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과 최근의 정치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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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최근의 정치경향

학습목표
- 1992년 선거에서 어떻게 클린턴은 승리하게 되었으며 그의 첫 번째 임기에서 그가 씨름해야 했던 문제들은 무엇이었는가?
- 왜 공화당은 “미국과의 계약”을 발표했는가?
- 클린턴의 두 번째 임기에서 어떤 스캔들이 논란이 되었는가?
- 2000년 선거의 결과는 무엇이었고 새로운 대통령은 어떤 목표를 제시했는가?

요점
빌 클린턴의 재임기는 많은 성공을 포함하고 있지만 스캔들에 의해 손상을 입기도 했다. 조지 W. 부시는 근소한 차이로 2000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클린턴의 뒤를 이었다.

핵심용어
- 미국과의 계약
– 화이트워터 사건

학습주안점
- 세부 사항을 찾아내기: 이 번 과를 학습하면서 1990년대의 주요한 정치적인 문제들로 아래 표를 완성시키시오.


배경
빌 클린턴(Bill Clinton)이라는 이름의 한 진지한 젊은이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손을 힘 있게 붙잡았다. 아칸소 주의 작은 마을에서 온 17세 소년이 대통령과 악수를 한 것이다! 이 경험은 클린턴이 정치에 나서는 동기가 되었고 그로부터 30년 후 1993년에 클린턴은 백악관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미국의 42대 대통령으로서 그곳에 8년을 머물렀다.


1992년 선거
1992년 대통령 선거운동은 3파전이었다. 1912년 태프트 대통령이 우드로 윌슨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을 상대로 싸웠던 이래 제3의 후보가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후보들 공화당 쪽에서는 현직 대통령 조지 H. W. 부시가 재선을 노리고 있었다. 공화당은 당시 주요 이슈로 등장한 가족 가치의 계속적인 훼손 문제를 자신들이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냉전을 끝내고 페르시아만 전쟁을 승리하는 데 있어 부시 대통령의 역할을 찬양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의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어 경제문제가 선거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무소속 후보 H. 로스 페로(H. Ross Perot)는 텍사스의 부호로서 재정과 경제에 대한 정부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선거에 뛰어 들었다. 페로는 워싱턴의 ‘아웃사이더’로서 선거에 임했다. 그는 어느 이익집단과도 관련이 없기 때문에 전 국민의 필요만을 생각하겠다고 다짐했다.

  • 사진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는 클린턴의 사진]17세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후 빌 클린턴은 정치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JFK처럼 클린턴도 미디어 시대의 선거운동의 혜택을 보았다.

민주당은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을 후보로 지명했다. 클린턴은 불경기를 끝내고 미국의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연방 예산적자와 의료보호 문제를 처리하겠다고 공약했다.

선거운동 이슈
그의 영웅 케네디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클린턴은 “미국이 다시 뛰게 하려면”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믿었고 동시에 정부가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그 규모는 축소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노선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는 자신을 ‘신 민주당원’이라고 부르면서 전형적인 ‘세금을 올리고 지출을 늘리는’ 큰 정부를 추진하는 민주당원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했다. 그의 메시지는 끊임없이 의회에서 다투기만 하는 양당 정치에 염증이 난 국민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일부 비판자들은 클린턴이 선거에 이기려고 – 진실 여부를 떠나서 –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한다고 공격했다. 어떤 여성이 클린턴과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고 그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했지만 클린턴은 이를 부인했다. 그가 어떻게 그리고 왜 베트남전쟁에 징집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해명도 진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문제들은 ‘열심히 일하는’ 클린턴을 실패하게 할 만큼 심각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물러서지 않는 그를 ‘돌아온 아이’라고 부르며 찬양했다. 이 별명은 46세의 클린턴이 68세 된 부시보다 한 세대 젊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선거 날 클린턴은 총투표의 43퍼센트를 차지하고 부시는 38퍼센트를 얻었다. 페로도 당당히 19퍼센트를 얻어 클린턴은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당선되었다. 선거인단 표는 클린턴이 370, 부시가 168, 페로는 한 표도 받지 못했다.


