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과 태평양 전쟁

cefia
cefia>Dominicy님의 2016년 1월 22일 (금) 14:02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4과 태평양 전쟁

학습목표
- 1941년과 1942년에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어떻게 진격했는가?
- 태평양에서 연합군이 승리의 기세를 잡게 된 것은 어떤 전투인가?
- 태평양의 섬들을 다시 점령하려는 전투에서 미국의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는 왜 중요한가?
- 맨하탄 계획은 어떻게 전쟁을 끝냈는가?

요점
태평양에서 연합군이 일본에 반격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전사자들이 나왔다.

핵심용어
- 바탄의 죽음의 행진
- 제네바 협정
- 코랄해의 전투
- 미드웨이 해전
- 과달카날 전투
- 섬 건너뛰기 전략(island-hopping)
- 레이테 만 전투
- 카미카제
- 이오지마 전투
- 오키나와 전투
- 맨하탄 계획

학습주안점
- 과정을 이해하기: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아래 예문을 참고하여 개요를 작성하시오.
I. 일본이 서태평양의 미국과 영국 군사기지를 공격함.
A. 미군이 바탄반도와 코레기도르 섬에서 항복함.
B. 전쟁포로들이 바탄의 죽음의 행진으로 끌려감.
C. 연합군이 인도를 방어하고 중국에 대한 지원을 확대함.
D. 코랄해 전투가 오스트랄리아에 대한 위협을 차단함.


배경
진주만 공격 외에도 일본은 태평양 지역 몇 곳에서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은 12월 8일 웨이크섬(Wake Island)의 미군 기지들을 그리고 12월 10일 괌(Guam)의 기지들을 공격했다. 진주만 공격 몇 시간 뒤에 일본군 항공기들은 필리핀의 미군 최대의 공군기지 클라크 필드(Clark Field)를 폭격했다. 진주만 공격의 뉴스가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에게도 전달되었지만 클라크 기지의 미군은 적의 공격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지상에 정렬되어 있는 맥아더의 항공기 약 절반을 파괴했다.
수일 내에 일본군 대부대가 필리핀의 본도(本島)인 루손(Luzon)섬에 상륙했다. 맥아더는 대부분의 그의 병력을 남쪽의 바탄 반도로 철수시켰다. 그곳에서 그는 방어진을 구축하고 해군이 그의 육군 병력을 안전하게 후송할 수 있기를 바랐다.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탄(Bataan) 반도에서 몇 달을 버텼으나 해군의 구조에 대한 희망은 멀어져 갔다.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닫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대피할 것을 명했다. 1942년 3월 어뢰정을 타고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해역을 통과하여 남부 필리핀의 안전지대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오스트레일리아 행 비행기에 올랐다. 땅에 내리면서 그는 필리핀 사람들과 자신의 군대에게 “나는 돌아온다”고 약속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일본 병사가 필리핀 바탄반도의 폐허를 순찰하고 있다.

- 추론하기: 미군은 왜 필리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는가?


일본군의 진격, 1941-1942
일본은 서부 태평양의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진주만과 클라크 기지를 공격했다. 미군을 지역 내 모든 곳에서 격파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철수하게 하고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자원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와 영국령 말레이의 고무를 확보하면 일본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목표를 지향해 일본은 1941년 12월 연합국 식민지 여러 곳을 공격했다. 1942년 3월 초까지 영국의 요충인 홍콩과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말레이를 접수하고 버마를 침공했다. 일본은 남방으로 치고 내려가 영국, 미국, 네덜란드 해군을 동남아에서 밀어 부치고 이 나라들의 넓은 식민지들을 일본 제국의 지배하에 두었다. 다음에는 필리핀을 접수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필리핀 함락
1942년 초, 식량이 떨어진데다 일본군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자 바탄 반도 방어군은 항복했다. 약 2천명의 군인과 간호원들은 반도 바로 앞에 있는 요새화 된 코레기도르(Corredigor) 섬으로 건너가 그곳 방어군과 합류했다. 섬의 미군들은 요새의 동굴 터널 속에서 한 달 동안 일본군의 폭격을 견뎌냈다. 결국 5월 6일 탄약과 식량이 떨어진 미군과 필리핀군 11만은 침공해오는 일본군에 항복했다.
바탄과 코레기도르에서 일본군은 미군과 필리핀군 도합 7만6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질병과 기아로 허약해진 이들 포로들은 5백 명, 천 명으로 나뉘어 열대의 무더위 속에서 60마일을 걸어 기차에 타고 8마일을 가서 다시 도보로 행진했다.
6일에서 12일에 걸친 행진에서 포로들은 물을 마시거나 쉬지 못하고 구타, 고문당하고 하는 가운데 최소 1만 명이 죽었다. 너무 힘들어 따라오지 못하면 일본 경비병이 총살했다. 이 시련은 후에 ‘바탄의 죽음의 행진’이라고 알려졌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원시적인 시설의 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또다시 1만5천명 이상이 죽었다.
바탄에서의 일본군의 야만적 행위는 전쟁포로의 대우에 관한 국제 기준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이 준칙은 1929년 제3차 제네바 협정(Geneva Convention)에 담겨있다. “전쟁포로는 어느 때에나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보호해야 하며 특히 포로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고 협정은 규정하였다.

