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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묵담성우(黙潭聲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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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Biguni: &lt;/p&gt;
&lt;hr /&gt;
&lt;div&gt;* ''' 법호·법명 : 묵담성우(黙潭聲祐, 1896~1981) ''' (한국불교태고종)&lt;br /&gt;
* ''' 생애·업적 '''&lt;br /&gt;
담양 용화사를 상주도량과 교화도량의 근본장소로 삼고 창건한 묵담 대종사는 1896년 3월 8일 담양 수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默潭)이다. &amp;lt;/br&amp;gt;&lt;br /&gt;
속세의 성은 담양 국씨로 명문세족이었던 父 순국씨와 母 오씨 극락화의 맏아들이다.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선사를 은사로, 내장사 종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했다. 1914년 내장사 금강계단에서 금해 율사에게 비구 구족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했다. 백양사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미과·사교과를 졸업했으며, 정읍 내장사, 곡성 관음사, 부안 내소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lt;br /&gt;
1918년 백양사 법계고시에서 대선법계를, 1931년 종사법계를, 1932년 대종사법계를 수하고 백양사 청류암 관음선원, 양주 망월사, 담양 우송선원 등 70여 안거를 성만(盛滿)했다. &amp;lt;/br&amp;gt;&lt;br /&gt;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오도송(悟道頌)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靑天霹靂鳴 天地波濤起 我卽常安閑 聊與山花笑).”였다. &amp;lt;/br&amp;gt;&lt;br /&gt;
이로서 묵담 큰스님은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유의 마음을 얻었다.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여여부동은 금강경의 언어다.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 여여부동이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5·6·7대)&amp;lt;ref&amp;gt;이 당시 조계종은 불교정화운동(1957~1962)으로 비구대처 간 갈등상황이었으며, 이후 1962년에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과 함께 효봉학눌스님이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이에 반대되는 주로 대처승 측에서는 한국불교태고종을 출범하게 됨&amp;lt;/ref&amp;gt;, 1975년 태고종정(3·4대)을 역임했으며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0년 담양 용화사 본찰에서 열반계(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어찌 생사윤회상에 걸림이 있으리요.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越彼法界獨尊性 豈拘生死輪回相 若人問我來去處 雲在靑天水在甁)를 송(頌)하시고 이듬해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amp;lt;/br&amp;gt;&lt;br /&gt;
태고종단 장(葬)으로 용화사에서 다비, 9과의 사리가 나와 용화사를 비롯 장성 백양사와 전주 관음선원, 부산 금수사, 안양 연화사, 제주 성광사, 선광사, 금붕사, 성림사에 각각 한 개씩을 나눠 봉안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저서로는 ‘묵담대종사문집’과 ‘집착하지 말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현대고승법어집)’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일찍이 11세에 동진 출가하시어 선교율(禪敎律)에 능통하셨던 묵담 큰스님, 특히 해동칠불(海東七佛) 제9대 율사로서 한국불교 계율 수행사에 우뚝하신 스님은 팔십 평생 동안 제자를 기르고, 부처님 법을 전하며, 가람을 중수하고, 보시행으로 일관했다. &amp;lt;/br&amp;gt;&lt;br /&gt;
그 수행력과 덕망에 힘입어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두루 지내셨는데, 청정율사가 대처승단이라 할 수 있는 태고종의 종정을 지낸 이력이 이채롭다. &amp;lt;/br&amp;gt;&lt;br /&gt;
“승단의 기본은 화합에 있다”, “행하기 힘든 것을 행하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출가 승려의 정신”이라며 대중 불교 구현에 전력하신 스님은 불교 정화 때 처음에는 조계종단을 지지했다가 종조(宗祖) 문제로 만암 스님처럼 환부역조(換父易祖)할 수 없다는 생각과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확고해 태고종단에 남으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 [http://m.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814 담양인신문(2016.10.10  13:18:28)] 우리고장 名僧을 찾아서/③묵담 대종사(默潭 大宗師) &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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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묵담성우(黙潭聲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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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 ''' 법호·법명 : 묵담성우(黙潭聲祐, 1896~1981) ''' (한국불교태고종)&lt;br /&gt;
* ''' 생애·업적 '''&lt;br /&gt;
담양 용화사를 상주도량과 교화도량의 근본장소로 삼고 창건한 묵담 대종사는 1896년 3월 8일 담양 수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默潭)이다. &amp;lt;/br&amp;gt;&lt;br /&gt;
속세의 성은 담양 국씨로 명문세족이었던 父 순국씨와 母 오씨 극락화의 맏아들이다.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선사를 은사로, 내장사 종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했다. 1914년 내장사 금강계단에서 금해 율사에게 비구 구족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했다. 백양사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미과·사교과를 졸업했으며, 정읍 내장사, 곡성 관음사, 부안 내소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lt;br /&gt;
1918년 백양사 법계고시에서 대선법계를, 1931년 종사법계를, 1932년 대종사법계를 수하고 백양사 청류암 관음선원, 양주 망월사, 담양 우송선원 등 70여 안거를 성만(盛滿)했다. &amp;lt;/br&amp;gt;&lt;br /&gt;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오도송(悟道頌)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靑天霹靂鳴 天地波濤起 我卽常安閑 聊與山花笑).”였다. &amp;lt;/br&amp;gt;&lt;br /&gt;
이로서 묵담 큰스님은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유의 마음을 얻었다.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여여부동은 금강경의 언어다.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 여여부동이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5·6·7대)&amp;lt;ref&amp;gt;이 당시 조계종은 불교정화운동(1957~1962)으로 비구대처 간 갈등상황이었으며, 이후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과 함께 효봉학눌스님이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이에 반대되는 측에서는 한국불교태고종이 됨&amp;lt;/ref&amp;gt;, 1975년 태고종정(3·4대)을 역임했으며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0년 담양 용화사 본찰에서 열반계(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어찌 생사윤회상에 걸림이 있으리요.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越彼法界獨尊性 豈拘生死輪回相 若人問我來去處 雲在靑天水在甁)를 송(頌)하시고 이듬해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amp;lt;/br&amp;gt;&lt;br /&gt;
태고종단 장(葬)으로 용화사에서 다비, 9과의 사리가 나와 용화사를 비롯 장성 백양사와 전주 관음선원, 부산 금수사, 안양 연화사, 제주 성광사, 선광사, 금붕사, 성림사에 각각 한 개씩을 나눠 봉안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저서로는 ‘묵담대종사문집’과 ‘집착하지 말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현대고승법어집)’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일찍이 11세에 동진 출가하시어 선교율(禪敎律)에 능통하셨던 묵담 큰스님, 특히 해동칠불(海東七佛) 제9대 율사로서 한국불교 계율 수행사에 우뚝하신 스님은 팔십 평생 동안 제자를 기르고, 부처님 법을 전하며, 가람을 중수하고, 보시행으로 일관했다. &amp;lt;/br&amp;gt;&lt;br /&gt;
그 수행력과 덕망에 힘입어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두루 지내셨는데, 청정율사가 대처승단이라 할 수 있는 태고종의 종정을 지낸 이력이 이채롭다. &amp;lt;/br&amp;gt;&lt;br /&gt;
“승단의 기본은 화합에 있다”, “행하기 힘든 것을 행하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출가 승려의 정신”이라며 대중 불교 구현에 전력하신 스님은 불교 정화 때 처음에는 조계종단을 지지했다가 종조(宗祖) 문제로 만암 스님처럼 환부역조(換父易祖)할 수 없다는 생각과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확고해 태고종단에 남으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 [http://m.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814 담양인신문(2016.10.10  13:18:28)] 우리고장 名僧을 찾아서/③묵담 대종사(默潭 大宗師) &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스님]]&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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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Biguni: &lt;/p&gt;
&lt;hr /&gt;
&lt;div&gt;* ''' 법호·법명 : 묵담성우(黙潭聲祐, 1896~1981) ''' (한국불교태고종)&lt;br /&gt;
* ''' 생애·업적 '''&lt;br /&gt;
담양 용화사를 상주도량과 교화도량의 근본장소로 삼고 창건한 묵담 대종사는 1896년 3월 8일 담양 수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默潭)이다. &amp;lt;/br&amp;gt;&lt;br /&gt;
속세의 성은 담양 국씨로 명문세족이었던 父 순국씨와 母 오씨 극락화의 맏아들이다.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선사를 은사로, 내장사 종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했다. 1914년 내장사 금강계단에서 금해 율사에게 비구 구족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했다. 백양사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미과·사교과를 졸업했으며, 정읍 내장사, 곡성 관음사, 부안 내소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lt;br /&gt;
1918년 백양사 법계고시에서 대선법계를, 1931년 종사법계를, 1932년 대종사법계를 수하고 백양사 청류암 관음선원, 양주 망월사, 담양 우송선원 등 70여 안거를 성만(盛滿)했다. &amp;lt;/br&amp;gt;&lt;br /&gt;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오도송(悟道頌)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靑天霹靂鳴 天地波濤起 我卽常安閑 聊與山花笑).”였다. &amp;lt;/br&amp;gt;&lt;br /&gt;
이로서 묵담 큰스님은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유의 마음을 얻었다.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여여부동은 금강경의 언어다.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 여여부동이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5·6·7대)&amp;lt;ref&amp;gt;이 당시 조계종은 불교정화운동으로 비구대처 간 갈등상황이었으며, 묵담성우스님은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었음&amp;lt;/ref&amp;gt;, 1975년 태고종정(3·4대)을 역임했으며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0년 담양 용화사 본찰에서 열반계(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어찌 생사윤회상에 걸림이 있으리요.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越彼法界獨尊性 豈拘生死輪回相 若人問我來去處 雲在靑天水在甁)를 송(頌)하시고 이듬해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amp;lt;/br&amp;gt;&lt;br /&gt;
태고종단 장(葬)으로 용화사에서 다비, 9과의 사리가 나와 용화사를 비롯 장성 백양사와 전주 관음선원, 부산 금수사, 안양 연화사, 제주 성광사, 선광사, 금붕사, 성림사에 각각 한 개씩을 나눠 봉안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저서로는 ‘묵담대종사문집’과 ‘집착하지 말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현대고승법어집)’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일찍이 11세에 동진 출가하시어 선교율(禪敎律)에 능통하셨던 묵담 큰스님, 특히 해동칠불(海東七佛) 제9대 율사로서 한국불교 계율 수행사에 우뚝하신 스님은 팔십 평생 동안 제자를 기르고, 부처님 법을 전하며, 가람을 중수하고, 보시행으로 일관했다. &amp;lt;/br&amp;gt;&lt;br /&gt;
그 수행력과 덕망에 힘입어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두루 지내셨는데, 청정율사가 대처승단이라 할 수 있는 태고종의 종정을 지낸 이력이 이채롭다. &amp;lt;/br&amp;gt;&lt;br /&gt;
“승단의 기본은 화합에 있다”, “행하기 힘든 것을 행하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출가 승려의 정신”이라며 대중 불교 구현에 전력하신 스님은 불교 정화 때 처음에는 조계종단을 지지했다가 종조(宗祖) 문제로 만암 스님처럼 환부역조(換父易祖)할 수 없다는 생각과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확고해 태고종단에 남으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 [http://m.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814 담양인신문(2016.10.10  13:18:28)] 우리고장 名僧을 찾아서/③묵담 대종사(默潭 大宗師) &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스님]]&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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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 ''' 법호·법명 : 묵담성우(黙潭聲祐, 1896~1981) ''' (한국불교태고종)&lt;br /&gt;
* ''' 생애·업적 '''&lt;br /&gt;
담양 용화사를 상주도량과 교화도량의 근본장소로 삼고 창건한 묵담 대종사는 1896년 3월 8일 담양 수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默潭)이다. &amp;lt;/br&amp;gt;&lt;br /&gt;
속세의 성은 담양 국씨로 명문세족이었던 父 순국씨와 母 오씨 극락화의 맏아들이다.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선사를 은사로, 내장사 종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했다. 1914년 내장사 금강계단에서 금해 율사에게 비구 구족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했다. 백양사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미과·사교과를 졸업했으며, 정읍 내장사, 곡성 관음사, 부안 내소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lt;br /&gt;
1918년 백양사 법계고시에서 대선법계를, 1931년 종사법계를, 1932년 대종사법계를 수하고 백양사 청류암 관음선원, 양주 망월사, 담양 우송선원 등 70여 안거를 성만(盛滿)했다. &amp;lt;/br&amp;gt;&lt;br /&gt;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오도송(悟道頌)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靑天霹靂鳴 天地波濤起 我卽常安閑 聊與山花笑).”였다. &amp;lt;/br&amp;gt;&lt;br /&gt;
이로서 묵담 큰스님은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유의 마음을 얻었다.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여여부동은 금강경의 언어다.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 여여부동이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5·6·7대)&amp;lt;ref&amp;gt;이 당시 조계종은 불교정화운동으로 비구대처 간 갈등상황이었으며, 묵담성우스님은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었음&amp;lt;/ref&amp;gt;, 1975년 태고종정(3·4대)을 역임했으며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0년 담양 용화사 본찰에서 열반계(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어찌 생사윤회상에 걸림이 있으리요.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越彼法界獨尊性 豈拘生死輪回相 若人問我來去處 雲在靑天水在甁)를 송(頌)하시고 이듬해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amp;lt;/br&amp;gt;&lt;br /&gt;
태고종단 장(葬)으로 용화사에서 다비, 9과의 사리가 나와 용화사를 비롯 장성 백양사와 전주 관음선원, 부산 금수사, 안양 연화사, 제주 성광사, 선광사, 금붕사, 성림사에 각각 한 개씩을 나눠 봉안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저서로는 ‘묵담대종사문집’과 ‘집착하지 말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현대고승법어집)’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일찍이 11세에 동진 출가하시어 선교율(禪敎律)에 능통하셨던 묵담 큰스님, 특히 해동칠불(海東七佛) 제9대 율사로서 한국불교 계율 수행사에 우뚝하신 스님은 팔십 평생 동안 제자를 기르고, 부처님 법을 전하며, 가람을 중수하고, 보시행으로 일관했다. &amp;lt;/br&amp;gt;&lt;br /&gt;
