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긴장완화와 재경직 사이에서

ce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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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5


1972 전술적 무기 제한에 관한 협상 진행(SALT(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I 협정 체결)


1975 "유럽 안전 보장 협력 회의(CSCE)"가 개최되고 헬싱키에서 최종 의정서가 채택되었다.


1979 SALT-II 협정을 위한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NATO는 중거리 미사일 배치에 관한 이중결정을 발표하였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1983 미국은 핵공격 방어를 위한 우주 군비확장을 목표로 한 SDI(전략방위구상)-프로그램을 선언하고 퍼싱 II(Pershing II) 중거리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였다.


<우측 상단 그림> HILFE ICH WERDE VERFOLGT! 도와줘, 나 추격 당하고 있어! M1 "무장 경쟁" (호르스트 하이트칭거(Horst Haitzinger)의 캐리커처, 1981)

쿠바 사태 이후 미국과 소비에트연방: 군사력… 쿠바 사태로 인해 미국뿐 아니라 소비에트연방 역시 큰 타격을 입었음을 자각했다. 그래서 양측 모두 가능한 많은, 가능한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하여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대응 가능한 군력을 갖추고 상대를 "반격"을 통해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도록 준비하고자 하였다. 장거리미사일, 대륙간 탄도미사일, 핵잠수함 등은 상대방이 감지하기 어려운, 그래서 사전에 파괴시킬 수 없는 무기로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위력까지 갖춘 무기였다. 이처럼 반격 시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군력을 갖춤으로써 상대를 위협하는 행위는, 그 어느 쪽도 자국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에 두고 있었다. 그 결과 양대 권력 사이에 일종의 균형이 형성되었고,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쿠바 사태를 통해 양대 강대국의 상호 이해가 세계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도 드러났다. 무장경쟁을 제한해야만 세계가 또 다시 큰 위험에 처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 외교정치의 새로운 정책적 기조인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에서도 드러나는데, 미국은 공격에 대해 전면적인 핵 보복을 하지 않고, 핵을 이용한 반격을 최후의 수단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무장 가능성은 계속해서 열려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경쟁의 비용은 소비에트연방뿐 아니라 미국에게도 경제적으로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적 부실 여기에 두 나라는 양대 진영 내에서 리더쉽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퇴진, 인종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대적이고 지속되었던 공개적 반대운동 때문에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체면이 깎였다.


p. 16 흐루시초프 정권의 몰락,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시위의 폭력적 진압 그리고 무엇보다 점점 악화되어가던 소비에트 연방의 물자공급실태 및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공산주의의 이미지는 어디에서나 나빠지고 있었다. 양대 초강대국은 각자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의견이나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제삼세계 국가들에서도 양대 초강대국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 어떤 진영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는 국가들은, 세계 모든 국가가 한 쪽 블록을 선택해 블록의 일원이 되고 싶어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미국뿐 아니라 소비에트연방의 견제 대상으로서 중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조약과 회의를 통한 긴장완화 결국 여러 가지 이유에서 양대 초강대국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972년 장거리 미사일(전술무기)의 제한을 위한 협정인 SALT-I 조약이 체결되었고, 1979년에는 SALT-II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들은 무장 규모의 상한선을 제시할 뿐, 신뢰관계 형성을 위한 긴장완화를 위한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긴장완화를 위한 방법은 1973년 이래 헬싱키에서 개최되던 "유럽 안전 보장 협력 회의(CSCE)"에서 제안되었는데, 이 회의에는 NATO 회원국들뿐 아니라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구성하는 국가들도 참석하였다. 1975년 채택된 헬싱키 최종 의정서는 상대 군대에 감시관 파견, 인권과 자결권 존중 등과 같이 신뢰관계 형성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의정서는 구체적 효력을 갖는 정치적 조약이라기 보다 신뢰관계 형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상호 이해를 나타나는 조약이긴 하지만, 헬싱키 최종 의정서는 긴장완화 정책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의정서를 통해 양대 초강대국은 공동의 기조에 동의하였고, 동블록 내 반정부 세력들이 이 기조를 근거로 삼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의정서 덕분에 장기적으로 양대 블록 내에서 반목 약화를 가능케 한 사상적 전제가 마련된 것이다.