클린턴의 첫 임기
빌 클린턴은 1993년 1월 첫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민주당이 상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의기양양했다.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한 정당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장악하게 되었다.

경제 개혁
경제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클린턴은 중도 노선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는 오래 끄는 불경기를 잡기 위해 정부지출을 늘이기도 하고 세금을 줄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예산 적자를 줄이기 위해 지출을 줄이고 어떤 세금을 올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코스를 가는 것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몹시 어려웠다. 의회는 클린턴의 첫 예산안을 간신히 통과시켰다. 하원은 단 두 표차로 통과시켰고 상원은 50-50으로 찬반 동수가 되어 부통령 앨 고어(Al Gore)가 상원의장으로서의 결정권을 행사했다. 적자 예산을 피하기 위한 지출 축소와 세금 증액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의료보호를 둘러싼 싸움
클린턴이 취임할 때 미국 인구 중 3천7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의료보험에 들지 못했다. 해가 거듭할수록 이 숫자는 계속 증가했고 병원 진료비도 함께 올랐다. 많은 미국인들이 병원 가기가 점차 힘들어 졌다. “우리의 의료보호 제도는 파탄에 이르렀고 이제 이를 고쳐야 할 때입니다.”고 1993년 9월 대통령이 전국 TV에 나와 선언했다. 그는 의회에 정부가 관리 감독하고 모든 국민이 혜택 받을 수 있는 의료보험 사업법을 제안했다.

  • 사진 [지지자들의 환호 가운데 있는 클린턴]

역사 속의 한 장면: 대통령에 출마하기 전부터 빌 클린턴은 선거운동의 대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사진에서 그는 성공적이었던 1992년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 지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 시각정보를 분석하기: 이 사진은 대통령 선거운동이 겪어야 하는 어떤 어려움들을 보여주는가?

  • 사진 [클린턴이 등장한 롤링스톤지 표지와 선거운동 배지]

클린턴의 카리스마와 대중문화와의 연계성은 대통령 후보로서의 그가 폭넓은 호소력을 갖게 했다. 선거운동기간 동안 그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구호를 사용해서 그가 이 나라의 경제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수의 보험업자, 전문직업인 그리고 중소기업인들이 이를 격렬히 반대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거대 정부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어느 정도 까지 혜택을 주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1년 동안 논란이 계속된 후 클린턴의 의료보호 개혁 구상은 의회에서 필요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공화당의 ‘미국과의 계약’
클린턴의 의료보호 계획 실패는 대통령에게 고난의 신호였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조지아 출신 하원의원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는 공화당 후보들에게 그가 ‘미국과의 계약’이라고 내놓은 것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계약’은 연방정부의 역할을 되돌리고 일부 규제조치를 폐지하고 세금을 줄이겠다는 공약이었다.
많은 유권자들이 민주당 장악하의 의회가 국민의 문제에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때에 나온 이 제안을 열렬히 지지했다. 1994년 유권자들은 40년여 만에 처음으로 공화당을 상하원의 다수당으로 만들었다.

의회 대 대통령
공화당의 초선 의원들이 신속히 하원에서 강력한 그룹을 형성했다. 그들은 깅리치를 하원의장에 선출했다. 새 시대에는 대통령이 아니고 의회가 나라의 나아갈 길을 인도해야 한다는 말도 정계에서 나돌았다.
공화당은 7년 이내에 균형예산을 짤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가지 사회복지 사업 지출 삭감을 제안했고 하원은 이를 거의 대부분 통과시켰다. 이렇게 통과된 법안들 가운데 많은 수가 상원에서 부결 되거나 클린턴 대통령의 거부권행사로 폐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깅리치는 자신이 “미국 정치 논의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사람들은 이제 정부규모를 축소하고 균형예산을 짤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1995년 말 클린턴과 깅리치는 예산 삭감 문제로 격돌했다.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아 일시 정부기관이 문을 닫고 수백만 시민이 공공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예산 전쟁을 기점으로 클린턴의 회복기가 시작됐다. 많은 미국인들이 정부기관 마비를 공화당 의원들의 잘못으로 보고 그들을 타협할 줄 모르는 극단주의자로 보게 되었다. 클린턴은 공화당의 지출삭감 제안을 비열한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개혁에 헌신한 지도자로 보여 줌으로써 전국 여론조사에서 지지도를 끌어올렸다.