그 수행력과 덕망에 힘입어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두루 지내셨는데, 청정율사가 대처승단이라 할 수 있는 태고종의 종정을 지낸 이력이 이채롭다. &amp;lt;/br&amp;gt;&lt;br /&gt;
“승단의 기본은 화합에 있다”, “행하기 힘든 것을 행하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출가 승려의 정신”이라며 대중 불교 구현에 전력하신 스님은 불교 정화 때 처음에는 조계종단을 지지했다가 종조(宗祖) 문제로 만암 스님처럼 환부역조(換父易祖)할 수 없다는 생각과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확고해 태고종단에 남으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 [http://m.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814 담양인신문(2016.10.10  13:18:28)] 우리고장 名僧을 찾아서/③묵담 대종사(默潭 大宗師)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C%B5%EB%8B%B4%EC%84%B1%EC%9A%B0(%E9%BB%99%E6%BD%AD%E8%81%B2%E7%A5%90)&amp;diff=41056</id>
		<title>묵담성우(黙潭聲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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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7T22:14: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lt;/p&gt;
&lt;hr /&gt;
&lt;div&gt;* ''' 법호·법명 : 묵담성우(黙潭聲祐, 1896~1981) ''' (한국불교태고종)&lt;br /&gt;
* ''' 생애·업적 '''&lt;br /&gt;
담양 용화사를 상주도량과 교화도량의 근본장소로 삼고 창건한 묵담 대종사는 1896년 3월 8일 담양 수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默潭)이다. &amp;lt;/br&amp;gt;&lt;br /&gt;
속세의 성은 담양 국씨로 명문세족이었던 父 순국씨와 母 오씨 극락화의 맏아들이다.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선사를 은사로, 내장사 종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했다. 1914년 내장사 금강계단에서 금해 율사에게 비구 구족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했다. 백양사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미과·사교과를 졸업했으며, 정읍 내장사, 곡성 관음사, 부안 내소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lt;br /&gt;
1918년 백양사 법계고시에서 대선법계를, 1931년 종사법계를, 1932년 대종사법계를 수하고 백양사 청류암 관음선원, 양주 망월사, 담양 우송선원 등 70여 안거를 성만(盛滿)했다. &amp;lt;/br&amp;gt;&lt;br /&gt;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오도송(悟道頌)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靑天霹靂鳴 天地波濤起 我卽常安閑 聊與山花笑).”였다. &amp;lt;/br&amp;gt;&lt;br /&gt;
이로서 묵담 큰스님은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유의 마음을 얻었다.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여여부동은 금강경의 언어다.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 여여부동이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5·6·7대)&amp;lt;ref&amp;gt;이 당시 조계종은 불교정화운동으로 비구대처 간 갈등상황이었으며, 묵담성우스님은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었음&amp;lt;/ref&amp;gt;, 1975년 태고종정(3·4대)을 역임했으며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0년 담양 용화사 본찰에서 열반계(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어찌 생사윤회상에 걸림이 있으리요.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越彼法界獨尊性 豈拘生死輪回相 若人問我來去處 雲在靑天水在甁)를 송(頌)하시고 이듬해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amp;lt;/br&amp;gt;&lt;br /&gt;
태고종단 장(葬)으로 용화사에서 다비, 9과의 사리가 나와 용화사를 비롯 장성 백양사와 전주 관음선원, 부산 금수사, 안양 연화사, 제주 성광사, 선광사, 금붕사, 성림사에 각각 한 개씩을 나눠 봉안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저서로는 ‘묵담대종사문집’과 ‘집착하지 말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현대고승법어집)’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일찍이 11세에 동진 출가하시어 선교율(禪敎律)에 능통하셨던 묵담 큰스님, 특히 해동칠불(海東七佛) 제9대 율사로서 한국불교 계율 수행사에 우뚝하신 스님은 팔십 평생 동안 제자를 기르고, 부처님 법을 전하며, 가람을 중수하고, 보시행으로 일관했다. &amp;lt;/br&amp;gt;&lt;br /&gt;
그 수행력과 덕망에 힘입어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두루 지내셨는데, 청정율사가 대처승단이라 할 수 있는 태고종의 종정을 지낸 이력이 이채롭다. &amp;lt;/br&amp;gt;&lt;br /&gt;
“승단의 기본은 화합에 있다”, “행하기 힘든 것을 행하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출가 승려의 정신”이라며 대중 불교 구현에 전력하신 스님은 불교 정화 때 처음에는 조계종단을 지지했다가 종조(宗祖) 문제로 만암 스님처럼 환부역조(換父易祖)할 수 없다는 생각과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확고해 태고종단에 남으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 [http://m.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814 담양인신문(2016.10.10  13:18:28)] 우리고장 名僧을 찾아서/③묵담 대종사(默潭 大宗師)&lt;br /&gt;
*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 : 비구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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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묵담성우(黙潭聲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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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7T22:12: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lt;/p&gt;
&lt;hr /&gt;
&lt;div&gt;* ''' 법호·법명 : 묵담성우(黙潭聲祐, 1896~1981) ''' (한국불교태고종)&lt;br /&gt;
* ''' 생애·업적 '''&lt;br /&gt;
담양 용화사를 상주도량과 교화도량의 근본장소로 삼고 창건한 묵담 대종사는 1896년 3월 8일 담양 수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默潭)이다. &amp;lt;/br&amp;gt;&lt;br /&gt;
속세의 성은 담양 국씨로 명문세족이었던 父 순국씨와 母 오씨 극락화의 맏아들이다.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선사를 은사로, 내장사 종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했다. 1914년 내장사 금강계단에서 금해 율사에게 비구 구족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했다. 백양사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미과·사교과를 졸업했으며, 정읍 내장사, 곡성 관음사, 부안 내소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lt;br /&gt;
1918년 백양사 법계고시에서 대선법계를, 1931년 종사법계를, 1932년 대종사법계를 수하고 백양사 청류암 관음선원, 양주 망월사, 담양 우송선원 등 70여 안거를 성만(盛滿)했다. &amp;lt;/br&amp;gt;&lt;br /&gt;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오도송(悟道頌)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靑天霹靂鳴 天地波濤起 我卽常安閑 聊與山花笑).”였다. &amp;lt;/br&amp;gt;&lt;br /&gt;
이로서 묵담 큰스님은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유의 마음을 얻었다.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여여부동은 금강경의 언어다.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 여여부동이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5·6·7대)&amp;lt;ref&amp;gt;이 당시 조계종은 불교정화운동으로 비구대처 간 갈등상황이었으며, 묵담성우스님은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었음&amp;lt;/ref&amp;gt;, 1975년 태고종정(3·4대)을 역임했으며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0년 담양 용화사 본찰에서 열반계(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어찌 생사윤회상에 걸림이 있으리요.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越彼法界獨尊性 豈拘生死輪回相 若人問我來去處 雲在靑天水在甁)를 송(頌)하시고 이듬해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amp;lt;/br&amp;gt;&lt;br /&gt;
태고종단 장(葬)으로 용화사에서 다비, 9과의 사리가 나와 용화사를 비롯 장성 백양사와 전주 관음선원, 부산 금수사, 안양 연화사, 제주 성광사, 선광사, 금붕사, 성림사에 각각 한 개씩을 나눠 봉안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저서로는 ‘묵담대종사문집’과 ‘집착하지 말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현대고승법어집)’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일찍이 11세에 동진 출가하시어 선교율(禪敎律)에 능통하셨던 묵담 큰스님, 특히 해동칠불(海東七佛) 제9대 율사로서 한국불교 계율 수행사에 우뚝하신 스님은 팔십 평생 동안 제자를 기르고, 부처님 법을 전하며, 가람을 중수하고, 보시행으로 일관했다. &amp;lt;/br&amp;gt;&lt;br /&gt;
그 수행력과 덕망에 힘입어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두루 지내셨는데, 청정율사가 대처승단이라 할 수 있는 태고종의 종정을 지낸 이력이 이채롭다. &amp;lt;/br&amp;gt;&lt;br /&gt;
“승단의 기본은 화합에 있다”, “행하기 힘든 것을 행하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출가 승려의 정신”이라며 대중 불교 구현에 전력하신 스님은 불교 정화 때 처음에는 조계종단을 지지했다가 종조(宗祖) 문제로 만암 스님처럼 환부역조(換父易祖)할 수 없다는 생각과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확고해 태고종단에 남으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 [http://m.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814 담양인신문(2016.10.10  13:18:28)] 우리고장 名僧을 찾아서/③묵담 대종사(默潭 大宗師)&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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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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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7T02:53: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법희(法喜)스님&lt;br /&gt;
|사진= 197  법희(法喜).jpg&lt;br /&gt;
|법명= '''법희(法喜)'''&lt;br /&gt;
|법호= 묘리(妙理)&lt;br /&gt;
|속명= 유손순(兪巽順)&lt;br /&gt;
|출생= 1887.02.09.&lt;br /&gt;
|출가= 1890년&lt;br /&gt;
|입적=1975.03.09. &amp;lt;/br&amp;gt; (세수89세, 법랍86세) &lt;br /&gt;
|사찰='''수덕사 견성암'''&amp;lt;/br&amp;gt;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7 ||충남 공주 출생 &lt;br /&gt;
|-&lt;br /&gt;
|1890 ||[https://blog.naver.com/rock2park/2229136366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lt;br /&gt;
|-&lt;br /&gt;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lt;br /&gt;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lt;br /&gt;
|-&lt;br /&gt;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lt;br /&gt;
|-&lt;br /&gt;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lt;br /&gt;
|-&lt;br /&gt;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수한(修閑, 4)→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法喜, 8)]]→춘일(春一, 9), 영명(靈明, 9),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 9)]], 영호(永浩, 9),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 9)]], [[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 9)]], 혜능(慧能, 9), [[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 9)]], [[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 9)]], 원성(圓成, 9), [[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 9)]], [[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 9)]], 도전(道全, 9), 정운(淨雲, 9), [[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 9)]], 금목(金目, 9), 현성(賢聖, 9), 월덕(月德, 9)&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파일: 197-02.jpg |섬네일 |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lt;br /&gt;
[[파일: 법희스님(1).jpg | 섬네일 | [법희(法喜)스님] &amp;lt;/br&amp;gt;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파일: 197-03.jpg | 섬네일 |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lt;br /&gt;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과의 만남===&lt;br /&gt;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amp;lt;/br&amp;gt;&lt;br /&gt;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그래 잘 왔다.” &amp;lt;/br&amp;gt;&lt;br /&gt;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lt;br /&gt;
&lt;br /&gt;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lt;br /&gt;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lt;br /&gt;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lt;br /&gt;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lt;br /&gt;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lt;br /&gt;
&lt;br /&gt;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lt;br /&gt;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lt;br /&gt;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lt;br /&gt;
&lt;br /&gt;
또 하루는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lt;br /&gt;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진정한 수행자의 삶===&lt;br /&gt;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amp;lt;/br&amp;gt;&lt;br /&gt;
&amp;quot;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amp;quot;  &amp;lt;/br&amp;gt;&lt;br /&gt;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lt;br /&gt;
&lt;br /&gt;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lt;br /&gt;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amp;quot;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amp;quot; &amp;quot;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amp;quot;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lt;br /&gt;
법희스님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404 수덕사 견성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39280&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사불산 윤필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64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9201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495&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삼각산 승가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75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12  월산(月山)스님]의 조사===&lt;br /&gt;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lt;br /&gt;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lt;br /&gt;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lt;br /&gt;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lt;br /&gt;
