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제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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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2일 (일) 22:51 기준 최신판


독재자들의 등장

1930년대 유럽에서는 열악한 상황에서 독재자들이 등장하였고 국제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두려움이 독재자들의 등장을 부추겼다.

독재정부는 무서운 존재였을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걱정거리들을 해결해주었다.

1)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의 서부 국경을 결정한 것에 불과했다. 동부 국경은 독일이 국경 확장을 원할 경우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2) 대공황은 여전히 대부분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실업과 빈곤의 확산을 가져왔다.

3) 민주주의는 당시 상황들이 열악해지는 것을 막거나 개선할 능력이 없어 보였고, 종종 이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

4) 공산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위협적 존재로 보였다. 이에 유럽인들은 위협적인 세계 노동계급 혁명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강한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5) 고립주의가 계속되어 미국은 여전히 세계문제에 관여하지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는 다수의 해외 독재자들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6) 프랑스는 여전히 독일을 의심하면서 마지노선을 따라 철통 방어시설을 건설했다. 많은 독일인들은 이러한 프랑스의 위협에 맞설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7) 군비축소는 실패했다. 대부분 국가들은 1932년 독일과 같은 수준으로 군비 축소할 것을 거부했다.

독재국가들이 유럽 전역에 걸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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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재자들의 등장  (시계 방향으로)

    - 1933년 히틀러의 총통 당선
    - 동유럽 지역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신생국들 거의 대부분이 독재정부에게 넘어갔다. 
    - 1924년부터 스탈린 일당독재 시작
    - 1930년대부터 일본군 일본정부 점령
    - 1936년부터 메타크사스 통치
    - 1922년부터 무솔리니 집권
    - 내전 이후 1939년 프랑코 장군 집권
    - 1932년부터 살라잘 통치


독재정권 – 그냥 거부하기 힘든 존재...
이것은 반드시 기억해야 하자.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독일의 분노로 인한 전쟁 위협과 경제위기 때문에 유럽은 긴장 상태에 있었다. 
권력 공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독재자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외교정책

히틀러는 대공황과 유럽의 국가 간 갈등의 시기에 권력을 거머쥐었고, 그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은 사태를 더욱 더 악화시켰다.

유럽의 분위기는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1) 국제연맹의 군축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2)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붕괴되었다. 유럽의 일부 공격적인 지도자들은 새로운 점령지를 차지하고자 했고 국제연맹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3) 이탈리아와 일본 양국은 다른 나라 지역을 침공하였으나, 국제연맹은 이를 막기 위해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4) 독일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조약에 대해 여전히 억울해 하고 있었다.

5)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불신을 멈추지 않았다.

6) 영국은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독일의 불만은 결국 히틀러의 집권을 가져왔다.

1) 대공황 시기 동안 과격파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빈곤과 실업이 만연했으며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다.

2) 1933년 나치당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했다.

3) 히틀러 외교 정책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그는 베르사이유 조약이 번복되기를 원했다. 이 조약은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한 불공평한 것으로 보며 증오했다.

     2 그는 재무장을 원했다.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인해 군사력을 축소해야만 했다.  
       히틀러는 독일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기를 원했다.

     3 그는 모든 독일어 사용 민족들을 독일 제국으로 복속시키기를 원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합병과 독일 소수민족이 있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히틀러의 계획은 ‘위대한 독일’을 의미하는 그로스도이칠란트 (Grossdeutschland)로 불렸다.

     4 그는 슬라브족 등과 같은 소위 열등민족으로 보았던 민족들의 영토를 차지하여 독일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이것은 독일인들에게 ‘생활공간’이라는 의미의 레벤스라움 (Lebensraum)을 확장시켜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영토 확장을 준비했다.

1) 1933년 히틀러는 국제연맹의 군비축소 회의에 불참했고, 이후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2) 1934년 히틀러는 폴란드와 10년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프랑스와 폴란드의 동맹관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 1935년 3월, 그는 독일에 징병제를 도입하여 베르사이유 조약의 조항을 위반하였다.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는 이를 비판했다.