복지제도 개혁
1996년 8월 의회와 대통령은 복지제도의 광범한 개혁에 합의했다. 천2백8십만 명의 아동양육지원(Aid to Families with Dependent Children, AFDC) 사업 수혜자들이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연방정부로부터의 현금 직접지원을 없애고 각 주가 연방정부에서 내려오는 지원금을 자체의 복지 프로그램에 따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새 법은 또한 복지지원을 가족 당 5년으로 한정하고 성인들은 지원금을 받은 지 2년 안에 일을 하도록 했다. 이 역사적인 정책변경으로 60년 계속된 사회복지법의 방향이 되돌려 졌다.


클린턴의 2차 임기
공화당이 1995년 의회 다수의석을 차지하게 되자 클린턴의 재선가능성은 희미해 보였다. 공화당의 공약이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 클린턴은 공화당이 자신에게 붙인 ‘세금 걷어 퍼주는 자유주의자’ 라는 별칭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 당시의 소리를 들어보기: 빌 클린턴의 선거운동 연설과 다른 최근의 소리들을 들어보시오.
  • 사진 [“미국과의 계약”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는 깅리치의 모습]

역사 속의 한 장면: 야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뉴트 깅리치는 공화당의 “미국과의 계약”의 성취를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 핵심 문제를 찾아내기: 이 계약은 정부 지출을 삭감하는 논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 학습이해도 확인: 1996년 클린턴이 재선되게 된 요인들은 무엇인가?


1996년 선거
공화당 대통령후보는 상원 원내대표로 35년간 존경받는 의원생활을 한 밥 돌(Bob Dole)이었다. 로스 페로는 또다시 선거에 입후보했는데 이번에는 새로 창당한 개혁당(Reform Party) 후보로 나왔다.
선거가 임박하자 클린턴은 몇 가지 인기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그 중에는 최저임금 인상안이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2년 선거를 좌우했던 경제상황이 또다시 호전되어 클린턴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유권자들은 총투표의 49퍼센트를 클린턴에 주어 그를 다시 백악관으로 보냈다. 돌은 41퍼센트를 얻었고 페로는 8퍼센트에 그쳤다. 선거인단 표는 클린턴이 379표를 돌이 159표를 가져갔다.

스캔들과 2차 임기
클린턴 첫 임기 중에 제기된 스캔들을 1996년 선거운동 기간 중 밥 돌이 많이 강조한 바 있었는데 이 문제는 대통령의 2차 임기까지 이어졌다. ‘화이트워터 사건’이라고 불린 이 사안에서 클린턴은 수년전 아칸소 주에서의 불법대출과 토지거래에 연관되었고 주지사로서의 영향력으로 그의 과거 동업자에 대한 당국의 수사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법무장관 재니트 레노(Janet Reno)는 특별검사를 임명하여 이러한 혐의를 수사하도록 했다. 그 결과 클린턴의 친지와 과거 동료 몇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아 감옥에 갔지만 대통령 본인이 어떤 비리를 저지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재선 직후 또 한 가지 혐의가 제기 되었는데 클린턴이 불법 정치헌금을 받고 그 대신 정치적 특혜를 베풀었다는 것이었다. 상원 특별위원회가 양당의 당원들이 선거운동 재정관계법을 위반했음을 밝혀냈으나 클린턴이 직접 위반한 바는 없다고 밝혔다.