     &lt;br /&gt;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lt;br /&gt;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lt;br /&gt;
&lt;br /&gt;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53 벽초(碧超)]·[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lt;br /&gt;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amp;lt;/br&amp;gt;&lt;br /&gt;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amp;lt;/br&amp;gt; &lt;br /&gt;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amp;lt;ref&amp;gt;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은 乙卯年으로 되어 있음(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70.)&amp;lt;/ref&amp;gt;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amp;lt;/br&amp;gt;&lt;br /&gt;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amp;lt;/br&amp;gt;&lt;br /&gt;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lt;br /&gt;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lt;br /&gt;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lt;br /&gt;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lt;br /&gt;
&amp;lt;/poem&amp;gt;&amp;lt;/br&amp;gt;&lt;br /&gt;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lt;br /&gt;
&lt;br /&gt;
===수계제자===&lt;br /&gt;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수덕사 견성암==&lt;br /&gt;
[[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amp;lt;/br&amp;gt;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amp;amp;re=1)]]&lt;br /&gt;
&lt;br /&gt;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amp;lt;/br&amp;gt;&lt;br /&gt;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amp;lt;/br&amp;gt;&lt;br /&gt;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lt;br /&gt;
&lt;br /&gt;
==[[한국의 비구니선원 견성암선원]] 바로가기==&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lt;br /&gt;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lt;br /&gt;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86. 391, 393~398.&lt;br /&gt;
* 부산일보,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1970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70419000335&lt;br /&gt;
* 월간해인, 보덕사 자광스님 (1996년)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amp;amp;wno=44&amp;amp;cno=1010&lt;br /&gt;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2004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lt;br /&gt;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2005년)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4324.html&lt;br /&gt;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lt;br /&gt;
* 문화일보,‘깨달음의 꽃’ 피운 비구니들의 삶 (2007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23010325300730040&lt;br /&gt;
* 현대불교,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 (2013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69&lt;br /&gt;
* 카카오스토리, 자성불(自性佛) (2017년)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 불교평론, 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2022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9&lt;br /&gt;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22년) http://haein.or.kr/contents/cl.php?pgv=v&amp;amp;cnum=232&amp;amp;cno=7300&lt;br /&gt;
* 보문사,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4030&amp;amp;device=pc&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 | 법희(法喜)스님]] || 본항목 ||  || 법희스님(法喜, 1887~1975)|| 法喜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귀완(貴完)스님|귀완스님(貴完)]] || ~의 수계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동학사 미타암]] || ~에서 출가하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동운(東雲)스님|동운스님(東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해광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만공월면(滿空月面)|만공스님(滿空)]] || ~(으)로부터 전법하다 || 당호 : 묘리당(妙理堂)&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비구니 총림원장&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662789 | 경도=126.61943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 = 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53</id>
		<title>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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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7T02:52: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법희(法喜)스님&lt;br /&gt;
|사진= 197  법희(法喜).jpg&lt;br /&gt;
|법명= '''법희(法喜)'''&lt;br /&gt;
|법호= 묘리(妙理)&lt;br /&gt;
|속명= 유손순(兪巽順)&lt;br /&gt;
|출생= 1887.02.09.&lt;br /&gt;
|출가= 1890년&lt;br /&gt;
|입적=1975.03.09. &amp;lt;/br&amp;gt; (세수89세, 법랍86세) &lt;br /&gt;
|사찰='''수덕사 견성암'''&amp;lt;/br&amp;gt;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7 ||충남 공주 출생 &lt;br /&gt;
|-&lt;br /&gt;
|1890 ||[https://blog.naver.com/rock2park/2229136366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lt;br /&gt;
|-&lt;br /&gt;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lt;br /&gt;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lt;br /&gt;
|-&lt;br /&gt;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lt;br /&gt;
|-&lt;br /&gt;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lt;br /&gt;
|-&lt;br /&gt;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수한(修閑, 4)→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法喜, 8)]]→춘일(春一, 9), 영명(靈明, 9),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 9)]], 영호(永浩, 9),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 9)]], [[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 9)]], 혜능(慧能, 9), [[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 9)]], [[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 9)]], 원성(圓成, 9), [[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 9)]], [[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 9)]], 도전(道全, 9), 정운(淨雲, 9), [[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 9)]], 금목(金目, 9), 현성(賢聖, 9), 월덕(月德, 9)&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파일: 197-02.jpg |섬네일 |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lt;br /&gt;
[[파일: 법희스님(1).jpg | 섬네일 | [법희(法喜)스님] &amp;lt;/br&amp;gt;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파일: 197-03.jpg | 섬네일 |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lt;br /&gt;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과의 만남===&lt;br /&gt;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amp;lt;/br&amp;gt;&lt;br /&gt;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그래 잘 왔다.” &amp;lt;/br&amp;gt;&lt;br /&gt;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lt;br /&gt;
&lt;br /&gt;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lt;br /&gt;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lt;br /&gt;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lt;br /&gt;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lt;br /&gt;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lt;br /&gt;
&lt;br /&gt;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lt;br /&gt;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lt;br /&gt;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lt;br /&gt;
&lt;br /&gt;
또 하루는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lt;br /&gt;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진정한 수행자의 삶===&lt;br /&gt;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amp;lt;/br&amp;gt;&lt;br /&gt;
&amp;quot;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amp;quot;  &amp;lt;/br&amp;gt;&lt;br /&gt;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lt;br /&gt;
&lt;br /&gt;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lt;br /&gt;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amp;quot;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amp;quot; &amp;quot;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amp;quot;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lt;br /&gt;
법희스님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404 수덕사 견성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39280&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사불산 윤필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64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9201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495&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삼각산 승가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75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12  월산(月山)스님]의 조사===&lt;br /&gt;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lt;br /&gt;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lt;br /&gt;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lt;br /&gt;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lt;br /&gt;
     &lt;br /&gt;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lt;br /&gt;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lt;br /&gt;
&lt;br /&gt;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53 벽초(碧超)]·[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lt;br /&gt;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amp;lt;/br&amp;gt;&lt;br /&gt;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amp;lt;/br&amp;gt; &lt;br /&gt;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amp;lt;ref&amp;gt;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은 乙卯年으로 되어 있음(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70.)&amp;lt;/ref&amp;gt;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amp;lt;/br&amp;gt;&lt;br /&gt;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amp;lt;/br&amp;gt;&lt;br /&gt;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lt;br /&gt;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lt;br /&gt;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lt;br /&gt;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lt;br /&gt;
&amp;lt;/poem&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lt;br /&gt;
&lt;br /&gt;
===수계제자===&lt;br /&gt;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수덕사 견성암==&lt;br /&gt;
[[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amp;lt;/br&amp;gt;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amp;amp;re=1)]]&lt;br /&gt;
&lt;br /&gt;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amp;lt;/br&amp;gt;&lt;br /&gt;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amp;lt;/br&amp;gt;&lt;br /&gt;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lt;br /&gt;
&lt;br /&gt;
==[[한국의 비구니선원 견성암선원]] 바로가기==&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lt;br /&gt;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lt;br /&gt;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86. 391, 393~398.&lt;br /&gt;
* 부산일보,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1970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70419000335&lt;br /&gt;
* 월간해인, 보덕사 자광스님 (1996년)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amp;amp;wno=44&amp;amp;cno=1010&lt;br /&gt;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2004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lt;br /&gt;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2005년)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4324.html&lt;br /&gt;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lt;br /&gt;
* 문화일보,‘깨달음의 꽃’ 피운 비구니들의 삶 (2007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23010325300730040&lt;br /&gt;
* 현대불교,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 (2013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69&lt;br /&gt;
* 카카오스토리, 자성불(自性佛) (2017년)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 불교평론, 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2022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9&lt;br /&gt;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22년) http://haein.or.kr/contents/cl.php?pgv=v&amp;amp;cnum=232&amp;amp;cno=7300&lt;br /&gt;