중국과 버마 방어
중국은 1941년 12월 9일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숙적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은 중국을 지원함으로써 일본의 동남아 정복을 저지하고자 이미 중국에 군사 고문관과 무기, 장비를 제공한 바 있었다.
중일전쟁이 시작 됐을 때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미국의 조셉 스틸웰 장군을 자신의 참모장으로 초청했다. 스틸웰은 버마를 방어하는 중국군을 지휘하면서 연합군과 장제스의 중국 서남부 기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늘을 나는 호랑이(Flying Tigers)”라고 불린 미국 의용 항공대가 공중 지원을 했으나 중국의 허약한 군대는 잘 훈련된 일본군에 패퇴했다. 중국군은 생명선인 버마로드(Burma Road)를 상실하고 중국으로 물러섰다. 버마의 영국군과 인도군도 서쪽의 인도로 철수했고 일본군은 인도를 침공할 태세를 갖췄다.

  •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들
  • 심화학습: 시민정신

- 뉴멕시코주방위군: 뉴멕시코주방위군 제200연안포병대는 1941년 루손섬에서 바탄반도로 퇴각하는 맥아더 장군을 엄호했다. 그후 그들은 바탄 반도 방어전에 참여해서 필리핀의 최대의 미군 부대가 되었다. 제200연안포병대는 전투준비가 잘 되어 있으며 많은 대원들이 필리핀에서 널리 사용되는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으로 배치되었다. 많은 병사들이 필리핀을 방어하다 전사했고 더 많은 병사들이 바탄의 죽음의 행진과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1,800명 중에서 900명이 살아남았다.

해상 전쟁
진주만 공격에서 일본은 그 목표 중 한 가지를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미 태평양함대의 주축을 이루는 세 척의 항공모함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들 중 렉싱턴(Lexington)호와 엔터프라이스(Enterprise)호는 함대의 대형 순양함들과 먼 바다에 나가 있었고 사라토가(Saratoga)호는 캘리포니아에서 수리 중에 있었다. 이 세 척의 항공모함은 태평양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항공모함과 함재기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항모는 명실공이 물 위에 떠있는 비행장으로서 함재기의 비행반경은 획기적으로 연장되었다. 함재기 가운데는 적 함정을 파괴할 수 있는 수직강하 폭격기와 어뢰 투하 폭격기가 포함되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에 항공모함을 출격 기지로 사용했다.
1942년 4월 일단의 미국 B-25 중형 폭격기들이 항공모함 호네트(Hornet)호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격했다. 제임스 두리틀(James Doolittle) 중령이 지휘하는 이 항공기들은 수백 마일을 날아가 과감한 반격작전을 실행했다. 두리틀 전대는 일본 도쿄와과 몇몇 대도시에 폭탄을 투하하고 중국 땅에 비상착륙했는데 조종사들은 대부분 생환했다. 두리틀의 폭격은 일본 측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일본 지도부에 큰 충격을 주었고 중요한 시기에 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일본군은 태평양 해역에서 진격을 계속했고 큰 타격을 입은 미 해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함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로의 통로가 열렸다. 1942년 5월 주로 미 해군으로 구성된 전단이 오스트레일리아 동북부에 위치한 코랄해(Coral Sea)에서 우세한 일본군과 충돌했다. 이 코랄해 전투에서 미 함재기들은 70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적 함정으로 날아가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 코랄해 전투에서 양측은 각기 보유 항공기의 절반이 넘는 수를 잃었다. 일본군은 렉싱턴호를 완파하고 또 다른 항모 요크타운(Yorktown)호에 피해를 입혔다. 반면 일본 측은 항모 한 척이 침몰하고 다른 한 척은 함재기 거의 전부를 상실했고 셋째 항모도 무력해져서 전투에서 제외 되었다. 이 전투는 비긴 셈이었지만 이로 인해 일본군의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이 좌절되었다.

