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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2일 (일) 22:27 기준 최신판

1과 민권에 대한 요구

학습목표
- 20세기에 어떤 사건들과 문화적인 경향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영향력의 증대를 가져왔는가?
- 어떻게 미국인들은 대법원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반응했는가?
-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운동은 민권운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 어떻게 소수인동들이 1950년대에 민권을 요구하기 시작하게 되었는가?

요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민권운동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핵심용어
- 브라운 대 캔자즈 주 토피카 시 교육위원회 판결
- 몽고배리 버스 보이코트
- 통합교육

학습주안점
- 효과를 이해하기: 본 과를 학습하면서 각각의 인물들이 초기 민권운동에 미친 영향을 보이시오.


배경
1945년 8월 브루클린 다저스팀의 단장인 브랜치 리키(Branch Rickey)는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이라는 이름의 젊은이를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리키는 로빈슨에게 아프리카계 흑인은 별도의 흑인리그에서 뛰게 하는 메이저리그 야구의 규정에 도전을 하고자 하는 그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리키는 대학야구계의 유망주이며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로빈슨이 유색인종에 대한 장벽을 깨는 첫 번째 선수가 되기를 원했다.
리키는 로빈슨이 그에게 닥치게 될 압력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그를 낙담시킬 수 있는 행동들을 일부러 저질렀다. 로빈슨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력으로 위협했다. 로빈슨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리키씨, 당신은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야구선수를 원하십니까?” 리키는 대답했다. “나는 맞서 싸우지 않을만한 배짱이 있는 선수를 원합니다.” 1947년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에 합류해서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첫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었다. 많은 편견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품위 있게 행동했고 첫 시즌에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1947년에 신인선수상을 받았다. 1949년에는 메이저 리그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개인적인 성공뿐 아니라 로빈슨은 미국 전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높였고 다른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들이 그의 뒤를 이어 프로 스포츠 선수로 활약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향력의 상승
제2차 세계대전시기까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미국 사회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전후에 민권운동이 가속화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제 미국이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신념을 실현하는 나라가 되도록 요구할 때가 되었다고 믿었다.

  • 사진: 재키 로빈슨의 사진이 담긴 야구 카드 역사 속의 한 장면: 브루클린 다저스팀의 첫 시즌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후 재키 로빈슨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1951년 제작된 야구 카드에 등장했다.

- 적절성을 결정하기: 어떻게 로빈슨의 경력은 민권운동의 등장에 기여했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이주: 남북전쟁 이후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북부의 대도시로 이주했다. 191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뉴욕시의 흑인 인구는 6만 명에서 45만 명으로 급증했다. 다른 도시의 흑인 인구도 이와 비슷하게 증가했다. 흑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의사와 법률가들을 포함한 유력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인사들의 수도 증가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정치단체를 통해 연합했다. 그렇게 해서 사회적인 성취를 위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뉴딜 정책: 대공황기에 루즈벨트와 민주당은 흑인 유권자들에게 구애하여 뉴딜정책에 대한 아프리카계 흑인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연방정부를 위해 일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수는 상당히 증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아마도 미국에서 인종문제에 대한 분위기를 바꾸는데 가장 큰 자극이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일 것이다.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북부 도시에서는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서 북부의 흑인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다. 북부의 일부 도시들에서는 이렇게 인구가 증가한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투표권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부상: 이런 문화적 변화 속에서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ered People)는 전국에서 흑백분리법에 도전하기 위해 힘겨운 법정투쟁을 벌였다. 여러 해 동안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1896년의 필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뒤집기 위해 노력했다. 이 판결은 공공기관과 숙박시설에서 인종간의 분리는 시설들을 “분리하되 평등하면” 합헌적이라고 판시했다. 실제로는 흑인들을 위한 시설 자체가 별로 없었고 있다고 해도 동등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은 법률팀이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의 법정변호기금(Legal Defense Fund)을 이끈 사람은 1930년대에 이 조직에 가입한 써굿 마샬(Thurgood Marshall)이었다. “미스터 민권(Mr. Civil Right)”이라고 알려진 마샬은 법정에서 흑백분리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싸워 큰 승리를 얻었다. 그의 승리는 탁월한 법률팀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버지니아주 출신의 올리버 힐(Oliver Hill)은 교육과 임금의 차별문제에 대한 많은 민권운동 관련 소송에서 승소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힐의 법률팀은 임금의 향상과 흑인 학생들과 교사들을 위한 교육시설의 개선을 통해 5천만 달러 이상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마샬과 힐은 점차적으로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의 “분리하되 평등하면”이라는 조항을 무너뜨렸다. 마침내 1951년 그들은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싸움을 치르게 되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1951년 올리버 브라운(Oliver Brown)은 캔자스 주 토피카 시 교육위원회에 대해 그의 8살 된 딸 린다(Linda)가 백인들만을 받아들이는 가까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매일 린다는 가까이 있는 그 학교를 지나 걸어서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탔다. 상소를 거쳐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대법원에서 써굿 마샬은 브라운을 대리하여 미국 학교의 분리정책에 항의하는 변론을 펼쳤다.
1954년 5월 17일 브라운 대 캔자스 주 토피카시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대법원은 역사적인 판결을 선언했다.