* 보문사,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4030&amp;amp;device=pc&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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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662789 | 경도=126.61943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 = 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52</id>
		<title>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52"/>
		<updated>2026-06-07T02:51: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법희(法喜)스님&lt;br /&gt;
|사진= 197  법희(法喜).jpg&lt;br /&gt;
|법명= '''법희(法喜)'''&lt;br /&gt;
|법호= 묘리(妙理)&lt;br /&gt;
|속명= 유손순(兪巽順)&lt;br /&gt;
|출생= 1887.02.09.&lt;br /&gt;
|출가= 1890년&lt;br /&gt;
|입적=1975.03.09. &amp;lt;/br&amp;gt; (세수89세, 법랍86세) &lt;br /&gt;
|사찰='''수덕사 견성암'''&amp;lt;/br&amp;gt;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7 ||충남 공주 출생 &lt;br /&gt;
|-&lt;br /&gt;
|1890 ||[https://blog.naver.com/rock2park/2229136366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lt;br /&gt;
|-&lt;br /&gt;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lt;br /&gt;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lt;br /&gt;
|-&lt;br /&gt;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lt;br /&gt;
|-&lt;br /&gt;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lt;br /&gt;
|-&lt;br /&gt;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수한(修閑, 4)→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法喜, 8)]]→춘일(春一, 9), 영명(靈明, 9),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 9)]], 영호(永浩, 9),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 9)]], [[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 9)]], 혜능(慧能, 9), [[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 9)]], [[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 9)]], 원성(圓成, 9), [[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 9)]], [[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 9)]], 도전(道全, 9), 정운(淨雲, 9), [[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 9)]], 금목(金目, 9), 현성(賢聖, 9), 월덕(月德, 9)&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파일: 197-02.jpg |섬네일 |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lt;br /&gt;
[[파일: 법희스님(1).jpg | 섬네일 | [법희(法喜)스님] &amp;lt;/br&amp;gt;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파일: 197-03.jpg | 섬네일 |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lt;br /&gt;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과의 만남===&lt;br /&gt;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amp;lt;/br&amp;gt;&lt;br /&gt;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그래 잘 왔다.” &amp;lt;/br&amp;gt;&lt;br /&gt;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lt;br /&gt;
&lt;br /&gt;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lt;br /&gt;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lt;br /&gt;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lt;br /&gt;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lt;br /&gt;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lt;br /&gt;
&lt;br /&gt;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lt;br /&gt;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lt;br /&gt;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lt;br /&gt;
&lt;br /&gt;
또 하루는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lt;br /&gt;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진정한 수행자의 삶===&lt;br /&gt;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amp;lt;/br&amp;gt;&lt;br /&gt;
&amp;quot;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amp;quot;  &amp;lt;/br&amp;gt;&lt;br /&gt;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lt;br /&gt;
&lt;br /&gt;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lt;br /&gt;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amp;quot;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amp;quot; &amp;quot;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amp;quot;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lt;br /&gt;
법희스님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404 수덕사 견성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39280&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사불산 윤필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64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9201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495&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삼각산 승가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75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12  월산(月山)스님]의 조사===&lt;br /&gt;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lt;br /&gt;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lt;br /&gt;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lt;br /&gt;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lt;br /&gt;
     &lt;br /&gt;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lt;br /&gt;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lt;br /&gt;
&lt;br /&gt;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53 벽초(碧超)]·[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lt;br /&gt;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amp;lt;/br&amp;gt;&lt;br /&gt;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amp;lt;/br&amp;gt; &lt;br /&gt;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amp;lt;ref&amp;gt;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은 乙卯年으로 되어 있음(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70.)&amp;lt;/ref&amp;gt;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amp;lt;/br&amp;gt;&lt;br /&gt;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amp;lt;/br&amp;gt;&lt;br /&gt;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lt;br /&gt;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lt;br /&gt;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lt;br /&gt;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lt;br /&gt;
&lt;br /&gt;
===수계제자===&lt;br /&gt;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수덕사 견성암==&lt;br /&gt;
[[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amp;lt;/br&amp;gt;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amp;amp;re=1)]]&lt;br /&gt;
&lt;br /&gt;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amp;lt;/br&amp;gt;&lt;br /&gt;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amp;lt;/br&amp;gt;&lt;br /&gt;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lt;br /&gt;
&lt;br /&gt;
==[[한국의 비구니선원 견성암선원]] 바로가기==&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lt;br /&gt;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lt;br /&gt;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86. 391, 393~398.&lt;br /&gt;
* 부산일보,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1970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70419000335&lt;br /&gt;
* 월간해인, 보덕사 자광스님 (1996년)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amp;amp;wno=44&amp;amp;cno=1010&lt;br /&gt;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2004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lt;br /&gt;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2005년)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4324.html&lt;br /&gt;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lt;br /&gt;
* 문화일보,‘깨달음의 꽃’ 피운 비구니들의 삶 (2007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23010325300730040&lt;br /&gt;
* 현대불교,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 (2013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69&lt;br /&gt;
* 카카오스토리, 자성불(自性佛) (2017년)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 불교평론, 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2022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9&lt;br /&gt;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22년) http://haein.or.kr/contents/cl.php?pgv=v&amp;amp;cnum=232&amp;amp;cno=7300&lt;br /&gt;
* 보문사,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4030&amp;amp;device=pc&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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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 | 법희(法喜)스님]] || 본항목 ||  || 법희스님(法喜, 1887~1975)|| 法喜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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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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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귀완(貴完)스님|귀완스님(貴完)]] || ~의 수계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동학사 미타암]] || ~에서 출가하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동운(東雲)스님|동운스님(東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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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만공월면(滿空月面)|만공스님(滿空)]] || ~(으)로부터 전법하다 || 당호 : 묘리당(妙理堂)&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비구니 총림원장&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662789 | 경도=126.61943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 = 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51</id>
		<title>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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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7T02:50: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법희(法喜)스님&lt;br /&gt;
|사진= 197  법희(法喜).jpg&lt;br /&gt;
|법명= '''법희(法喜)'''&lt;br /&gt;
|법호= 묘리(妙理)&lt;br /&gt;
|속명= 유손순(兪巽順)&lt;br /&gt;
|출생= 1887.02.09.&lt;br /&gt;
|출가= 1890년&lt;br /&gt;
|입적=1975.03.09. &amp;lt;/br&amp;gt; (세수89세, 법랍86세) &lt;br /&gt;
|사찰='''수덕사 견성암'''&amp;lt;/br&amp;gt;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7 ||충남 공주 출생 &lt;br /&gt;
|-&lt;br /&gt;
|1890 ||[https://blog.naver.com/rock2park/2229136366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lt;br /&gt;
|-&lt;br /&gt;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lt;br /&gt;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lt;br /&gt;
|-&lt;br /&gt;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lt;br /&gt;
|-&lt;br /&gt;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lt;br /&gt;
|-&lt;br /&gt;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수한(修閑, 4)→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法喜, 8)]]→춘일(春一, 9), 영명(靈明, 9),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 9)]], 영호(永浩, 9),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 9)]], [[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 9)]], 혜능(慧能, 9), [[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 9)]], [[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 9)]], 원성(圓成, 9), [[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 9)]], [[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 9)]], 도전(道全, 9), 정운(淨雲, 9), [[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 9)]], 금목(金目, 9), 현성(賢聖, 9), 월덕(月德, 9)&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파일: 197-02.jpg |섬네일 |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lt;br /&gt;
[[파일: 법희스님(1).jpg | 섬네일 | [법희(法喜)스님] &amp;lt;/br&amp;gt;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파일: 197-03.jpg | 섬네일 |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lt;br /&gt;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과의 만남===&lt;br /&gt;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amp;lt;/br&amp;gt;&lt;br /&gt;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그래 잘 왔다.” &amp;lt;/br&amp;gt;&lt;br /&gt;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lt;br /&gt;
&lt;br /&gt;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lt;br /&gt;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lt;br /&gt;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lt;br /&gt;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lt;br /&gt;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lt;br /&gt;
