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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2일 (일) 22:28 기준 최신판
2과 대공황의 사회적 영향
학습목표
- 어떻게 대공황 기간 동안 빈곤이 확산되었는가?
- 1930년대에 빈곤으로 어떤 문제들이 발생했는가?
-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어떻게 노력했는가?
요점
1930년대 초에 임금의 삭감과 실업의 증가로 미국 전역에 고통스러운 삶이 퍼져갔다.
핵심용어
- 후버빌(Hooverville)
- 더스트보울(Dust Bowl)
학습주안점
-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어떻게 대공황이 미국 사회의 각 부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예들 들어보며 아래 표를 채우시오.
∙ 대공황의 영향
구분/영향
도시 노동자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가 되어 가난하게 살았고 어떤 사람들은 “후버빌”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농부들/여성들/어린이들/성인남성들/소수인종들
배경
많은 미국인들은 대공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어려운 삶이 지속되었고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언젠가 친구들, 이웃들 또는 심지어 정부에게 생활비를 요구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사람들이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34년에 기록된 다음 이야기는 중산층 대학졸업자가 가난한 사람들의 대열에 들어서서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묘사하게 되는 그러한 당혹감과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나는 안락하고 누가 봐도 안정되게 살고 있었다. 내 남편은 저명한 오케스트라에서 좋은 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많은 유망한 제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남편이 일하던 오케스트라가 해산되면서 우리의 삶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남편은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했고 내가 가르치던 제자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우리는 이제 저축했던 돈에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었다.
1933년 초에 나는 임신 8개월째였는데 아파트 월세로 마지막 남은 12달러를 다 써버리게 되었다. 이제 난방, 욕조, 햇빛, 온수공급 같은 기초적인 안락함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쥐들과 침대에 기어 다니는 벌레들이 그 안락함을 대신해 우글거렸다.
남은 돈을 월세로 내 버렸는데 이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우리가 받은 교육의 커다란 영향으로 말미암아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자리를 얻고자 했지만 일할 곳은 없었다. 긴급구제사무소(Emergency Home Relief Bureau)에 신청하는 것이 절박한 우리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 앤 리빙턴(Ann Rivington) (가명) “우리는 구제금으로 산다.” - 스크리브너스 매거진(Scribner’s Magazine) 1934년 4월호
가난이 확산되다
당신의 예금 계좌가 있는 은행이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았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의 돈은 사라졌다. 아니면 당신의 부모님은 직장을 잃었고 집세를 내거나 은행의 담보대출금을 갚지 못한다. 어느 날 당신이 집에 돌아왔을 때 모든 가구와 소지품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쫓겨난 것이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대폭락 이후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의 수는 급격하게 늘었다.
- 추론하기: 이 사람의 피켓 속에서 1930년대의 자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어떠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대공황기에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노동자들에 비해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전문직과 사무직 근로자들도 다른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해고되었다. 저축금이 사라진 사람들은 왜 은행이 안전하게 예치해놓은 그들의 돈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후버빌(Hooverville)”
경제의 사다리의 밑바닥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당했다. 집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실업자들은 친척들의 집에 얹혀살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은 전국을 떠돌았다. 1931년 인구조사자들은 뉴욕시에서만 노숙자의 인구가 1만5천 명이라고 추산했다.
노숙자들은 판자촌을 이루어 타르를 먹인 종이, 상자곽 혹은 폐기물로 오두막을 만들어 살기도 했다. 이런 노숙자들의 피난처는 경제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후버 대통령을 비난하는 뜻으로 “후버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에 사는 한 여성이 후버빌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여기서 이 모든 사람들은 오래된 녹슨 자동차 안에서 살고 있었다. 오렌지 상자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가족은 그 많은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 상자에서 살았다.” 많은 노숙자들과 실업자들은 한 곳에 머물기 보다는 떠돌아다녔고 “호보 정글(hobo jungle)”이라고 불리는 빈민가를 히치하이킹을 하며 옮겨 다녔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기차를 탔는데 불법적으로 몰래 기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들은 유개화차나 화물차에서 잤다. 1933년에는 이렇게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백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들은 감옥에 가거나 부상당하고 죽을 수도 있는 위험 속에서 살았다.