  • 학습이해도 확인: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사진 써굿 마샬이 기자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역사 속의 한 장면: 써굿 마샬이 1955년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분리정책의 폐지를 명령한 후에 뉴욕시에서 기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마샬은 후에 첫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법관이 되었다.
- 정보를 분석하기: 어떻게 마샬의 노력이 민권운동에 도움이 되었고 어떻게 그가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을 위해 준비되도록 하였는가?

“공립학교에서 어린이들의 분리가 오로지 인종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소수인종에 속항 아이들의 평등한 교육기회를 빼앗은 것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다... 유사한 연령과 자질을 지닌 어린이들을 오로지 인종에 근거하여 분리하는 것은 공동체에서 그들의 지위에 대한 열등감을 낳아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공립 교육의 영역에서 “분리하되 평등하면” 이라는 원칙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 대법관 얼 워런(Earl Warren)
만장일치로 대법원은 “분리하되 평등하면”이라는 원칙은 위헌이며 공립 교육에 적용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음 해에 대법원은 지역 학교의 교육위원회들이 분리 정책을 폐지하기 위해 “신중한 속도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브라운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대한 반응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아프라카계 미국인들은 기뻐했다. 많은 백인 미국인들은 동의하지는 않았더라도 결정을 받아들였고 분리정책의 폐지가 평화롭게 이행되기를 희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브라운 사건의 판결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대법원이 선언했고 나는 이 나라의 헌법질서를 지키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노력할 것이다. 나는 결정에 따를 것이다”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결정에 따르고자 하지는 않았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은 많은 남부의 백인들, 특히 “최남부 지역(Deep South)” 백인들에게 두려움과 분노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조지아 주에서 주지사 헐먼 탤맷지(Herman Talmadge)는 그의 주 내에 있는 “공립학교와 기타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에서 인종이 섞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큐클럭스클랜(Ku Klux Klan)은 더 적극적이 되어서 브라운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위협했다. 최남부 주들의 하원의원들은 1956년 대법원의 공립학교의 분리정책 폐지 명령에 항의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 학습이해도 확인: 대법원은 “분리하되 평등하면” 조항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 지도: 통합교육이 시행된 남부 학교를 다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

1954년과 1964년에 통합교육이 시행되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의 수가 증가된 것을 보여주는 지도
지도읽기: 많은 주들이 브라운 판결 이후 공립학교에서 흑백통합교육을 실시하는데 지체했다.
- 장소: 어느 주가 통합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에 다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 수에서 가장 큰 증가를 보였는가?