&lt;br /&gt;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lt;br /&gt;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lt;br /&gt;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lt;br /&gt;
&lt;br /&gt;
또 하루는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lt;br /&gt;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진정한 수행자의 삶===&lt;br /&gt;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amp;lt;/br&amp;gt;&lt;br /&gt;
&amp;quot;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amp;quot;  &amp;lt;/br&amp;gt;&lt;br /&gt;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lt;br /&gt;
&lt;br /&gt;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lt;br /&gt;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amp;quot;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amp;quot; &amp;quot;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amp;quot;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lt;br /&gt;
법희스님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404 수덕사 견성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39280&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사불산 윤필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64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9201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495&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삼각산 승가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75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12  월산(月山)스님]의 조사===&lt;br /&gt;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lt;br /&gt;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lt;br /&gt;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lt;br /&gt;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lt;br /&gt;
     &lt;br /&gt;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lt;br /&gt;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lt;br /&gt;
&lt;br /&gt;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53 벽초(碧超)]·[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lt;br /&gt;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amp;lt;/br&amp;gt;&lt;br /&gt;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amp;lt;/br&amp;gt; &lt;br /&gt;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amp;lt;ref&amp;gt;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은 乙卯年으로 되어 있음(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70.)&amp;lt;/ref&amp;gt;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amp;lt;/br&amp;gt;&lt;br /&gt;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amp;lt;/br&amp;gt;&lt;br /&gt;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lt;br /&gt;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lt;br /&gt;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lt;br /&gt;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lt;br /&gt;
&lt;br /&gt;
===수계제자===&lt;br /&gt;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수덕사 견성암==&lt;br /&gt;
[[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amp;lt;/br&amp;gt;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amp;amp;re=1)]]&lt;br /&gt;
&lt;br /&gt;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amp;lt;/br&amp;gt;&lt;br /&gt;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amp;lt;/br&amp;gt;&lt;br /&gt;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lt;br /&gt;
&lt;br /&gt;
==[[한국의 비구니선원 견성암선원]] 바로가기==&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lt;br /&gt;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lt;br /&gt;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86. 391, 393~398.&lt;br /&gt;
* 부산일보,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1970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70419000335&lt;br /&gt;
* 월간해인, 보덕사 자광스님 (1996년)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amp;amp;wno=44&amp;amp;cno=1010&lt;br /&gt;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2004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lt;br /&gt;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2005년)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4324.html&lt;br /&gt;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lt;br /&gt;
* 문화일보,‘깨달음의 꽃’ 피운 비구니들의 삶 (2007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23010325300730040&lt;br /&gt;
* 현대불교,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 (2013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69&lt;br /&gt;
* 카카오스토리, 자성불(自性佛) (2017년)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 불교평론, 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2022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9&lt;br /&gt;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22년) http://haein.or.kr/contents/cl.php?pgv=v&amp;amp;cnum=232&amp;amp;cno=7300&lt;br /&gt;
* 보문사,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4030&amp;amp;device=pc&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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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 데이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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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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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662789 | 경도=126.61943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 = 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50</id>
		<title>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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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7T02:49: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법희(法喜)스님&lt;br /&gt;
|사진= 197  법희(法喜).jpg&lt;br /&gt;
|법명= '''법희(法喜)'''&lt;br /&gt;
|법호= 묘리(妙理)&lt;br /&gt;
|속명= 유손순(兪巽順)&lt;br /&gt;
|출생= 1887.02.09.&lt;br /&gt;
|출가= 1890년&lt;br /&gt;
|입적=1975.03.09. &amp;lt;/br&amp;gt; (세수89세, 법랍86세) &lt;br /&gt;
|사찰='''수덕사 견성암'''&amp;lt;/br&amp;gt;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7 ||충남 공주 출생 &lt;br /&gt;
|-&lt;br /&gt;
|1890 ||[https://blog.naver.com/rock2park/2229136366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lt;br /&gt;
|-&lt;br /&gt;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lt;br /&gt;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lt;br /&gt;
|-&lt;br /&gt;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lt;br /&gt;
|-&lt;br /&gt;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lt;br /&gt;
|-&lt;br /&gt;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수한(修閑, 4)→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法喜, 8)]]→춘일(春一, 9), 영명(靈明, 9),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 9)]], 영호(永浩, 9),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 9)]], [[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 9)]], 혜능(慧能, 9), [[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 9)]], [[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 9)]], 원성(圓成, 9), [[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 9)]], [[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 9)]], 도전(道全, 9), 정운(淨雲, 9), [[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 9)]], 금목(金目, 9), 현성(賢聖, 9), 월덕(月德, 9)&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파일: 197-02.jpg |섬네일 |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lt;br /&gt;
[[파일: 법희스님(1).jpg | 섬네일 | [법희(法喜)스님] &amp;lt;/br&amp;gt;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파일: 197-03.jpg | 섬네일 |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lt;br /&gt;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과의 만남===&lt;br /&gt;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amp;lt;/br&amp;gt;&lt;br /&gt;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그래 잘 왔다.” &amp;lt;/br&amp;gt;&lt;br /&gt;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lt;br /&gt;
&lt;br /&gt;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lt;br /&gt;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lt;br /&gt;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lt;br /&gt;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lt;br /&gt;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lt;br /&gt;
&lt;br /&gt;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lt;br /&gt;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lt;br /&gt;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lt;br /&gt;
&lt;br /&gt;
또 하루는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lt;br /&gt;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진정한 수행자의 삶===&lt;br /&gt;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amp;lt;/br&amp;gt;&lt;br /&gt;
&amp;quot;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amp;quot;  &amp;lt;/br&amp;gt;&lt;br /&gt;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lt;br /&gt;
&lt;br /&gt;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lt;br /&gt;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amp;quot;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amp;quot; &amp;quot;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amp;quot;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lt;br /&gt;
법희스님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404 수덕사 견성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39280&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사불산 윤필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64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9201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495&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삼각산 승가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75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12  월산(月山)스님]의 조사===&lt;br /&gt;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lt;br /&gt;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lt;br /&gt;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lt;br /&gt;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lt;br /&gt;
     &lt;br /&gt;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lt;br /&gt;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lt;br /&gt;
&lt;br /&gt;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53 벽초(碧超)]·[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lt;br /&gt;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amp;lt;/br&amp;gt;&lt;br /&gt;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amp;lt;/br&amp;gt; &lt;br /&gt;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amp;lt;ref&amp;gt;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은 乙卯年으로 되어 있음(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70.)&amp;lt;/ref&amp;gt;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amp;lt;/br&amp;gt;&lt;br /&gt;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amp;lt;/br&amp;gt;&lt;br /&gt;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lt;br /&gt;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lt;br /&gt;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lt;br /&gt;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lt;br /&gt;
&lt;br /&gt;
===수계제자===&lt;br /&gt;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수덕사 견성암==&lt;br /&gt;
[[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amp;lt;/br&amp;gt;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amp;amp;re=1)]]&lt;br /&gt;
&lt;br /&gt;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amp;lt;/br&amp;gt;&lt;br /&gt;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amp;lt;/br&amp;gt;&lt;br /&gt;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lt;br /&gt;
&lt;br /&gt;