4) 1935년 6월, 히틀러는 영국과 해군 협정을 맺었다. 이로 인해 독일은 영국 해군력의 35% 수준까지 그리고 영국 잠수함의 45% 수준까지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협정은 독일로 하여금 재무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하면서, 사실상 베르사이유 조약에 위배되었다.

히틀러는 야망을 멈추지 않았다...
히틀러는 야심가이며 무자비한 지도자였다. 그는 독일이 유럽을 점령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이를 위해 베르사이유 조약을 기꺼이 위반했다.


독일 라인란트과 오스트리아

히틀러의 외교 정책은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히틀러의 첫 번째 영토 편입 성공 지역은 자르였다.

1) 자르지역은 프랑스 국경에 인접한 독일의 산업 지역이었다.

2)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자르는 1920년부터 15년간 국제연맹이 통치했다. 이 지역의 지위는 1935년에 주민투표로 결정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3) 1935년 1월 국민투표에서, 선거인의 90%가 독일과의 재통합을 선택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3월 자르는 독일에 재통합되었다.

1936년 3월,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견했다.

1) 라인란트는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무장해제 되었다. 독일은 1925년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이에 동의했다.

2) 그러나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공 문제로 정신이 없었고, 히틀러는 라인란트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3) 러시아와 프랑스는 최근 독일의 공격을 반대하는 조약에 체결했다. 히틀러는 이것은 독일을 위협하는 것이며 독일 국경에 독일 군대 주둔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히틀러는 영국은 이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프랑스의 반응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5) 독일군은 프랑스군이 접근할 경우 즉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선거 캠페인이 한창이어서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제연맹과 영국은 분노했지만 정작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일부 조항을 어기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후 히틀러의 관심이 오스트리아로 옮겨졌다.

1) 히틀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같은 문화권에 속한다고 믿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합병 (Anschuluss)”, 즉 통합을 원했다.

2) 1934년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의 쿠데타가 실패하였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군대를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이동시키면서 히틀러를 불안하게 했다.

3) 그러나 1936년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

4)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나치로 하여금 데모와 시위를 벌이도록 부추겼다. 1938년 2월 그는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던 자이스-잉크바르트 (Seyss-Inquart)를 내무장관으로 내정할 것을 요구했다.

5) 대신, 오스트리아 총리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가 독립을 유지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를 통해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6) 히틀러는 만약 슈슈니크가 퇴임하지 않으면 오스트리아를 침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슈슈니크는 오스트리아를 너무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내각은 사퇴하였다. 물론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예외였다. 그는 “질서회복”이라는 명목으로 독일군을 오스트리아로 불러들였다.

1938년 3월 15일, 히틀러는 비엔나로 입성하여 대독일제국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합병되었다. 


1930년대 말 – 먹구름이 모여 들다...
히틀러는 순식간에 정권을 잡았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굴욕 이후 독일의 상황은 개선되고 있었다. 
히틀러가 교묘한 방법으로 라인란트에 부대를 파병한 이유를 나열하여 적어보시오.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1938 (1)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가 자신들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1938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압력을 가했다.

1)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은 베르사이유 조약을 통해 결정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에 위치한 주데텐란트 지역에는 약 3백만 명의 독일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2)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소련은 히틀러가 침공할 경우 체코를 지원하는 데 동의했다.

3) 히틀러는 영국 네빌 체임벌린 수상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4) 그러나 곧 히틀러는 체코 정부가 주데텐란트 지방에서 독일인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는 주데텐란트 지역의 독일 병합을 요구하면서 주데텐란트에서 시위대를 조직했다.

5) 1938년 5월, 히틀러는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위협했다. 체코 지도자 베네스는 전쟁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었다.

6) 그러나 체임벌린 영국 수상과 달라디에 프랑스 수상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양보하라고 체코를 압박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협상을 벌였다.

1) 1938년 9월, 체임벌린은 독일을 두 차례 방문하여 히틀러를 만나 협상했다.