하원의원 중 90명 이상이 “남부 선언(Suthern Manifesto)”이라고 알려진 성명서를 통해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참여한 하원의원들은 대법원이 권한의 경계를 넘었고 이런 조치를 취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701] 그들은 이 판결은 각 주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며 “사법적 권리침해(judicial usurpation)”의 사례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분리정책의 폐지가 여러 남부 주에서 폭력과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헌법에 반대되는 이 결정을 뒤집고 이 결정을 시행하기 위한 물리력의 사용을 막을 것임을 서약한다.” - 84차 의회 제2기 의회기록에서


몽고메리 시 버스 보이코트
1955년 전국적인 관심은 법정에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시의 거리로 옮겨졌다. 그해 12월에 재봉사였고 12년간 몽고메리 시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의 비서였던 로자 파크스(Rosa Parks)는 버스에 탑승해서 유색인종 좌석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 버스의 앞부분은 백인 승객들을 위해 지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백인들만을 위한 자리가 다 찼을 때는 그들의 좌석을 백인 승객들을 위해 포기해야 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한 백인 승객이 버스를 탔는데 자리가 없자 버스 기사는 파크스에게 그녀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거부했다. 체포될 거라고 협박을 받았지만 그녀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다음 정거장에서 경찰이 그녀를 체포해서 흑백분리법을 위반한 죄로 재판을 받도록 명령했다.
몽고메리 시의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즉시 모였고 여성정치위원회(Women’s Political Council)의 조 앤 로빈슨(Jo Ann Robinson)의 제안에 따라 몽고메리 시 버스 보이코트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 계획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버스 회사가 분리정책을 바꾸기로 동의할 때까지 전 버스 노선 이용을 거부하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로빈슨과 여성정치위원회의 다른 회원들은 보이코트 운동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해서 배부했다. 보이코트운동을 논의하는 첫 번째 회의가 열렸던 한 침례교회의 26세 목사인 마틴 루터 킹 2세(MArtin luther King, Jr)는 곧 이 저항운동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람들은 이제 분리와 모욕에 지쳐 버리고 억압의 잔인한 발길질에 지쳐버렸다. 우리는 저항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 마틴 루터 킹 2세
보이코트운동 첫날 킹은 몽고메리 시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는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참여할 것인지 알아보고자 애썼고 다음과 같이 그가 본 것을 기록했다.
“러시아워 시간에 보도는 근로자들과 가사노동자들로 가득 찼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은 사람들이었는데 일터를 향해,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왜 그들이 걷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바는 그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개인들이 결의에 찬 용기로 자유와 품위를 지키기 위해 고난과 희생을 감내하는 것보다 장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마틴 루터 킹 2세

  • 사진: 로자 파크스가 웃고 있는 모습

로자 파크스가 1955년 체포된 것은 성공적인 몽고메리시 버스 보이코트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사진에서 1년 후, 대법원이 버스좌석의 분리가 위헌이라고 선언한 후에 그녀가 웃고 있다.

그 다음해까지 몽고메리의 5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를 함께 이용하면서 시내버스를 타지 않았다. 경제적 손실을 입었지만 버스회사는 정책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702] 마침내 1956년 대법원은 버스에서의 분리는 학교의 분리와 마찬가지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 운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의 새 세대 지도자들을 고무시켰는데 그 중에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이 마틴 루터 킹 2세였다. 게다가 이 사건은 소수인종 집단들에게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평화적인 저항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리틀록에서의 저항
1957년 가을 아카소주 주지사 오벌 포버스(Orval Faubus)는 다른 인종을 함께 모이게 하는 통합정책을 강제로 집행하게 되면 자신은 질서를 유지를 보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법원의 브라운 사건 판결에 대한 노골적인 반항으로 포버스 주지사는 아칸소 주방위군을 아칸소주 리틀록에 소재한 센트럴 고등학교(Central High School)에 파견해서 그 해에 그 학교에 다니게 되어 있는 아홉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을 돌려보내도록 지시했다. 학교 밖에서는 성난 항의자들의 무리가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방해하기 위해 모였다. 이들 학생들 중 한 사람인 15세의 엘리자베스 에크포드(Elizabeth Eckford)는 그 날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아칸소 주방위군 군인들은] 나를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봤고 나는 너무 겁이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내가 돌아서자 군중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들은 점점 더 가까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죽여버려!, 죽여버려!’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군중들 중 어딘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찾아보았다. 나는 어느 나이든 여성의 얼굴을 보았는데 친절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을 때 그녀는 내게 침을 뱉었다.” - 엘리자베스 에크포드