새로운 "빙하기": "NATO-이중결정", …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은 우선 이중전략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대화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대응을 통해 세계 초강국으로서의 위력을 과시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중반 이후 SALT 협정에 저촉되지 않는 중거리 미사일을 현대화하여 이 SS-20 미사일을 동유럽에 배치함으로써 서유럽의 주요 목표물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NATO는 소비에트연방의 미사일 배치를 위협으로 정의하고 1979년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NATO가 중거리미사일을 중유럽에 배치하겠다고 결정하였다. 이 "NATO의 이중결정"은 서방세계에서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평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냉전" 또는 심지어 "뜨거운 전쟁"이 야기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시위들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가을 퍼싱 II(Pershing II) 중거리 미사일dl 유럽에 배치되었다.

M2 아폴로호와 소유스호의 발사 기념 브로치 우주공간에서도 동서 진영 간 경쟁은 이어졌지만, 긴장완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우주공간에서도 협력을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1975년에 아폴로호(미국)과 소유스호(소비에트연방)가 도킹에 성공하였고 양측 우주비행사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긴장완화의 상징이 되었다.


p. 17 1979년에는 소련군이 이슬람 세력인 무자히드(아랍어 "투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사회주의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소비에트연방이 "블록" 이외의 지역에서 감행한 최초의 군사적 개입은 당시까지 유효했던 현상황 유지 원칙을 깨뜨렸다. 결국 미국과 NATO는 경제적 제재를 통해 대응하였고,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던 올림픽 불참으로 위협하였다. 그 밖에도 미국은 이슬람 저항세력에게 무기와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1983년 레이건(Reagan) 미국 대통령은 핵공격 방어를 위한 우주 군비확장을 목표로 한 새로운 미사일 프로그램인 SDI(전략방위구상)-프로그램을 선언하였고, 소비에트연방은 새로운 방어기술 개발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이 사건과 유럽 내 중거리 미사일의 배치로 인해 또 다시 무장경쟁이 시작되었다. 긴장완화 대신 두 초강대국 사이에 "새로운 빙하기"가 도래했다는 말이 돌았다.

M3 아프가니스탄 - 소비에트연방 막다른 골목에 처하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련군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드들이 소련군의 탱크를 점령한 모습이다.

M4 본(Bonn)에서 1983년 일어난 평화시위 1983년 10월 22일 본에서는 3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독일에 핵무기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p. 18 M5 긴장완화: 무장한 채 평화라? 1973년 6월 미국에서 돌아온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schnew): 그 누구도 우리가 목숨을 받쳐 달성하려는 그것을 아주 잠시라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들의 공존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주의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배신자가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우리를 심판하고 10월혁명을 기억하며 우리의 연대를 기대하며 해방을 위해 싸울 의지가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출처: C. Durand-Berger: Le Défi soviétique, Paris 1979

M6 NATO의 이중결정은 불가피한 결정이었는가? 당시 기민당(CDU) 대표이자 훗날 연방총리가 된 헬무트 콜(Helmut Kohl)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며 기록하였다: 나는 1979년 가을 다른 사람들과 소비에트연방이 중거리미사일을 보유에 있어서 거의 절대적 위치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동의했다. 만약 소비에트연방이 중거리미사일 절대 강국이 될 경우, 소비에트연방은 역사상 최초로 현대적 핵무기를 통한 방어적 공격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이는 전혀 새로운,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소비에트연방의 과도한 중거리미사일 능력 보유 시 유럽은 미국의 핵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될 상황이었다. Helmut Kohl: Erinnerungen 1930-1982, München 2004, p. 554 이하


M 7 동서 진영 간 무장 상태, 1982년 기준


[?] 긴장완화정책 1960년대 중반 이후 동서 갈등의 완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물론 두 진영의 대치 상황은 계속되었지만, 협상을 통해 새로운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 간에 정기적인 교류가 시작되었고, 학술적, 문화적 협력이 활성화되었다. 그 밖에도 무장 규모를 제한하기 위한 조약들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긴장완화정책이 추진되던 시기는 1979년 NATO의 이중결정과 소비에트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으로 끝났다.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브레즈네프(Breschnew)가 두 강대국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기술하라. 그는 긴장완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M5) (2) 하이트칭거(Haitzinger)의 캐리커처를 설명하라. (M1) (3) CSCE의 최종 의정서에 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고 짧은 보고서를 작성하라. 이때 이 최종 의정서의 기본 정신이 양대 진영 간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데 있어서 내적으로 어떠한 작용을 했는지 논하라. http://www.dhm.de/leom/html/dokumente/NeueHerausforderungen vertragKSZESchlussakte/index.html (2007s. 07.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