농촌의 고통
곡물가격이 떨어져 수입이 줄어들면서 농민들도 고통을 당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자 농장이 은행에 넘어가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다. 남부지방에서 농지소유주들은 소작인들을 내쫓았다. 농민들은 낮은 가격에 항의하여 수천 갤런의 우유를 쏟아버리고 곡물을 파괴했다. 이들의 절박한 행동은 식량이 부족했던 나라 전체에 충격을 안겼다.
더스트보울(The Dust Bowl)
미국 중서부의 수천의 농가들에게 대공항기의 삶의 곤경은 이 시기에 일어난 또 다른 큰 재앙에 의해 더 극한으로 치달았다. 이 재앙의 기원은 경제가 아니라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1931년부터 1940년 사이에 중남부 그레이트플레인즈(Great Plains)의 토양이 바람에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더스트보울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뉴욕 시의 한 후버빌에서 임시로 지어진 판자집들이 노숙자들과 실업자들의 집이 되었다.
- 비교하기: “후버빌”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는가? 오늘날 노숙자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가?
- 심화학습: 지리
- 더스트보울을 불러온 기후: 그레이트플레인즈는 “미국의 빵바구니”라고 불린다. 이곳은 풍부한 토양이 깊게 형성되어 있고 생육기간이 길고 지형이 평탄하기 때문에 농업에 이상적인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언제나 험한 기후를 겪어왔다. 뜨겁고 다습한 열대의 기단이 멕시코만으로 부터 올라오고 찬 극지의 기단이 북극권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온다. 이 두 기단이 충돌하면 강력한 상승기류를 동반한 폭풍이 형성된다. 이 지역초원의 풀들의 뿌리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기후의 변화로부터 토양을 보호해왔다. 그러나 농부들이 땅을 경작하면서 이러한 자연적인 보호막이 상실되었다.
더스트보울은 부분적으로는 1930년대의 먼지폭풍 때문에 발생했다. 농부들은 이 먼지폭풍이 극심했던 가뭄의 결과라고 말했다. 가뭄이 더스트보울을 만들어 낸 주요한 요인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농부들의 경작 습관도 한 몫을 했다.
상층부의 토양을 보호하는 깊이 뿌리내린 초원의 풀들이 있는 한 기후가 땅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농부들이 땅을 경작하면서 토양을 보호하는 자연적인 보호막을 걷어내게 되었다. 바람이 짙은 색의 영양분이 많은 상층부의 흙을 동쪽으로, 때로는 수 백 마일 너머로 이동시켜서 돌가루와 모래로 이루어진 움직이는 황량한 모래언덕이 드러나게 했다.
가뭄이 심했던 시기에 가장 강력했던 태풍은 검은 폭풍이라고 불렸다. 쓸려나간 먼지가 멀리 동부의 주와 도시들에 여러 톤 쏟아져 내렸다. 이 먼지들이 뉴욕시와 워싱턴 D.C.의 하늘을 어둡게 했다. 뉴잉글랜드의 눈을 붉게 물들였고 대서양 해안에서 수백 마일 떨어져 있던 선박들 위에도 내렸다. 가뭄과 바람이 7년 동안 지속되어 농부들에게 황무지를 안겼다.
끔찍한 기후와 농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더스트보울 지역의 60퍼센트에 이르는 농가들이 농장을 잃었다. 1930년대에 4십4만 명이 오클라호마를 떠났다. 3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캔자스를 떠났다. 오클라호마, 텍사스, 캔자스와 다른 남서부 평원의 주로부터 수천 가구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의 농장에 노동자로 일자리를 얻었다. 약 10만 명의 더스트보울 지역으로부터 온 이주민들은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고 같은 도시들을 향했다. 1940년대에 이르러 드디어 비가 내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곡물가격을 올리고 나서야 더스트보울 지역은 구제되었다.