  • 오늘날까지 이어보기

- 보이코트(Boycott)
보이코트는 1880년대 아일랜드에 살았던 찰스 보이코스(Charles Boycott)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새로운 토지 개혁법으로 토지임대료가 낮아지자 이 법을 따르기를 거부했다가 그의 소작농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고립되어 가난하게 살았다. 미국의 역사에서 보이코트는 1765년 인지조례(Stamp Act)에 대항하면서 처음 등장했고 오늘날에도 대기업의 횡포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사진: 등교하는 흑인학생들에게 백인학생들이 화를 내는 모습

역사속의 한 장면: 엘리자베스 에크포드(아래, 오른쪽)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은 법원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불만을 가진 백인 학생들의 모욕을 견뎌야 했다.
-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왜 결국 통합교육을 지지하게 되었는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민권운동의 편은 아니었지만 포버스의 행동은 헌법에 대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아이젠하워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주 방위군을 연방정부가 지휘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그는 군인들을 아칸소로 보내서 아홉 명의 학생들을 보호하도록 했다. [703] 1957년 9월 24일, 국민들을 향한 연설에서 아이젠하워는 그의 조치는 대법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저항의 목소리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만이 평등권을 요구한 유일한 소수자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다. 1929년에 설립된 중남미계시민총연맹(League of United Latin American Citizens, LULAC)도 히스패닉의 평등권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다. 텍사스 주의 한 장례식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펠릭스 롱고리아의 장례를 거부하자 중남미계시민총연맹이 항의했다. 롱고리아는 결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다른 단체들, 예를 들어 지역사회봉사기구(Community Service Organization)와 전국멕시코계미국인연합(Asociación Nacional México-Americana)도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남부 주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어린이들처럼 멕시코계 미국인 어린이들도 더 열악한 시설을 가진 분리된 공립학교를 다녔다.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의 곤잘로 멘데스와 펠리치타스 멘데스(Gonzalo and Felicitas Méndez)는 이 차별에 대해 지역 교육청을 제소했다. 1947년 연방 지방법원 판사는 멕시코계 미국인 학생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후 곧이어 변호사 구스 가르시아(Gus Garcia)는 텍사스 주에서 유사한 소송을 제기했다. 델가도 대 배스트롭 교육청(Delgado v. Bastrop ISD)사건에서 텍사스주 의 멕시코계 미국인 어린이들에 대한 분리도 불법이라고 판결되었다. 중남미계시민총연맹은 이 두 사건 모두에 관여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독특한 상황에 직면했다. 연방정부는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보호구역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끔찍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 정부는 “폐지(termination)”라고 알려진 새로운 정책을 채택해서 보호구역을 모두 제거하고자 하였다. 정부의 목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미국 사회의 주류로 동화시키려는 것이었다.
폐지정책은 저항에 부딪혔고 점차 연방정부는 이 정책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바로 가난, 차별, 그리고 진정한 정치적 대표의 부족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1950년대 민권운동의 진전은 그들에게 필요한 진정한 성취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단순한 징표에 불과했다.

  • 심화학습: 시민

- [사진] 헥터 가르시아 박사 / 헥터 가르시아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야전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종전 후인 1948년 라틴계 참전용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G.I. 포럼(American G.I. Forum)을 설립해서 라틴계 참전용사들이 전장에서 돌아온 차별을 극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했다.


1과 평가
1. 대법원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 뒤에 있는 원리는 무엇인가?
2. 남부헌장의 목적은 무엇인가?
3.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칸소 주 리틀록의 통합교육에 대한 사건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4. 멕시코계 미국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950년대에 그들의 권리를 어떻게 주장했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비교하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는 분리정책에 대한 효과적인 비폭력저항으로 입증되었다. 미국의 역사에서 효과적인 보이코트의 다른 사례들을 찾을 수 있는가?
6. 뉴스 기사를 쓰기: 아홉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이 통합교육을 받는 날 아칸소 주 리틀록의 센트럴 고등학교에 주재하는 기자의 입장에서 현장을 묘사하는 기사문을 작성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