==[[한국의 비구니선원 견성암선원]] 바로가기==&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lt;br /&gt;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lt;br /&gt;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86. 391, 393~398.&lt;br /&gt;
* 부산일보,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1970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70419000335&lt;br /&gt;
* 월간해인, 보덕사 자광스님 (1996년)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amp;amp;wno=44&amp;amp;cno=1010&lt;br /&gt;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2004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lt;br /&gt;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2005년)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4324.html&lt;br /&gt;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lt;br /&gt;
* 문화일보,‘깨달음의 꽃’ 피운 비구니들의 삶 (2007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23010325300730040&lt;br /&gt;
* 현대불교,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 (2013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69&lt;br /&gt;
* 카카오스토리, 자성불(自性佛) (2017년)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 불교평론, 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2022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9&lt;br /&gt;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22년) http://haein.or.kr/contents/cl.php?pgv=v&amp;amp;cnum=232&amp;amp;cno=7300&lt;br /&gt;
* 보문사,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4030&amp;amp;device=pc&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 | 법희(法喜)스님]] || 본항목 ||  || 법희스님(法喜, 1887~1975)|| 法喜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귀완(貴完)스님|귀완스님(貴完)]] || ~의 수계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동학사 미타암]] || ~에서 출가하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동운(東雲)스님|동운스님(東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해광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만공월면(滿空月面)|만공스님(滿空)]] || ~(으)로부터 전법하다 || 당호 : 묘리당(妙理堂)&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비구니 총림원장&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662789 | 경도=126.61943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 = 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49</id>
		<title>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49"/>
		<updated>2026-06-07T02:48: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법희(法喜)스님&lt;br /&gt;
|사진= 197  법희(法喜).jpg&lt;br /&gt;
|법명= '''법희(法喜)'''&lt;br /&gt;
|법호= 묘리(妙理)&lt;br /&gt;
|속명= 유손순(兪巽順)&lt;br /&gt;
|출생= 1887.02.09.&lt;br /&gt;
|출가= 1890년&lt;br /&gt;
|입적=1975.03.09. &amp;lt;/br&amp;gt; (세수89세, 법랍86세) &lt;br /&gt;
|사찰='''수덕사 견성암'''&amp;lt;/br&amp;gt;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7 ||충남 공주 출생 &lt;br /&gt;
|-&lt;br /&gt;
|1890 ||[https://blog.naver.com/rock2park/2229136366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lt;br /&gt;
|-&lt;br /&gt;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lt;br /&gt;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lt;br /&gt;
|-&lt;br /&gt;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lt;br /&gt;
|-&lt;br /&gt;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lt;br /&gt;
|-&lt;br /&gt;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수한(修閑, 4)→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法喜, 8)]]→춘일(春一, 9), 영명(靈明, 9),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 9)]], 영호(永浩, 9),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 9)]], [[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 9)]], 혜능(慧能, 9), [[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 9)]], [[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 9)]], 원성(圓成, 9), [[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 9)]], [[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 9)]], 도전(道全, 9), 정운(淨雲, 9), [[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 9)]], 금목(金目, 9), 현성(賢聖, 9), 월덕(月德, 9)&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파일: 197-02.jpg |섬네일 |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lt;br /&gt;
[[파일: 법희스님(1).jpg | 섬네일 | [법희(法喜)스님] &amp;lt;/br&amp;gt;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파일: 197-03.jpg | 섬네일 |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lt;br /&gt;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과의 만남===&lt;br /&gt;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amp;lt;/br&amp;gt;&lt;br /&gt;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그래 잘 왔다.” &amp;lt;/br&amp;gt;&lt;br /&gt;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lt;br /&gt;
&lt;br /&gt;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lt;br /&gt;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lt;br /&gt;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lt;br /&gt;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lt;br /&gt;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lt;br /&gt;
&lt;br /&gt;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lt;br /&gt;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lt;br /&gt;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lt;br /&gt;
&lt;br /&gt;
또 하루는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lt;br /&gt;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진정한 수행자의 삶===&lt;br /&gt;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amp;lt;/br&amp;gt;&lt;br /&gt;
&amp;quot;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amp;quot;  &amp;lt;/br&amp;gt;&lt;br /&gt;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lt;br /&gt;
&lt;br /&gt;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lt;br /&gt;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amp;quot;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amp;quot; &amp;quot;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amp;quot;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lt;br /&gt;
법희스님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404 수덕사 견성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39280&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사불산 윤필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64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9201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495&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삼각산 승가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75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12  월산(月山)스님]의 조사===&lt;br /&gt;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lt;br /&gt;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lt;br /&gt;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lt;br /&gt;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lt;br /&gt;
     &lt;br /&gt;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lt;br /&gt;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lt;br /&gt;
&lt;br /&gt;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53 벽초(碧超)]·[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lt;br /&gt;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amp;lt;/br&amp;gt;&lt;br /&gt;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amp;lt;/br&amp;gt; &lt;br /&gt;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amp;lt;ref&amp;gt;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은 乙卯年으로 되어 있음(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70.)&amp;lt;/ref&amp;gt;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amp;lt;/br&amp;gt;&lt;br /&gt;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amp;lt;/br&amp;gt;&lt;br /&gt;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lt;br /&gt;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lt;br /&gt;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lt;br /&gt;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수계제자===&lt;br /&gt;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수덕사 견성암==&lt;br /&gt;
[[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amp;lt;/br&amp;gt;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amp;amp;re=1)]]&lt;br /&gt;
&lt;br /&gt;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amp;lt;/br&amp;gt;&lt;br /&gt;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amp;lt;/br&amp;gt;&lt;br /&gt;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lt;br /&gt;
&lt;br /&gt;
==[[한국의 비구니선원 견성암선원]] 바로가기==&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lt;br /&gt;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lt;br /&gt;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86. 391, 393~398.&lt;br /&gt;
* 부산일보,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1970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70419000335&lt;br /&gt;
* 월간해인, 보덕사 자광스님 (1996년)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amp;amp;wno=44&amp;amp;cno=1010&lt;br /&gt;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2004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lt;br /&gt;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2005년)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4324.html&lt;br /&gt;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lt;br /&gt;
* 문화일보,‘깨달음의 꽃’ 피운 비구니들의 삶 (2007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23010325300730040&lt;br /&gt;
* 현대불교,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 (2013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69&lt;br /&gt;
* 카카오스토리, 자성불(自性佛) (2017년)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 불교평론, 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2022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9&lt;br /&gt;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22년) http://haein.or.kr/contents/cl.php?pgv=v&amp;amp;cnum=232&amp;amp;cno=7300&lt;br /&gt;
* 보문사,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4030&amp;amp;device=pc&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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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 | 법희(法喜)스님]] || 본항목 ||  || 법희스님(法喜, 1887~1975)|| 法喜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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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귀완(貴完)스님|귀완스님(貴完)]] || ~의 수계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동학사 미타암]] || ~에서 출가하다 ||&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동운(東雲)스님|동운스님(東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해광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만공월면(滿空月面)|만공스님(滿空)]] || ~(으)로부터 전법하다 || 당호 : 묘리당(妙理堂)&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비구니 총림원장&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662789 | 경도=126.61943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 = 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48</id>
		<title>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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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7T02:46: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법희(法喜)스님&lt;br /&gt;
|사진= 197  법희(法喜).jpg&lt;br /&gt;
|법명= '''법희(法喜)'''&lt;br /&gt;
|법호= 묘리(妙理)&lt;br /&gt;
|속명= 유손순(兪巽順)&lt;br /&gt;
|출생= 1887.02.09.&lt;br /&gt;
|출가= 1890년&lt;br /&gt;
|입적=1975.03.09. &amp;lt;/br&amp;gt; (세수89세, 법랍86세) &lt;br /&gt;
|사찰='''수덕사 견성암'''&amp;lt;/br&amp;gt;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7 ||충남 공주 출생 &lt;br /&gt;
|-&lt;br /&gt;
|1890 ||[https://blog.naver.com/rock2park/2229136366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lt;br /&gt;
|-&lt;br /&gt;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lt;br /&gt;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lt;br /&gt;
|-&lt;br /&gt;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lt;br /&gt;