2) 그러나 히틀러는 그의 요구 사항을 변경했고, 주데텐란트 거주 독일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날짜를 10월1일로 정했다. 체임벌린은 이를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영국 해군은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다.

3) 이후 9월29일, 히틀러는 체임벌린과 달라디에 그리고 무솔리니를 뮌헨에 초대해 회의를 열었다. 무솔리니는 한 계획안을 내놓았다. (사실 이것은 독일 외무부에 의해 씌여졌다.)

4) 회담 후, 네 명의 지도자들은 뮌헨협정을 체결하였다. 이것은 독일에게 쥬데텐란트를 넘기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요구에 응했는데, 이는 히틀러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뮌헨협정은 유화정책으로써,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와 같은 공격적인 나라들에게 이들이 원하는 것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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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책 – “우리 시대의 평화”...
당연히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를 경계했지만,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길 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체코를 자국의 영토를 잃었다.
유화정책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체코 침략 사건을 나열하여 적어보시오.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1938 (2)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지만, 뮌헨협정 이후 한 여론조사에서 영국인의 90% 이상이 히틀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모두가 뮌헨협정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다.

   1) 마치 체임벌린이 전쟁을 막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뮌헨협정은 “우리시대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영웅대접을 받으며 영국으로 돌아왔다. 
   2)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은 뮌헨 회의에 초대받지 못했고, 체코조차도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상의하지 못했다.
   3) 그리고 소련은 히틀러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던 중 이 협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많은 국가들이 유화정책을 지지했다.

지금에서 보면 유화정책은 터무니없는 발상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지했다.

   1) 영국에서는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았고, 일부 국민들은 베르사이유 조약이 독일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히틀러가 독일을 재정비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느꼈다.
   2) 영국의 많은 정치인들은 히틀러보다 공산주의와 소련을 훨씬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독일이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완충국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3) 영국의 경제와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체임벌린이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 히틀러의 요구에
      동의했다고도 한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했다.

  1) 쥬데텐란트 지역을 빼앗긴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서서히 무정부상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슬로바키아는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2) 히틀러는 체코 대통령을 설득하여 “질서회복”을 위해 독일 병력 투입을 허락받았다.
  3) 1939년 5월, 독일은 이탈리아와 “강철조약”을 맺었다. 두 나라는 전쟁 발발 시 서로 돕기로 약속했다. 
  4)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유화정책이 실패했던 것은 분명했다. 
     히틀러는 그의 약속을 어겼고, 비독일 지역을 점령했다. 
  5)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면서, 영국은 유화정책을 포기했고 폴란드와 협정을 맺어 
     독일이 침공하면 폴란드를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엔 유화정책은 좋은 발상이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비록 뮌헨협정이 단지 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중대한 문제를 안겨주었고 
소련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당시 히틀러가 약속을 어긴 이후에는 갈등을 막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폴란드 그리고 전쟁의 발발

유럽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각 국마다 분노로 가득하고 서로 의심하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는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이 히틀러와 조약을 맺었다.

1) 소련 (소비에트 연방)은 1934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1935년 히틀러에 반대하며 프랑스와의 조약에 조인했다. 
   소비에트의 지도자 스탈린은 나치당을 의심스러워했다. 
2) 그러나 소련은 프랑스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초기에 왜 아무도 히틀러에서 대항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뮌헨협정 이후, 스탈린은 소련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과의 협상을 결심했다.
3) 1939년 8월 독일-소련 상호 불가침조약에 조인하면서, 소련과 독일은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또한 비밀리에 폴란드를 분할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4) 양국은 만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 소련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그리고 폴란드 동쪽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절대로 소련이 이 지역을 계속 차지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다. 
       1939년 9월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것은 너무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에게 즉각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고, 
       영국은 1939년 9월 3일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이르는 길

다음은 이 주제를 검토하는 데 고려해야 할 세 가지 주요 항목들이다.