가난이 사회를 황폐하게 하다
대공황이 지속되면서 전국에 물리적, 정신적인 고통을 안겼다. 실업과 일자리를 잃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불안을 야기했다.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했고 실제로 자신의 삶을 내던지기도 했다.
건강에 미친 영향
“아무도 굶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후버 대통령은 선언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수천 명 더 늘었다. 빈곤해져서 음식과 피난처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더 쉽게 병이 걸렸다. 어린이들은 오랜 기간 영양공급이 부족하고 적절한 건강관리를 받지 못하여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드디어 겨울이 되었지만 어머니가 옥수수죽 같은 것을 끓이느라 하루 한번 불을 피울 때 말고는 불구경을 할 수 없었다.” 한 노숙자 소년은 이렇게 회상했다. “아이들은 추우면 침대로 들어갔다. 나는 물론 고등학교를 그만뒀다.”
농촌에서는 사람들은 먹거리를 재배했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사과와 연필을 팔았고 음식을 살 돈을 구걸했고 식당 쓰레기통을 뒤지며 싸웠다. 땅이 있는 사람들은 “구제 정원(relief garden)”을 만들어 자급을 하거나 다른 필요한 물건들과 교환했다.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당시의 소리를 들어보기: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의 한 부분을 낭독으로 들어보자. 대공황기의 다른 소리들도 들어보자.
- 지도 읽기: 가뭄과 지나친 경작이 결합되어 그레이트 플레인즈를 먼지구덩이로 만들었다.
- 지역문제: 어떻게 농부들은 이 지역에서 척박한 기후로부터 지켜주는 자연적인 보호막을 파괴하게 되었는가?
“디트로이트에서 일곱 사람 중 한명은 정부의 구호품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짐승들처럼 길거리를 헤매며 먹다 남은 것을 찾아다녔고 학교로부터는 멀어져 있었다. 도심의 고등학생들 중에서 결핵환자는 세 배로 늘었다. 매일 4천 명의 아이들이 빵을 배급받으러 줄을 섰다. 그들의 푹 꺼진 생명력 없는 눈과 혈색이 없는 볼, 굶주려서 부풀어진 배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유럽의 굶주린 아이들을 닮았다.” - 로버트 코노트(Robert Conot)
가정에서 겪은 어려움 좁은 집이나 아파트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되면서 삶의 질은 악화되었다.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었던 아이스크림이나 영화관람 등을 포기해야 했다.
일자리를 잃거나 투자금을 날린 사람들은 더 이상 가족들을 부양할 수 없게 되어 실패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곤 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일을 하게 되면 남자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했다고 생각했다. 많은 남성들은 근무시간에 집에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 난처하게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가족을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여성들은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남편의 월급에 의존해 살던 사람들은 배고파하는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근심에 빠졌다. 일하는 여성들은 남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비난을 받았다. 훨씬 사정이 좋았던 1920년대에도 헨리 포드는 기혼 여성들을 해고했다. “우리는 남편에게 일자리가 있는 기혼여성들을 고용하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대공황기에 이런 관행은 일반화가 되었다. 1931년에 미국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이 관습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대부분의 교육청은 기혼여성을 교사로 채용하지 않았고 결혼하게 된 여성을 해고했다.
많은 여성들이 계속해서 일자리를 찾았지만 가사도우미나 타이핑, 보모와 같은 낮은 봉급의 일자리만이 “여성들의 일”로 여겨졌다. 대공황기에 여성들을 거의 고용하지 않았던 산업과 기타 다른 영역들이 가장 일자리 손실이 많았다.
- 학습이해도 확인: 어떻게 대공황은 사람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는가?