|-&lt;br /&gt;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lt;br /&gt;
|-&lt;br /&gt;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수한(修閑, 4)→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法喜, 8)]]→춘일(春一, 9), 영명(靈明, 9),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 9)]], 영호(永浩, 9),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 9)]], [[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 9)]], 혜능(慧能, 9), [[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 9)]], [[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 9)]], 원성(圓成, 9), [[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 9)]], [[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 9)]], 도전(道全, 9), 정운(淨雲, 9), [[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 9)]], 금목(金目, 9), 현성(賢聖, 9), 월덕(月德, 9)&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파일: 197-02.jpg |섬네일 |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lt;br /&gt;
[[파일: 법희스님(1).jpg | 섬네일 | [법희(法喜)스님] &amp;lt;/br&amp;gt;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파일: 197-03.jpg | 섬네일 |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lt;br /&gt;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과의 만남===&lt;br /&gt;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amp;lt;/br&amp;gt;&lt;br /&gt;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그래 잘 왔다.” &amp;lt;/br&amp;gt;&lt;br /&gt;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lt;br /&gt;
&lt;br /&gt;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lt;br /&gt;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lt;br /&gt;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lt;br /&gt;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lt;br /&gt;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lt;br /&gt;
&lt;br /&gt;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lt;br /&gt;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lt;br /&gt;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lt;br /&gt;
&lt;br /&gt;
또 하루는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lt;br /&gt;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진정한 수행자의 삶===&lt;br /&gt;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amp;lt;/br&amp;gt;&lt;br /&gt;
&amp;quot;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amp;quot;  &amp;lt;/br&amp;gt;&lt;br /&gt;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lt;br /&gt;
&lt;br /&gt;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lt;br /&gt;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amp;quot;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amp;quot; &amp;quot;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amp;quot;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lt;br /&gt;
법희스님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404 수덕사 견성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39280&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사불산 윤필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64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9201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495&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삼각산 승가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75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12  월산(月山)스님]의 조사===&lt;br /&gt;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lt;br /&gt;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lt;br /&gt;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lt;br /&gt;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lt;br /&gt;
     &lt;br /&gt;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lt;br /&gt;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lt;br /&gt;
&lt;br /&gt;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53 벽초(碧超)]·[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lt;br /&gt;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amp;lt;/br&amp;gt;&lt;br /&gt;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amp;lt;/br&amp;gt; &lt;br /&gt;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amp;lt;ref&amp;gt;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은 乙卯年으로 되어 있음(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70.)&amp;lt;/ref&amp;gt;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amp;lt;/br&amp;gt;&lt;br /&gt;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amp;lt;/br&amp;gt;&lt;br /&gt;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lt;br /&gt;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lt;br /&gt;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lt;br /&gt;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lt;br /&gt;
&lt;br /&gt;
===수계제자===&lt;br /&gt;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수덕사 견성암==&lt;br /&gt;
[[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amp;lt;/br&amp;gt;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amp;amp;re=1)]]&lt;br /&gt;
&lt;br /&gt;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amp;lt;/br&amp;gt;&lt;br /&gt;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amp;lt;/br&amp;gt;&lt;br /&gt;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lt;br /&gt;
&lt;br /&gt;
==[[한국의 비구니선원 견성암선원]] 바로가기==&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lt;br /&gt;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lt;br /&gt;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86. 391, 393~398.&lt;br /&gt;
* 부산일보,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1970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70419000335&lt;br /&gt;
* 월간해인, 보덕사 자광스님 (1996년)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amp;amp;wno=44&amp;amp;cno=1010&lt;br /&gt;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2004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lt;br /&gt;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2005년)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4324.html&lt;br /&gt;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lt;br /&gt;
* 문화일보,‘깨달음의 꽃’ 피운 비구니들의 삶 (2007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23010325300730040&lt;br /&gt;
* 현대불교,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 (2013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69&lt;br /&gt;
* 카카오스토리, 자성불(自性佛) (2017년)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 불교평론, 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2022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9&lt;br /&gt;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22년) http://haein.or.kr/contents/cl.php?pgv=v&amp;amp;cnum=232&amp;amp;cno=7300&lt;br /&gt;
* 보문사,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4030&amp;amp;device=pc&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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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662789 | 경도=126.61943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 = 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47</id>
		<title>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D%AC%EC%8A%A4%EB%8B%98(%E6%B3%95%E5%96%9C,_188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1047"/>
		<updated>2026-06-07T02:45: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법희(法喜)스님&lt;br /&gt;
|사진= 197  법희(法喜).jpg&lt;br /&gt;
|법명= '''법희(法喜)'''&lt;br /&gt;
|법호= 묘리(妙理)&lt;br /&gt;
|속명= 유손순(兪巽順)&lt;br /&gt;
|출생= 1887.02.09.&lt;br /&gt;
|출가= 1890년&lt;br /&gt;
|입적=1975.03.09. &amp;lt;/br&amp;gt; (세수89세, 법랍86세) &lt;br /&gt;
|사찰='''수덕사 견성암'''&amp;lt;/br&amp;gt;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7 ||충남 공주 출생 &lt;br /&gt;
|-&lt;br /&gt;
|1890 ||[https://blog.naver.com/rock2park/2229136366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lt;br /&gt;
|-&lt;br /&gt;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lt;br /&gt;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lt;br /&gt;
|-&lt;br /&gt;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lt;br /&gt;
|-&lt;br /&gt;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lt;br /&gt;
|-&lt;br /&gt;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수한(修閑, 4)→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法喜, 8)]]→춘일(春一, 9), 영명(靈明, 9),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 9)]], 영호(永浩, 9),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 9)]], [[장룡스님(掌龍, 1919生, 비구니)|장용(䊋湧, 9)]], 혜능(慧能, 9), [[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 9)]], [[수찬스님(守贊, 1913生, 비구니)|수찬(守贊, 9)]], 원성(圓成, 9), [[도일스님(道一, 1929生, 비구니)|도일(道一, 9)]], [[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 9)]], 도전(道全, 9), 정운(淨雲, 9), [[무생스님(無生, 1909生, 비구니)|무생(無生, 9)]], 금목(金目, 9), 현성(賢聖, 9), 월덕(月德, 9)&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파일: 197-02.jpg |섬네일 |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lt;br /&gt;
[[파일: 법희스님(1).jpg | 섬네일 | [법희(法喜)스님] &amp;lt;/br&amp;gt;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파일: 197-03.jpg | 섬네일 |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amp;lt;/br&amp;gt;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lt;br /&gt;
&lt;br /&gt;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lt;br /&gt;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스님]과의 만남===&lt;br /&gt;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amp;lt;/br&amp;gt;&lt;br /&gt;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그래 잘 왔다.” &amp;lt;/br&amp;gt;&lt;br /&gt;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lt;br /&gt;
&lt;br /&gt;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lt;br /&gt;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lt;br /&gt;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lt;br /&gt;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lt;br /&gt;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lt;br /&gt;
&lt;br /&gt;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lt;br /&gt;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lt;br /&gt;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lt;br /&gt;
&lt;br /&gt;
또 하루는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lt;br /&gt;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amp;lt;/br&amp;gt;&lt;br /&gt;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진정한 수행자의 삶===&lt;br /&gt;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amp;lt;/br&amp;gt;&lt;br /&gt;
&amp;quot;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amp;quot;  &amp;lt;/br&amp;gt;&lt;br /&gt;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lt;br /&gt;
&lt;br /&gt;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lt;br /&gt;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amp;quot;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amp;quot; &amp;quot;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amp;quot;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lt;br /&gt;
법희스님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404 수덕사 견성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39280&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사불산 윤필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64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9201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495&amp;amp;cid=46648&amp;amp;categoryId=46648 삼각산 승가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75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12  월산(月山)스님]의 조사===&lt;br /&gt;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lt;br /&gt;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lt;br /&gt;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lt;br /&gt;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lt;br /&gt;
     &lt;br /&gt;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lt;br /&gt;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lt;br /&gt;