1) 1936년부터 1939년에 전쟁이 발생하는 단계까지 반드시 학습하라. 
   사건의 결과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이름과 철자를 연습해 두는 것이 좋다. 
   2) 아무도 히틀러를 곧바로 막지 못했던 이유들을 분명하게 기억하라. 
      예, 국제연맹의 약화, 유화정책과 소련의 비밀책략 등.
      3) 1920년대에서 30년대까지 긴장을 가져온 장기적 요인을 기억하라. 
         베르사이유 조약과 국제연맹, 그리고 대공황 기간 동안 발생했던 세계경제 문제가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2장3장 복습할 것.)


20년 후 – 유럽은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이것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단기적 원인뿐만 아니라 장기적 요인이 있다. 독일-소련 상호 불가침조약을 요약하여 정리하라. 
그리고 라인지역, 오스트리아, 쥬데텐란트,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에서의 히틀러의 행보에 대해 반드시 기억하자.

요점정리

이제, 4장의 내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질문에 답해보자. 이 장은 매우 복잡한 상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대공황 시기 동안 갑작스럽게 모든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장.단기간에 걸쳐 있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 문제들을 풀면서 복습해보자. 문제 답안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1) 1930년대 유럽에서 몇 명의 독재자들이 권력을 잡게 된 이유를 아는 대로 나열하라.
2) 이탈리아를 통치했던 독재자의 이름은?
3) 1930년대 아돌프 히틀러의 외교정책 목표 네 가지는?
4) 히틀러가 베르사이유 조약을 싫어했던 이유는?
5) 1933년 히틀러가 탈퇴했던 회의는?
6) 히틀러가 독일에 징병제를 도입했던 때는?
7) 1935년 자르에서 있었던 국민투표의 결과는?
8) 독일은 1936년에 어디로 군대를 파병했는가? 왜 아무도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이유를 설명하라.
9)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병을 가리키는 이름은? 히틀러는 어떻게 이를 달성했는가?
10) 1938년 히틀러가 원했던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의 이름은?
11) 1938년 뮌헨협정에서 이루어졌던 합의 사항은?
12) 유화정책은 무엇인가? 당시 영국에서 이 정책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 세 가지는?
13) 강철조약은 무엇인가?
14) 1939년 소련이 독일과 협정을 맺게 된 이유는?
15)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후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16) 제2차 세계대전 발생을 가져온 네 개의 원인을 설명하시오.


연습문제

자료 A를 연구하여 아래 질문에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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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A:

1938년 10월1일 발행된 독일의 우편엽서. 쥬데텐란트를 점령한 나치독일 총통에게 감사하는 내용.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1 (a) 1938년 9월에 열린 뮌헨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쥬데텐란트 지역을 
      차지하는 것에 동의했다. 
      유화정책의 주요 내용을 서술하라.  (4 점)

  (b) 자료 A는 히틀러의 쥬데텐란트 침공은 독일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히틀러의 독일영토 확장 정책이 많은 지지를 받았다는 것에 동의하는가?
      이 자료의 내용과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이 사진의 목적을 언급하여 답을 서술하시오.  (6 점)

  (c) 다음중 제2차 세계대전 발생 원인으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 체임벌린의 유화정책
	   - 1939년 독일-소련 상호 불가침조약
      답안 작성 시 위의 두 가지 이유 모두를 언급해야 한다.   (10 점)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2 (a) 자료 A는 1930년대 히틀러 외교정책의 인기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4 점)

  (b) 1933년 이후 히틀러가 베르사이유 조약에 도전했던 이유를 설명하시오.  (6 점)

  (c) “유화정책은 실수였다.”
      이 말에 얼마나 동의하는가? 의견을 서술하시오.   (10 점)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3  이 질문은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을 발생시킨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a) 독일이 1933년에서 1938년까지 베르사이유 조약에 도전했던 두 가지 방법을 서술하시오. (4 점)

 (b) 영국과 프랑스가 1936년에서 1938년까지 독일을 어떻게 유화했는지 간단히 설명하시오.  (6 점) 

 (c) 1939년 9월에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설명하시오.   (10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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