- 역사 속의 예술작품: 도로시아 랭(Dorothea Lange)의 가장 유명한 사진인 “떠돌이 어머니(Migrant Mother)”(1936년, 오른쪽) 시리즈는 대공황의 상징이 되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어머니의 표정은 그녀의 절박한 상황에 대한 무감각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이겨내려는 결의가 보이기도 한다. 위의 작품은 랭의 가장 유명한 사진 “화이트 엔젤 급식소(White Angel Breadline)”이다.
- 적합성을 판단하기: 랭의 사진은 일반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차별이 증가하다
경제적인 형편이 어렵게 되자 미국 내 여러 집단들이 서로 점점 줄어드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소수인종에 대한 의심과 적대행위가 전반적으로 증가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히스패닉, 그리고 서부의 경우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이제 백인 노동자들이 이전에 소수인종들이 차지했던 저임금의 일자리들을 요구하면서 모두 고통을 겪었다.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일자리뿐만 아니라 나라도 잃었다. 수천 명이 추방되었는데 그 중에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있었다.
흑인들의 실업률이 급증해서 흑인들 중 56퍼센트가 1932년에 일자리가 없었다. 어떤 백인 시민들은 공공연하게 백인들도 일자리가 없는데 흑인들에게는 당연히 일자리를 얻을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할렘으로 가는 기차를 탔던 사진작가 고든 파크스(Gordon Parks)는 훗날 다음과 같이 썼다.
“전국에서 모여든 흑인들 사이에서 생존 경쟁은 야비할 정도였다. 가난이 그들 모두와 나를 무자비한 손가락으로 한데 묶어버렸다.” - 사진작가 고든 파크스
정부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도 종종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차별했기 때문에 흑인교회들과 전국도시연맹(the National Urban League)같은 단체들이 사적인 구호활동을 했다. 파더 디바인(Father Divine)이라고 알려진 할렘가의 전도자의 추종자들이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수프를 제공했다.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교육, 투표와 의료혜택과 같은 시민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에 차별이 더 심했다. 사적인 폭력(lynching)도 증가했다.
사법제도도 소수인종의 권리를 종종 무시했다. 1931년 3월 앨라배마주의 스코츠버러(Scottsboro)에서 아홉 명의 흑인 소년들이 기차를 탔다가 두 명의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죄로 체포되고 고발되었다. 변호사를 선임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아홉 명 중 여덟 명이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스코츠버러 소년들(Scottsboro boys)” 사건에 북부지역의 단체들, 특히 공산당이 개입하여 이 사건을 이용하기도 했다. 공산당은 변호사 지원과 조직화된 시위을 도왔고 그 결과 여러 해 후에 판결을 뒤집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이 “소년들” 중 네 명은 여러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생존의 이야기들
대공항기를 살았던 세대는 그들이 어떻게 그 시기를 견뎌냈는지에 대해 그들의 손자손녀들에게 이야기를 남기곤 하였다. 윌슨 레드포드(Wilson Ledford)가 처음으로 대공황의 영향을 느끼게 된 것은 1930년 3월 그가 15세였을 때였다. 그는 테네시주 채터누가(Chattanooga)에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윌슨은 11살 때부터 시간제로 방과 후에 식료품점에서 일했다. 1930년에 그의 가족은 더 이상 채터누가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가족은 인근의 작은 마을인 테네시주 클리블랜드(Cleveland)로 다시 돌아갔다. 그들은 윌슨의 어머니가 아직 가지고 있던 집과 15에이커의 땅에서 세를 받아서 살았다. 소작인들이 일이 없는 때가 아니면 그들의 소유지에서 6달러의 월세를 받을 수 있었다. 거기서 세금과 보험금을 빼면 그의 가족은 한 주에 1달러로 생활해야 했다. 윌슨은 “이웃들과 품앗이를 했다.” 그는 가족들의 말과 소를 돌보고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하고 먹거리를 공급해주는 정원을 가꿨고 가축들을 먹이기 위해 옥수수를 키웠다.