클린턴의 탄핵
대통령으로 6년차인 1998년은 좋은 뉴스로 시작되었다. 즉 1969년 이래 처음으로 정부가 흑자 재정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분 좋은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해에 새로운 스캔들이 클린턴을 휩싸서 그를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탄핵 재판을 받는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화이트워터 사건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Kenneth Starr)가 클린턴 대통령과 한 젊은 백악관 인턴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성추행 혐의 사건에서 클린턴은 그 인턴과의 성관계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스타 검사가 8월에 연 대배심 심리에서 클린턴은 같은 부인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또 가족과 국민을 오도했음을 인정했다.
9월에 스타 검사는 하원에 여러 가지 탄핵사유를 담은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는 하원과 전국에 걸쳐 극도로 파당적인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클린턴의 행동을 비판하면서도 다수의견은 그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고 탄핵에 회부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998년의 중간선거 결과는 유권자들의 일반적인 클린턴 지지를 보여주었다. 민주당이 하원에서 다섯 의석을 추가했고 상원의석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19일 하원은 클린턴 대통령을 위증과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탄핵재판에 회부하기로 의결했다. 대부분 공화당원은 ‘가’표를 민주당원은 ‘부’표를 던졌다.

  • 심화학습: 세계적 사건

- 테러리즘과 미국[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중에 미국인들은 테러리즘이 새로운 국가적인 위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이슬람 테러조직에 의한 1993년 2월 월드트레이드센터의 폭발로 6명이 사망하고 천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1995년 미국인인 티모시 백베이와 테리 니콜스에 의해 4월 오클라호마시 연방정부 건물에서 일어난 폭발로 168명이 사명했다. 해외에서는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의 대사관에 설치된 폭탄으로 200명이 사망했고 2000년 10월 예면의 항구에서 급유중인 미국 군함 콜 호가 공격을 받아 17명의 미 해군이 사망했다. 이 공격은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라는 테러조직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 사진 [탄핵 재판 방청권]

상원은 클린턴에 대한 탄핵재판의 방청권을 발급했다.

상원의 탄핵재판은 1999년 1월 7일 열렸다. 많은 상원의원은 클린턴이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했으나 이 잘못이 과연 대통령 유죄판결의 헌법적 요건인 ‘중한 범죄와 비행’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1999년 2월 12일 상원은 대통령이 죄가 없다고 표결했다.
전례 없는 경제 호황이 이 과정에서 클린턴에 대한 지지를 높였을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긴 경제적 확장의 시기를 이끌었고 그의 임기 말에는 예산이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경제가 계속 성장하자 국가는 낮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유지했다.


2000년 선거
튼튼한 경제와 대통령의 스캔들은 2000년 선거가 예측불허의 백중한 경쟁이 될 것을 예고했고 그 예고는 들어맞았다.
선거운동 중 공화당은 도덕성을 회복하고 백악관이 존경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거 날까지 여론조사는 공화당 후보 텍사스 주지사 조지 W. 부시(전 대통령 조지 H. W. 부시의 아들)와 민주당의 알 고어 부통령이 팽팽히 맞서 있음을 보여주었다.
선거 캠페인 공방은 정부가 연방 예산 잉여분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있었다. 부시와 공화당은 이 돈을 감세를 통해 국민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주당은 부시 식으로 감세하면 부자들만 덕을 볼 것이라 하면서 남는 돈은 사회보장에 그리고 국가부채 상환으로 돌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거날 밤, 여러 주에서의 표차가 너무도 근소하여 승자를 가려내기가 불가능 했다. 부시도 고어도 승리를 선언하기에 필요한 선거인단 표 270개를 확보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승부를 가릴 수 없는 플로리다 주의 집계가 더욱 중요해 졌다. 주 법은 이렇게 백중한 선거의 경우에는 재개표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 공화 양측은 법정에서 그리고 언론을 통해 재개표의 절차와 범위에 관해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한 달 동안 논쟁이 계속된 후 이 문제는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부시 대 고어 사건에서 최고 법원의 9명 판사들마저 정치적 편향에 따라 입장이 갈리었다. 보수파 판사들은 고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 재보였던 재개표를 반대하는 쪽을 지지하였다. 고어가 일반투표에서는 이겼으나 선거인단 표는 부시가 271 대 266으로 이겨 대통령이 되었다.


