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일본조합교회의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 식민지 근대성의 문제

ce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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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k Sung De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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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in Latin Alphabet:
Nationality: Republic of Korea
Affiliation: UCLA


초록 개신교 식민지 근대성의 한 사례: 조합교회 타카하시 목사의『耶穌傳硏究』(1915) 분석 옥성득 (UCLA)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조선 순회목사로 평양에서 거주하던 타카하시 타카조(高橋鷹藏, 1864~1923)는 1915년 서울에서 『耶穌傳硏究』를 발행했다. 교인 교육용과 전도용으로 사용되면서 1916~17년에 교인 급증에 기여했으며, 교인 12,000명 규모였으므로 최소 5,000부는 발행, 판매되었을 것이다. 이 논문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서로서 당시 한국 개신교를 지배하던 보수적인 19세기 북미 복음주의 신학에 정면 도전한 이 소책자에 대한 연구이다. 이 시론적 분석을 통해 다음 네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려고 한다. 1) 한국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기점을 1915년으로 볼 수 있다. 2) 1916년 이후 독립적인 조선적 교회 설립론의 배후에는 조합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이 있었다. 3) 그 자유주의 신학은 제국성(反 기독교 민족주의)과 근대성(反 미국 보수적 복음주의) 양자의 성격을 지닌다. 4) 이를 ‘기독교 식민지 근대성’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5) 그리고 추구 논의를 위한 제안으로서 1910년대 조합교회의 자유주의 신학과 50년 후 1960년대의 토착화 신학에는 일정한 유사성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조합교회 조선전도에 대한 기존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통치에 협력한 조합교회의 식민성, 곧 조선인의 일본인화라는 ‘동화’ 정책의 도구로 봉사한 조합교회의 정치성을 비판하는 민족주의 입장을 견지했다. 곧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이분법적 대결 구도가 지난 40년 동안 일본조합교회 조선 전도를 분석하는 틀이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식민지 조선에서 선교한 일본 조합교회의 정치성(식민성)을 규명하는 것과 아울러 그 근대성의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기독교 식민성’(Christian coloniality) 혹은 ‘식민지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y)은 1910년 이전 서구 교회들의 선교에서도 존재했다는 점에서 일본조합교회의 식민성만 부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역으로 1910년 이전 서구 선교회들이 가진 교육과 의료 등에서의 근대성을 강조한다면, 이와 동일하게 일본조합교회에 존재했던 근대성의 정체를 밝히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신학의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식민지 근대성'의 관점에서 조합교회와 그 신학을 검토하는 작업이다. 즉 조합교회의 식민성을 추적하고 비판하는 민족주의 시각을 수용하되, A(조합교회의 식민성) + B(자유주의 신학의 근대성) = AB(조합교회의 제국주의 혹은 근대주의)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A + B = C(조합교회의 식민지 근대성)라는 해석학적 새 관점이 요구된다. 그러나 조합교회가 한국 교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개신교 식민지 근대성’은 일반 학계의 '식민지 근대성' 개념과 차이가 있으며, 대개 후자의 식민지 근대성 논의가 1920년대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조합교회로 흡수된 한국(지식)인의 반미국선교사 운동이 식민성의 지배를 받아 친일 운동으로 전락․포섭되면서 조합교회의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은 3.1운동 이후 1920년대의 ‘문화 정치’ 기간에 근대성 확보에 실패하고 몰락했다는 차이점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일본조합교회의 식민지 근대성은 1910년대 한국 개신교 내의 비주류 담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민족주의’와 보수주의 신학이 결합한 세력과 대결하면서 급성장한 기독교 제국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한 세력이 가졌던 식민지 근대성의 한 양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신학 사상사적 관점에서 보면 해방 이전 한국 개신교 신학의 3대 조류는 주류(主流)인 영미 신학, 1930년대까지 꾸준히 영향을 준 저류(底流)인 중국 신학, 그리고 1910년 이후에 본격적인 영향을 준 신류(新流)인 일본 신학이었다. 1910년대는 이 세 신학 조류가 합류하면서 갈등이 증폭되고 신학이 다양화되면서 토착적인 한국 신학이 모색되고, 선교사로부터 독립하는 ‘자유’ 교회와 ‘조선’ 교회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한국 교회사에서 상대적으로 연구가 적은 1910년대 연구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 유입 통로였던 일본조합교회의 일본인 목사와 한국인 지도자들의 저술과 설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1년 한국에 파송되어 10년 이상 선교한 타카하시 타카조의 『예수전』에 대한 연구는 한국 신학사 계보에서 잃어버린 한 연결고리를 찾아주고, 식민지 근대성의 한 전형적 형태인 일본 자유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확인해 줄 것이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1910년 이후 일제 통치 하에서 개신교는 무엇이었는가라는 큰 물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동시에 1910년 이전 북미 개신교가 중국 개신교를 매개로 한국 전통 종교문화와 정치사회문화 상황 속에서 한국화의 과정을 밟았다면, 1910년부터 제4의 변수로 등장한 일본 식민 통치와 일본 종교, 특히 일본 개신교의 영향 속에 새로이 구형되는 한국 개신교의 정체성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멀리 마테오 리치에서 시작된 동서 교섭에서,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기독교와 전통종교와 정치권 3자 간의 관계 설정이 핵심 과제였다고 할 때, 개화기의 조선 정부와 조선 유교, 일제식민지기의 총독부와 일본 종교(불교, 신도, 개신교)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더욱 심화되어야 할 부분이다.


주제어: 일본조합교회, 타카하시 타카조, 예수전, 역사적 예수, 자유주의 신학, 기독교 식민지근대성, 한국적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