- 미국인의 일생
- 도로시아 랭 1895-1965사진작가 도로시아 랭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카메라 없이 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도구이다.”라고 말했다. 1895년 뉴저지에서 태어난 랭은 어린 시절부터 사진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19년 랭은 샌프란시스코에 사진관을 열어 부자 고객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녀의 사진관의 창문 밖으로 대공황의 영향이 퍼져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사진관의 인화실에서 일하는 것과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랭의 첫 번째 전시회는 1934년에 열렸는데 더스트보울 지역으로부터 캘리포니아로 밀려오는 수백 명의 떠돌이 노동자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랭의 사진은 대공황을 겪는 가정들의 절박함과 용기를 세상에 보여주었다. 랭은 계속해서 1965년 죽기까지 미국인들이 겪은 고통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기록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1930년대와 그녀가 미국의 영구한 기록으로 만든 그 시대에 나타난 인간의 용기와 연관되어 기억될 것이다.
“돈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가 먹을 것을 대부분 직접 키웠다. 가끔씩 일감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밭을 갈아주기도 했다. 밭을 가는데 한 시간에 15센트를 벌었고 대신 말과 쟁기를 빌려주었다.” - 윌슨 레드포드
어떤 것도 허비되는 것은 없었다. 윌슨의 어머니는 닭을 키우고 달걀을 가지고 가게에 가서 그들이 직접 기르거나 키우지 못하는 것들과 바꿨다. 작업복은 98센트였다. 신발은 2달러였다. 그의 어머니는 3달러를 주고 돼지를 사와서 고기를 얻기 위해 키웠고 블랙베리를 따다가 젤리를 만들었다. 이 가정도 가난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남는 우유와 버터를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방 한 칸짜리, 비위생적인 바닥 위에 세운 오두막에서 사는 이웃 아줌마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윌슨은 고등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생존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레드포드 가족은 라디오가 없었다. 그러나 윌슨은 스스로 즐길 거리를 만들었다. 윌슨과 다른 몇몇의 아이들은 들판에서 큰 돌을 주워서 닦고 갈아서 야구장을 만들었다. 야구공은 매우 귀했다. “꽤 괜찮은 야구공은 25센트는 줘야 살 수 있었고 정말 좋은 공은 50센트나 했다. 경기를 하다가 공을 잃어버리면 모두가 찾아나서야 했다.”
1932년 여름에 그가 17세였을 때 윌슨은 채터누가에서 얼음 배달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거기서 다음해 여름에도 일했다. “나는 하루에 12시간씩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한 주에 3달러를 벌었다.” 가을이 되어 얼음가게가 문을 닫으면 윌슨은 히치하이크를 하며 남동부 전역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일자리를 찾았지만 얻지 못했다. “나를 태워준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타이어에 바람을 넣어주다가 손에 전체가 물집 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윌슨은 석탄, 면화 오렌지를 실어 나르는 화물트럭을 샀고 밤에는 모직공장에서 일하고 낮에는 얼음을 배달했다. 마침내 “치카모가 댐(Chickamauga Dam)에서 연락이 와서 거기로 일하러 가게 되었다. 댐에서 일하는 것은 매우 좋은 자리였다. 나는 한 시간에 60센트를 벌었다. 그 때쯤 되니까 형편은 나아졌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경기가 회복되지는 못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많은 미국인들이 먹을 것을 살 충분한 돈이 없을 때는 이렇게 줄을 서서 수프 배급을 받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 추론하기: 이런 경험 중 어떤 부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견딜 수 있었을까?
2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후버빌에는 누가 살았는가?
2. 1930년대 더스트보울이 만들어지게 된 요인들은 무엇인가?
3. 대공황기에 증가한 차별의 원인과 결과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4. 윌슨 레드포드의 경험에서 대공황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중심 주제를 파악하기: 대공황이 많은 미국인들의 심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시오. 대공황은 왜 사람들의 목표와 기대를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합니까?
6. 면접을 위한 질문을 작성하기: 대공황기에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지 직접 체험하기 위해 당신이 그 시대를 겪어온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 10가지를 작성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