  • 태평양에서 연합국의 진격, 1942-1945년

1. 코랄해 전투 1942년 5월
2.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3. 과달카날 전투 1942년 8월-1943년 2월
4. 레이테 만 전투 1944년 10월
5. 이오지마 전투 1945년 2월-3월
6. 오키나와 전투 1945년 4월-6월
7. 히로시마 폭격 1945년 8월 6일
8. 나가사키 폭격 1945년 8월 9일

  • 지도 읽기: 미군은 섬에서 섬으로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을 향해 진격했다.

- 위치 이해: 코랄해 전투는 연합군의 전략에 왜 중요했는가?

코랄해 전투는 전적으로 항공기 간의 전투였다는 점에서 해전 사상 새로운 장을 열었다. 양측의 함정들은 상호간 가시거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항공모함과 함재기들이 해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연합군의 승리가 전세를 전환하다
1942년 여름 소련이 독일의 공세를 저지하고자 분투하고 연합국은 북아프리카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때, 태평양의 두 곳에서 중대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와이 부근의 미드웨이(Midway) 섬과 코랄해에 가까운 과달카날(Guardalcanal) 섬에서의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향방을 바꾸었다.


미드웨이 해전
진주만 공격의 주도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하와이 북서쪽 1,100마일 떨어져 있는 미드웨이 섬으로 미 태평양함대의 잔여 함정을 유도하여 이마저 격멸시키려 했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침공에 일본 해군의 전투역량을 대대적으로 투입했고 미국의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이 하와이 방어에 긴요한 미드웨이 섬을 지키기 위해 휘하의 전 자원을 투입할 것으로 믿었는데 이는 틀리지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은 1942년 6월 4일 섬에 대한 일본군의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동시에 미군도 일본 함대에 공격을 가했지만 이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코랄해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드웨이 섬에서도 전투는 오직 항공기 사이에 공중에서 벌어졌다. 처음에는 미드웨이 기지에 있던 미국 항공기들이 일본군 함재기들의 공격을 물리치려 나섰다. 다음에는 미국의 항모들이 전투에 나섰다. 항모에서 발진한 미군기들은 일본군이 급유를 하고 폭탄을 적재하고 있는 취약한 시점에 일본측을 기습했다. 목표가 된 일본 함정 위에서 급유 파이프에 불이 붙고 갑판 위에 쌓여있던 폭탄이 폭발했다. 미군은 신속히 4척의 일본 항모 가운데서 3척을 침몰시키고 그날 오후 네 번째 항모 히류(Hiryu)를 못쓰게 만들었다. 히류가 파괴되기 전 출격한 일본군 항공기들은 미국측 요크타운호를 무력화시키고 나중에 잠수함 공격으로 침몰시켰다. 다른 두 척 호네트호와 엔터프라이스호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코랄해와 미드웨이에서 일본 항모 4척이 침몰하고 항공기 250대 손실, 그리고 고도로 기량이 좋은 해군 조종사들을 잃은 것은 일본 해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미군의 승리를 가져 온 공로자는 조셉 로쉬퍼트(Joseph Rochefort) 해군중령인데 그는 일본측의 JN-25 암호를 해독하여 일본군의 공격 개시 전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 후 일본은 더 이상 태평양에서 공격작전을 개시할 능력을 상실했다.

과달카날 전투
미드웨이에서의 승리로 연합군은 태평양 지역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1차적 목표는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는 것인데 이곳에서 일본은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이 섬에 비행장이 서면 연합국의 인근 지역 기지들이 위협을 받게 되고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교통로를 잃게 된다.
1942년 8월 만천명이 넘는 미 해병대가 이 섬에 상륙하자 섬을 지키던 2,200명의 일본인들은 정글 안으로 도주했다. 과달카날 전투는 해병대에 정글 전투의 첫 경험을 갖게 했다. 대원들은 습지와 강을 건너고 적을 찾아 정글의 넝쿨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해병대원들은 수풀에 숨어 있거나 야자나무 위에 올라가 총을 겨누고 있는 일본측 저격병의 좋은 목표가 되었다.

