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만들기

cefia
cefia>Ksnet님의 2016년 8월 21일 (일) 12:24 판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 해외한국학지원(한국문화강좌))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곡식가루를 찌거나 삶아 익힌 음식.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떡을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원시농경의 시작과 함께 행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 최초의 곡물요리는 곡물을 연석에 갈아서 분쇄한 다음 옹배기에 담고 물을 부어 가열한 죽이었으나, 당시의 토기는 오늘날처럼 단단하지 못하여 죽이 될 때까지 장시간 가열하면 토기의 흙냄새가 죽에 옮겨져 맛이 나쁘게 되므로 시루가 생겨남에 따라 곡물을 시루에 찌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낙랑유적에서는 청동제의 시루와 토기로 된 시루가 발견되고 있으므로 당시의 대표적 곡물인 피·기장·조·보리·밀과 같은 곡물을 가루로 하여 시루에 찐 지금의 시루떡과 같은 음식을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밖에 콩·팥 등도 함께 넣어서 지금의 고사떡이나 수수팥경단과 같은 음식도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밀가루 보급의 경계가 되는 한나라 이전과 이후에 떡을 가리키는 글자가 달라진다. 즉, 밀가루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떡을 이(餌)라 표기하고 쌀·기장·조·콩 등으로 만들었는데, 밀가루가 보급된 이후에는 밀가루로 만든 떡은 따로 병(餠)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떡은 가장 대표적인 별식으로, 우리 속담에 “밥 위에 떡”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흡족하게 가졌는데도 더 주어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밥보다는 떡을 한층 맛있는 음식으로 생각하게 하는 이 속담에서 떡이 별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밥 먹는 배 다르고 떡 먹는 배 다르다.”고 할 정도로 떡배를 따로 찼던 우리의 생활은 “떡방아소리 듣고 김칫국 찾는다.”,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을 낳기도 했다. 별식이며 동시에 간식이 되기도 하는 떡은 계절적으로는 가을과 겨울철에 주로 많이 해놓고 먹었다.

추수한 뒤 비가 오면 밖에 나가 일을 할 수도 없고 곡식은 넉넉하니 집안에서 떡이나 해 먹고 지낸다 하여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라고도 했다.

또한 겨울철에는 인절미를 해두었다가, 화로에 석쇠를 올려놓고 딱딱하게 굳은 인절미를 구워 조청이나 홍시에 찍어 먹었으니, 그 맛이 겨울 정취의 으뜸이며 별미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별식의 떡은 이웃과 친지와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풍속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떡을 하는 여유를 보이는 집에서는 자기 집 식구만을 위하여 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과 친척집에 나누어주기 위해서 많은 양의 떡을 하게 마련이었다. “남의 떡에 설 쇤다.”는 말과 함께 “얻은 떡이 두레반이다.”라는 속담은 바로 떡을 하면 나누어 먹던 풍속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말이다.

떡은 별식이나 간식으로서 뿐 아니라 잔치나 제사의 중요한 진설품이기도 하다. 특히 잔치 때에 올리는 떡은 맛을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이기 위하여 상차림에 쓰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예쁘게 떡을 만들기 위한 기구도 고안해 내어 다식판처럼 나무토막에 무늬를 조각한 나무떡쌀이나 자기떡쌀 등을 사용하였다.

제사상에도 떡이 진설되는 점으로 보아 귀신도 산 사람처럼 밥보다 떡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집안 귀신들의 장난으로 집안이 항상 불화하고 사나운 일만 계속되는 집을 ‘떡 해먹을 집안’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귀신을 위해 떡을 하여 고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참가자 이미지

체험후기

Jielei Chen_떡박물관

Hsieh Chia Hsuan_떡박물관

Bocharnikova Marta_떡박물관

Czentye Mihai Levi_떡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