인 ||isRelatedTo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 항마촉지인 ||isRelatedTo
 
|-
 
|-
| 수인 || 선정인 || type
+
| 수인 || 항마촉지인 || type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 여래불 ||isRelatedTo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 여래불 ||isRelatedTo
 +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불두수리 ||isRelatedTo
 +
|-
 +
|조선고적조사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happenedAt
 +
|-
 +
| 조석총독부박물관 || 조선고적조사 ||participatesIn
 +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documents
 +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 조석총독부박물관 ||formerLocation
 +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currentLocation
 +
|-
 +
|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 조선고적조사 ||isRelatedTo
 
|}
 
|}
  
 
===2차 원고===
 
===2차 원고===
 +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 석가모니불
 +
실재한 역사적 부처님이다. 인도의 북동부(현재 네팔 지역)의 카필라국에서 기원전 623년에 태어나 ˈ고타마 싣다르타ˈ라는 이름으로 29세까지 왕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성문 밖에 사는 사람들의 늙음, 병듦, 죽음을 목격하고 삶의 고통에 대한 의문을 품고 출가했다. 6년간 혹심한 고행을 하다가 고행을 버리고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고 붇다(깨달은 사람, 부처)가 된다. 그 후 45년간 인도 각지를 돌며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법을 전하다가 80세에 열반에 들었다. 석가모니라는 명칭의 유래를 보면, ˈ석가ˈ는 그의 출신 민족 이름인 ˈ샤카ˈ에서 따온 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ˈ석가ˈ로 변한 것이고 ˈ모니ˈ는 성스러운 사람을 의미하는 인도어이다. 불상의 수인(손 모양)은 항마촉지인, 시무외인, 선정인, 전법륜인 등 여러가지를 취한다.
  
=='''문맥요소'''==
 
===Nodes===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left"
 
!style="width:200px"| ID ||style="width:100px"| Class ||style="width:200px"| Label || Description
 
|-
 
|  || Object ||  ||
 
|}
 
  
===Links===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left"
 
!style="width:200px"| Source ||style="width:200px"| Target || style="width:200px"| Relation
 
|-
 
|  ||  ||
 
|}
 
  
 
===사진, 도서, 영상자료===
 
===사진, 도서, 영상자료===
 
*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유리건판사진 (조선고적조사 당시)
 
*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유리건판사진 (조선고적조사 당시)
 
[[파일:경북안동 안기동 석불좌상(유리건판).jpg|200픽셀]]
 
[[파일:경북안동 안기동 석불좌상(유리건판).jpg|200픽셀]]
 +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보는 100년 전 기록'''
 +
<html>
 +
<iframe width="640"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NA_7BP8kc7c?list=PLHwcOk-ZIhVPm4fyXidxpNlxq1LJdF5Uy"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
</html>

2021년 6월 16일 (수) 09:07 기준 최신판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Stone Seated Buddha in Angi-dong, Andong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영문명칭 Stone Seated Buddha in Angi-dong, Andong
한자 安東 安寄洞 石造如來坐像
주소 경북 안동시 한화4길 11-13 (안기동)
지정번호 보물 제58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시대 통일신라
수량/면적 1구
웹사이트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1차 원고

보물 제58호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은 쇼와(昭和) 8년(1933) 고적조사 복명서 기록을 보면 불신과 대좌만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본 고적조사 복명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주도로 이뤄진 고적조사사업의 출장 결과보고서이다. 불두는 분실되었으나, 불신의 균형 잡힌 자세와 어깨, 가슴 그리고 옷주름 표현에서 사실적이고 섬세하다는 평가와 함께 [통일신라 후반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본 불상의 불두는 <문화유적 보수정화지> 보고서를 바탕으로 1981년 이전에 제작되어 붙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 번역 (日本語 翻訳)

昭和八年(1933)の古蹟調査復命書の記録を見ると、宝物第58号の安東安寄洞石造如來坐像は仏身と台座だけの残られている状態で発見された。この古蹟調査復命書という文書は日帝強占期に朝鮮総督府の主管で行われた古蹟調査事業の出張報告書である。仏頭は失われたが、バランスを取った仏身の姿と肩、胸、袈裟のひだの表現が事実的で繊細だと評価される。この仏像は統一新羅時代の後半期に造られたと思われるが、ただ仏頭だけは文化遺蹟補修淨化誌に基づいて1981年以前に新たに造られた。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Object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B00-0058-0000 Heritage (보물_제58호)_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항마촉지인 Concept 항마촉지인
수인 Concept 수인
여래불 Concept 여래불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불두_수리 Event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불두_수리
통일신라 Concept 수인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Object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국립중앙박물관 Actor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Actor 조선총독부박물관
조선고적조사 Event 조선고적조사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B00-0058-0000 isDesignatedAs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항마촉지인 isRelatedTo
수인 항마촉지인 type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여래불 isRelatedTo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불두수리 isRelatedTo
조선고적조사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happenedAt
조석총독부박물관 조선고적조사 participatesIn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 documents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조석총독부박물관 formerLocation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국립중앙박물관 currentLocation
안동_안기동_석조여래좌상_유리건판_사진 조선고적조사 isRelatedTo

2차 원고

  •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 석가모니불

실재한 역사적 부처님이다. 인도의 북동부(현재 네팔 지역)의 카필라국에서 기원전 623년에 태어나 ˈ고타마 싣다르타ˈ라는 이름으로 29세까지 왕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성문 밖에 사는 사람들의 늙음, 병듦, 죽음을 목격하고 삶의 고통에 대한 의문을 품고 출가했다. 6년간 혹심한 고행을 하다가 고행을 버리고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고 붇다(깨달은 사람, 부처)가 된다. 그 후 45년간 인도 각지를 돌며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법을 전하다가 80세에 열반에 들었다. 석가모니라는 명칭의 유래를 보면, ˈ석가ˈ는 그의 출신 민족 이름인 ˈ샤카ˈ에서 따온 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ˈ석가ˈ로 변한 것이고 ˈ모니ˈ는 성스러운 사람을 의미하는 인도어이다. 불상의 수인(손 모양)은 항마촉지인, 시무외인, 선정인, 전법륜인 등 여러가지를 취한다.


사진, 도서, 영상자료

  •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유리건판사진 (조선고적조사 당시)

경북안동 안기동 석불좌상(유리건판).jpg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보는 100년 전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