  • 일본군 비행기들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 항공모함을 공격하고 있다. 검은 연기구름은 대공포 사격 때문에 발생했다.

양측은 5개월의 대치기간에 수 천 명의 증원군을 섬에 보냈다. 몇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거쳐 미군은 그 해 11월 과달카날 섬을 둘러싼 바다를 전부 장악하게 되고 일본군의 증원 병력의 상륙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1943년 2월, 수적으로 압도당한 일본군은 결국 섬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연합국은 최초로 일본에게 장악된 땅을 빼앗았고 이제 다른 일본군 점령지의 회복을 위한 전략을 짰다.


섬 뺏기 싸움
과달카날에서 시작하여 미군은 소위 “섬 건너뛰기(Island-hopping)” 작전으로 들어갔다. 이는 선별적으로 적 수중의 섬을 공격하면서 일부는 놓아두고 나아가는 전략이다. 몇몇 중요한 섬들을 점령함으로써 다른 섬들에 대한 보급과 병력증강을 차단하여 이들을 아무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전략은 또한 미군으로 하여금 최종 목표인 일본 본토를 향해 더욱 신속히 이동할 수 있게 하였다.

태평양에서의 섬 건너뛰기 작전
1943년과 1944년에 연합군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서부 태평양으로부터 태평양 중부로 밀고 올라갔다. 맥아더 장군과 윌리엄 홀시(William Halsey) 제독 지휘 하에 미군은 솔로몬 군도(Solomon Islands)를 하나하나 공격해 나아갔고 니미츠 제독은 길버트 제도(Gilbert Islands)에서 유사한 섬 뺏기 작전을 지휘했다. 타라와(Tarawa) 섬을 점령한 후 니미츠 제독은 이 섬을 기지로 삼아 마셜군도(Marshall Islands)의 일본군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1944년 2월까지 이 폭격작전으로 일본군의 공중 전력이 무너져 니미츠 휘하의 부대들은 북쪽에 위치한 콰잘레인(Kwajalein)과 에니웨톡(Eniwetok)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마셜군도로부터 나아가 니미츠 군은 6월에 마리아나 제도의 일부를 점령하여 처음으로 일본 본토가 미국 장거리 폭격기의 작전 반경 안에 들어왔다. 1944년 말부터 B-29 슈퍼포트레스 중폭격기들이 일본 본토의 도시에 다량의 폭탄을 투하할 수 있게 되었다.

필리핀 회복 작전
1944년 미군이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하는 동안 군사 전략가들은 필리핀을 우회하여 가기로 결정했다. 맥아더 장군은 미국이 필리핀 국민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적극 반대하여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결정을 뒤집었다.
10월 중순, 약 16만의 미군이 필리핀의 레이테(Leyte) 섬을 침공했다. 해안 교두보를 확보한 후 맥아더 장군은 상륙용 주정으로부터 내려 해안으로 걸어 올라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뉴스 카메라들이 이 역사적인 장면을 기록하는 가운데 맥아더는 “필리핀 국민들이여, 내가 돌아왔습니다”고 선언했다.
미군이 육상 전투를 전개하는 동안 바다에서는 사상 최대의 해전이 벌어졌다. 280여척의 해군함정이 3일간의 레이테 만 해전에 투입되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아직 남은 해상 전력을 거의 전부 이곳의 미 해군 공격에 동원했다.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특공대가 사용되었다. 가미카제 조종사들은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의도적으로 적 함정으로 추락하여 최대의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전술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일본 해군을 사실상 괴멸시키고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지상에서 미군은 계속 일본군의 저항을 받았고 레이테 지역을 점령하는데 두 달이 걸렸다. 약 8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했고 투항한 일본군은 1천명 미만이었다. 루손 섬에 위치한 필리핀 수도 마닐라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 역시 치열했다. 전투로 말미암아 시가지가 거의 다 파괴되었고 약 십만의 필리핀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5년 6월에야 연합군은 필리핀을 점령할 수 있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전사자 추정(군인/민간인/합계)

- 추축국
∙ 독일 3,250,000/2,350,000/5,600,000
∙ 이탈리아 226,900/60,000/286,900
- 연합국
∙ 프랑스 122,000/470,000/592,000
∙ 영국 305,000/60,600/366,400
∙ 미국 405,400/-/405,400
∙ 소련 11,000,000/6,700,000/17,700,000
∙ 중국 1,400,000/8,000,000/9,400,000
출처: 제2차 세계대전 통계조사

  • 표를 이해하기: 정확한 사망자수를 확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학자들은 끔찍한 인명손실이 있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 정보를 분석하기: 어느 나라가 가장 큰 인명손실을 입었는가?