조지 W. 부시의 첫 임기
2001년 1월 취임한 부시에게는 많은 어려운 일들이 안겨졌다. 시초부터 그는 전임자들과 많이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갔다.

  • 지도: 2000년 대통령선거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각 주별 득표수를 보여주는 지도]
지도 읽기: 2000년 선거는 역사상 네 번째로 일반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선거였다.
- 지역: 미국의 어느 지역이 일반적으로 부통령 고어를 지지했는가?

  • 사진 [투표용지를 검사하는 여성]

역사 속의 한 장면: 일부 펀치카드 투표용지가 특히 플로리다주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들어났는데 펀치로 잘린 부분이 떨어져나가지 않아서 투표자의 의사가 결정이 된 것인지 검사해보아야 했다.
- 핵심 문제를 파악하기: 2000년 선거에서 문제 있는 투표지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었겠는가?
초기에 그는 몇 가지 중심적 문제에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사상 유례없는 큰 폭으로 세금을 깎는데 의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부시 대통령은 납세자에게 돈을 돌려줌으로써 기울어가는 조짐을 보이는 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중요한 교육개혁 법안 통과를 추진했다. 대통령의 계획은 학생들이 자신의 성적에 더 큰 책임을 지게하고 학교와 교사의 질을 올리기 위해 연구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국내 정책은 그러나 곧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의 임기 첫해가 다 지나기 전에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으로 말미암아 그의 온 시간과 정력을 대외 문제에 바쳐야만 하게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과에서 다룬다.


2004년 선거
2004년 대통령 선거는 테러사태, 힘든 이라크 전쟁 그리고 예측불허의 경제상황 등을 배경으로 치러졌다.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 후보로 나온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의원 존 케리(John Kerry)는 막상막하의 경쟁을 벌였다. 선거일이 다가 올 때까지 어느 후보도 여론조사에서 뚜렷한 우세를 보이지 않았다. 부시와 공화당은 케리 후보의 신뢰성과 정직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공세를 취했고 케리와 민주당은 이라크 전쟁과 경제문제를 표적으로 삼아 현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2004년 11월 선거일 밤은 2000년 선거 때와 흡사한 분위기였다. 미국과 전 세계 사람들이 TV와 인터넷으로 선거 결과를 열심히 지켜보았다. 2000년 선거와 마찬가지로 최종 결정은 한 주의 투표결과에 달려있었다. 이번 경우는 오하이오 주였다. 2000년 플로리다에서보다는 덜 어렵게 부시가 오하이오에서 이겨 재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표를 확보했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근소한 표 차이로 부시를 다시 백악관으로 보내 두 번째 임기를 지내도록 했다.
그의 첫 번 임기 때 다뤘던 문제에 더하여 부시에게는 새로운 과제들이 주어졌다. 그 중에는 은퇴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와 사망한 윌리엄 렌키스트 판사 후임으로 두 사람의 대법원 판사를 임명하는 일도 들어 있었다. 간단한 청문회를 거쳐 상원은 존 로버츠(John Roberts) 판사를 대법원장으로 인준했다.

  • 사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로라 여사와 걷고 있는 모습]

새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그의 아내 로라와 2001년 취임식 날에 함께 걷고 있다.
- 정보를 종합하기: (a) 부시는 임기를 시작하면서 어떤 도전에 직면했는가? (b) 이 도전들에 대해 그는 어떻게 접근했는가?


1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많은 미국인 유권자들은 왜 1992년에 클린턴을 지지했는가?
2. 공화당이 제시한 “미국과의 계약”이란 무엇인가?
3. 화이트워터 사건과 같은 스캔들과 탄핵은 클린턴의 임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4. 조지 W. 부시는 그의 임기 초기에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이념을 인식하기: 민구장원들과 공화당원들은 1990년대에 여러 면에서 대립하였다. 어떤 문제에서 그들은 차이를 보였는가? 왜 두 정당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6. 편집자에게 편지쓰기: 당신의 지역 신문사에 2000년 선거에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들을 이후에 어떻게 피해갈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편지를 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