  • 카미카제 공격은 왜 효과적이었는가?



이오지마(유황도)와 오키나와
미군이 일본 본토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최고로 참혹한 전투는 일본 본토에서 700마일이 채 안 되는 작은 화산도 이오지마(유황도)에서 벌어졌다. 이 섬의 가파른 바위 사면은 동굴과 터널로 숭숭 구멍이 나있었다. 이러한 자연 지형은 600개가 넘는 대포를 콘크리트 참호에 넣어 보호하기에 적합했다. 1944년 11월 최근에 점령한 마리아나 제도(Marianas)에서 출격 미군 폭격기들이 이오지마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후 74일간 미군 비행기와 군함들이 이오지마의 일본군 방어부대에 약 7천 톤의 폭탄과 2만 발의 대포알을 퍼부었다.
1945년 2월 중순 드디어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 해안으로 돌진해 들어갔을 때 일본군의 맹렬한 저항을 만났다. 3일 간의 백병전 끝에 미군은 겨우 700 미터를 전진했다. 결국 미군 11만 명이 이 작전에 참여해 2만5천의 일본군과 싸워 섬을 완전 점령하는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적군은 거의 최후의 1인까지 싸워 단 21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 사상자는 약 2만5천으로 추산되었고 무려 27개의 명예훈장이 수여되었는데 이는 단일 전투에서 이 훈장이 수여된 것으로는 가장 많은 숫자였다. 니미츠 제독은 후에 이오지마 섬에 관하여 “비상한 용기가 일상적인 덕목이 되었던 곳”이었다고 술회했다. 군인들이 이오지마의 수라바치 산정에 미합중국기를 세우는 장면의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인들의 고생과 희생을 상징하게 되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진행된 오키나와 전투는 이오지마와 마찬가지로 치열하였다. 본토로부터 불과 350 마일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 섬은 역사적으로 일본의 영토에 속했다. 이곳은 연합군의 일본 본토 침공에 최후의 장애물이 되었다. 10만에 달하는 방어군은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연합군은 군함 1천3백 척과 18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버금가는 규모의 작전을 벌였다. 거의 2천명의 일본군 조종사들이 연합군 함대에 대해 가미카제식 공격을 감행했다. 미군 병사들이 해안으로 진입할 때 방어군은 지상에서 가미카제식에 해당하는 ‘반자이(만세)’ 돌격으로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최대한 많은 미군을 살상하며 싸웠다. 한 미군 병사가 길고 힘든 오키나와 전투를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 첫 공격이 있었던 1945년 2월 19일 해병대원들은 강력한 일본군의 포격 아래 이오지마 섬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

“우리들의 공격 형태는 목표 고지를 공중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때린 후 보병이 진격하고 장악하여 적의 반격을 물리치고 반대편 사면으로 내려와 다음 목표를 공격하는 식이었다. 주간에 공격하고 야간에는 호를 파서 지키는데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알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호를 다 파기도 전에 적이 포탄을 퍼붓기 시작하고, 밤에 그들이 온다. 반자이를 외치면서, 아니면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 오키나와 전투 참가 군인


맨하탄 계획
미군 병사들에게 다음에 올 도전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준비였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경험한 병사들은 본토 침공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하게 될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직접적인 침공 작전이 불필요하게 될 수 있는 특별한 폭탄을 만드는 작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다.
1939년 8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유럽으로부터 탈출해 온 유대인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폭탄을 독일이 제조할지도 모른다고 알려왔다. 그 폭탄을 독일보다 먼저 만들기로 결심한 루스벨트는 극비의 맨하탄 계획을 세워 원자탄 개발에 들어갔다.
이때 이미 과학자들은 우라늄 원자핵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했었다. 그러나 원자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핵분열에서 나온 입자가 다른 원자를 분열시키고 또 거기서 나온 입자가 다른 원자를 분열시키는 연쇄반응 현상을 일으켜야 했다. 이론상으로 수많은 원자핵의 분열에서 발생하는 열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는 것이 알려졌다. 1942년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는 시카고 대학교의 실험실에서 최초로 제어된 원자핵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과학자들은 우라늄 원료를 담아서 필요시 강력한 연쇄반응을 발생시키는 장치를 설계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1945년 7월 16일 맨하탄 계획 과학자들은 뉴멕시코주의 사막에서 최초의 원자탄 실험을 수행했다. 강한 섬광과 함께 폭발은 지상에 커다란 분화구를 만들었으며 약 125마일 밖에 있는 유리창을 부서뜨렸다. 이를 바라본 폭탄제조 책임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eepnheimer)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 나온 말을 기억했다: “나는 이제 죽음의 화신, 세계의 파괴자가 된다.”

폭탄 투하 결정
폭탄이 만들어졌으므로 이제 일본을 상대로 이것을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를 결정해야 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다른 방도도 있었다. 즉,
1. 일본 본토에 대한 대규모 침공, 이 경우 수백만의 연합군 희생을 초래한다.
2. 해상봉쇄로 일본에 식량부족을 겪게 하는 한편 재래식 폭격을 계속한다.
3. 외딴 섬에서 신형 폭탄의 위력을 과시하여 일본이 항복하도록 압박을 가한다.
4. 무조건 항복을 받기 위하여 조건을 완화한다.

  • 카미카제 공격은 전쟁의 마지막 해에 미해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단 한 발의 원자탄이 히로시마를 완전이 초토화시켰다.

- 비교하기: 원자탄은 전쟁에 사용된 다른 과학기술들과 어떻게 달랐는가?

과학자, 군사 지도자, 정부 관리로 구성된 자문단인 임시위원회는 1945년 봄 회의에서 이와 같은 대안들을 논의했으나 그들 중 어느 한 가지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의 막대한 희생은 임시위원회로 하여금 원자탄 사용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최종 결정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내려야 했는데 그는 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대통령직에 오른 지 겨우 석 달 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결정을 내리는데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원자탄을 하나의 군사무기라고 보았고 따라서 전쟁에 사용될 수 있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트루먼은 그리고 이 결정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진주만에 가서 눈물이나 흘리시오”하고 그는 비판자들에게 말했다(1963년).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6일 에놀라 게이(Enola Gay)라고 명명된 미국 비행기 한대가 한 발의 원자탄을 거대한 육군 기지가 위치한 남부 일본의 도시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강렬한 열이 터지면서 시의 중심을 일순에 가루로 만들고 주민들도 함께 재가 되었다. 첫 폭발에 무너지지 않은 건물들은 강한 바람으로 퍼져나간 불로 타버렸다, 대략 8만 명이 목숨을 잃고 최소 그만한 숫자가 불, 방사능 노출 그리고 폭발의 결과로 부상을 입었다. 히로시마 건물 중 최소 90퍼센트가 반파 또는 완파 되었다. 한 히로시마 거주 시민이 폭격 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어디를 가든지 길을 찾으려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려 아무것도 서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문, 기둥, 벽, 울타리 할 것 없이 다 무너졌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로 항상 직선으로 걸어 도달할 수 있었다. 어느 곳이든지 가보면 시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작은 뼈 조각을 만날 수 있었다.” – 히로시마의 한 생존자
3일 후,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8월 14일 일본 정부는 미국이 제시한 조건을 수락했고 그 다음날 미국인들은 V-J Day(Victory in Japan Day)를 경축했다. 공식적인 항복문서 조인은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Missouri)호 함상에서 있었다. 길고 파괴적인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 일본의 관리들이 미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4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진주만 공격 직후 일본의 군사전략은 무엇이었는가?
2.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 전쟁의 향방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3.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에 대한 원자탄 사용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4. 비교하기: (a) 태평양 전쟁에서 해군력의 역할은 유럽의 전쟁의 경우와 어떻게 달랐는가? (b) 일본과 미국의 전쟁수행에서 항공모함은 왜 결정적으로 중요했는가?
5. 설명문 작성하기: 일본이 1941년과 1942년 초에 왜 쉽게 진격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짧은 글을 작성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