&lt;br /&gt;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53 벽초(碧超)]·[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lt;br /&gt;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amp;lt;/br&amp;gt;&lt;br /&gt;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amp;lt;/br&amp;gt; &lt;br /&gt;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amp;lt;ref&amp;gt;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은 乙卯年으로 되어 있음&amp;lt;/ref&amp;gt;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amp;lt;/br&amp;gt;&lt;br /&gt;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amp;lt;/br&amp;gt;&lt;br /&gt;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lt;br /&gt;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lt;br /&gt;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lt;br /&gt;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lt;br /&gt;
&lt;br /&gt;
===수계제자===&lt;br /&gt;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수덕사 견성암==&lt;br /&gt;
[[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amp;lt;/br&amp;gt;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amp;amp;re=1)]]&lt;br /&gt;
&lt;br /&gt;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amp;lt;/br&amp;gt;&lt;br /&gt;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amp;lt;/br&amp;gt;&lt;br /&gt;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amp;lt;/br&amp;gt;&lt;br /&gt;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amp;lt;/br&amp;gt;&lt;br /&gt;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amp;lt;/br&amp;gt;&lt;br /&gt;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lt;br /&gt;
&lt;br /&gt;
==[[한국의 비구니선원 견성암선원]] 바로가기==&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lt;br /&gt;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lt;br /&gt;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86. 391, 393~398.&lt;br /&gt;
* 부산일보,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1970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70419000335&lt;br /&gt;
* 월간해인, 보덕사 자광스님 (1996년)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amp;amp;wno=44&amp;amp;cno=1010&lt;br /&gt;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2004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lt;br /&gt;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2005년)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4324.html&lt;br /&gt;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lt;br /&gt;
* 문화일보,‘깨달음의 꽃’ 피운 비구니들의 삶 (2007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23010325300730040&lt;br /&gt;
* 현대불교,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 (2013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69&lt;br /&gt;
* 카카오스토리, 자성불(自性佛) (2017년)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lt;br /&gt;
* 불교평론, 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2022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9&lt;br /&gt;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22년) http://haein.or.kr/contents/cl.php?pgv=v&amp;amp;cnum=232&amp;amp;cno=7300&lt;br /&gt;
* 보문사,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4030&amp;amp;device=pc&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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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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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귀완(貴完)스님|귀완스님(貴完)]] || ~의 수계제자이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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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만공월면(滿空月面)|만공스님(滿空)]] || ~(으)로부터 전법하다 || 당호 : 묘리당(妙理堂)&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비구니 총림원장&lt;br /&gt;
|-&lt;br /&gt;
|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법희스님(法喜)]]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662789 | 경도=126.61943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 = 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A4%EA%B3%A1%ED%98%9C%EC%88%9C(%E6%A2%85%E8%B0%B7%E6%85%A7%E6%B7%B3)&amp;diff=41046</id>
		<title>매곡혜순(梅谷慧淳)</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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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6T23:50: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lt;/p&gt;
&lt;hr /&gt;
&lt;div&gt;=='''법호·법명 : 매곡혜순(梅谷慧淳)'''==&lt;br /&gt;
매곡혜순(梅谷慧淳)선사는 학명계종(鶴鳴啓宗, 1867~1929)의 법사(法嗣, 제자)로 학명계종 선사와 함께 1938년 정읍 내장사를 중창한 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내장사는 원래 내장산에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영은사(靈隱寺)와 660년(백제 의자왕 20) 유해선사(幼海禪師)가 세운 내장사(內藏寺, '백련사(白蓮寺), '벽련암(碧蓮菴)'이라고도 전함)가 있었다. &amp;lt;/br&amp;gt;&lt;br /&gt;
1539(중종 34) 내장산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났다. '승도탁란사건'은 승과를 없애는 등 억불정책을 펼쳤던 중종이 승려들을 환속시켜 군적에 넣도록 한 것에 대해 호남지역 승려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했던 사건으로, 중종이 이에 크게 분노하여 내장사와 영은사를 도적의 소굴이라 칭하며 소각을 명함에 따라 불태워졌다. &amp;lt;/br&amp;gt;&lt;br /&gt;
1557년(명종 12) 희묵대사(熙黙大師)가 영은사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는데, 이곳이 현재의 내장사 전신이다. 정유재란 때 전소된 것을 1639년(인조 17) 부용대사(芙蓉大師)가 중수하고 불상을 도금했으며, 1779년(정조 3) 영운대사(暎雲大師)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했다. &amp;lt;/br&amp;gt;&lt;br /&gt;
1925년 학명선사(鶴鳴禪師)가 옛 내장사 자리인 벽련암으로 옮겨 벽련사라 하고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그러나 1938년 매곡선사(梅谷禪師)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77년까지 대규모 중건을 통해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매곡혜순(梅谷慧淳)선사 약력===&lt;br /&gt;
*출생과 은사 이연(1902 ~ 1923)&lt;br /&gt;
출생: 1902년(광무 6년) 3월 10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속성은 정(鄭)씨로 아버지는 정인섭(鄭寅燮) 공이며 어머니는 영월 신씨입니다. &amp;lt;/br&amp;gt;&lt;br /&gt;
성장과 발심: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불교를 깊이 신앙하던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자랐습니다. 자비로운 성품으로 형제들을 잘 보살피던 막내아들이었으나, 세속의 욕망을 멀리하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원력을 세웠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출가: 21세가 되던 1922년(임술년), 고향을 떠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보련(寶蓮) 장로를 은사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을 혜순(慧淳)이라 하였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구족계 수지: 이듬해인 1923년 3월,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일봉(一鳳)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습니다.&lt;br /&gt;
&lt;br /&gt;
*참선 수행과 ‘매곡’ 법호 수지(1923 ~ 1929)&lt;br /&gt;
내전 연구: 출가 후 스님은 유점사 강원에서 불교 경전(내전)을 6년간 깊이 연구하셨습니다. 언제나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참선을 좋아했으며, 사념처관(四念處觀)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捨敎行禪(사교행선): 27세가 되던 1928년(무진년) 봄, 경전 공부를 접고 오직 참선에만 몰두하기 위해 남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 명산을 돌며 고승들을 참문(參問)하였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학명 선사 친견: 28세가 되던 1929년(기사년) 2월, 호남의 명찰인 내장사(內藏寺)에서 당대의 위대한 선지식이었던 학명(鶴鳴) 선사를 친견하였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깊이 통해 학명 선사로부터 인가(認可)를 받고 매곡(梅谷)이라는 법호를 받으며 입실(入室) 제자가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내장사 중창과 선농불교 실천(1930년대 ~ 1945)&lt;br /&gt;
내장사 7차 중창주: 이후 10여 년 동안 교학과 실천(理事)을 함께 닦으며 수행에 힘써 큰스님의 지위(법계 대종사)에 올랐습니다. 내장사 주지를 3기(三期) 연임하는 동안, 허물어져 가던 법당과 협소한 요사채를 대대적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특히 1938년에는 사찰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며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여, 오늘날 내장사의 기틀을 닦은 ‘제7창 중창주’로 기록되었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선농병행(禪農倂行)의 모범: 스님은 백양사와 내장사에서 강조되던 선농불교(수행하며 일하는 전통)를 직접 실천하기 위해, 내장사 인근 쌍암리에 농원을 설치했습니다. 스님을 따르는 대중들이 스스로 노동하여 식량을 조달하는 자급자족의 수행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lt;br /&gt;
&lt;br /&gt;
*해방 후 불교 재건과 교육 구국 운동(1946 ~ 1954)&lt;br /&gt;
종단 행정의 중책: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승단 조직이 개편되자, 45세가 되던 1946년(병술년) 봄에 불교중앙총무원 교무부장에 취임하여 해방 공간의 불교 재건에 나섰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전북 불교의 수장: 이어 전북불교교무원장(현 교구본사 주지급)으로 추대되어 전라북도 내의 사찰들을 총괄 통리하였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현대식 교육 기관 설립: 인재 양성이 곧 구국이라는 신념으로 재단법인 전북교원(全北敎園)을 조직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김제 금산중학교와 금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평생의 전력을 다했습니다. (※ 정읍 지역의 영생학원 설립 등에도 깊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조계종 및 동국대 이사: 1954년(갑오년) 3월에는 다시 불교중앙총무원 총무부장과 동국대학교 재단이사를 겸임하며, 종단 재단의 완성에 기여하고 일제강점기 왜정이 제정한 사찰령(寺刹令)의 폐단을 타파하는 등 불교 발전에 앞장섰습니다.&lt;br /&gt;
&lt;br /&gt;
*은거와 열반(1954 ~ 1955)&lt;br /&gt;
정혜사 은거: 1950년대 중반, 불교계 내부에 비구-대처 승단 간의 극심한 내분(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크게 한탄하며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전주 정혜사(定慧社)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참선에 몰두하셨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마지막 순간과 임종게: 1955년(을미년) 7월 23일, 홀연히 병을 얻어 몸이 불편해지자 목욕재계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상좌(제자)인 금파(錦波) 스님을 불러 아래와 같은 마지막 임종게를 남기셨습니다.&lt;br /&gt;
&lt;br /&gt;
*임종게(臨終偈)]&lt;br /&gt;
元來不知處(원래부지처) : 원래 머무는 곳을 알지 못했고 &amp;lt;/br&amp;gt;&lt;br /&gt;
元來不知來(원래부지래) : 원래 오는 것도 알지 못했으며 &amp;lt;/br&amp;gt;&lt;br /&gt;
不知去(부지거) : 가는 것 또한 알지 못하네. &amp;lt;/br&amp;gt;&lt;br /&gt;
畢竟如何(필경여하) : 필경에 이것이 어떠한가? &amp;lt;/br&amp;gt;&lt;br /&gt;
喝(할)! : (할을 한 번 크게 외치시고) &amp;lt;/br&amp;gt;&lt;br /&gt;
完山七峰屹(완산칠봉흘) : 완산칠봉은 우뚝 솟아 있고 &amp;lt;/br&amp;gt;&lt;br /&gt;
寒碧樓水流(한벽루수류) : 한벽루 아래 강물은 흘러가는구나. &amp;lt;/br&amp;gt;&lt;br /&gt;
[[분류 : 비구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A4%EA%B3%A1%ED%98%9C%EC%88%9C(%E6%A2%85%E8%B0%B7%E6%85%A7%E6%B7%B3)&amp;diff=41045</id>
		<title>매곡혜순(梅谷慧淳)</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A4%EA%B3%A1%ED%98%9C%EC%88%9C(%E6%A2%85%E8%B0%B7%E6%85%A7%E6%B7%B3)&amp;diff=41045"/>
		<updated>2026-06-06T23:48: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Biguni: &lt;/p&gt;
&lt;hr /&gt;
&lt;div&gt;* '''법호·법명 : 매곡혜순(梅谷慧淳)'''&lt;br /&gt;
* '''생애·업적'''&lt;br /&gt;
매곡혜순(梅谷慧淳)선사는 학명계종(鶴鳴啓宗, 1867~1929)의 법사(法嗣, 제자)로 학명계종 선사와 함께 1938년 정읍 내장사를 중창한 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내장사는 원래 내장산에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영은사(靈隱寺)와 660년(백제 의자왕 20) 유해선사(幼海禪師)가 세운 내장사(內藏寺, '백련사(白蓮寺), '벽련암(碧蓮菴)'이라고도 전함)가 있었다. &amp;lt;/br&amp;gt;&lt;br /&gt;
1539(중종 34) 내장산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났다. '승도탁란사건'은 승과를 없애는 등 억불정책을 펼쳤던 중종이 승려들을 환속시켜 군적에 넣도록 한 것에 대해 호남지역 승려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했던 사건으로, 중종이 이에 크게 분노하여 내장사와 영은사를 도적의 소굴이라 칭하며 소각을 명함에 따라 불태워졌다. &amp;lt;/br&amp;gt;&lt;br /&gt;
1557년(명종 12) 희묵대사(熙黙大師)가 영은사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는데, 이곳이 현재의 내장사 전신이다. 정유재란 때 전소된 것을 1639년(인조 17) 부용대사(芙蓉大師)가 중수하고 불상을 도금했으며, 1779년(정조 3) 영운대사(暎雲大師)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했다. &amp;lt;/br&amp;gt;&lt;br /&gt;
1925년 학명선사(鶴鳴禪師)가 옛 내장사 자리인 벽련암으로 옮겨 벽련사라 하고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그러나 1938년 매곡선사(梅谷禪師)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77년까지 대규모 중건을 통해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매곡혜순(梅谷慧淳)선사 약력&lt;br /&gt;
**출생과 은사 이연(1902 ~ 1923)&lt;br /&gt;
출생: 1902년(광무 6년) 3월 10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속성은 정(鄭)씨로 아버지는 정인섭(鄭寅燮) 공이며 어머니는 영월 신씨입니다. &amp;lt;/br&amp;gt;&lt;br /&gt;
성장과 발심: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불교를 깊이 신앙하던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자랐습니다. 자비로운 성품으로 형제들을 잘 보살피던 막내아들이었으나, 세속의 욕망을 멀리하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원력을 세웠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출가: 21세가 되던 1922년(임술년), 고향을 떠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보련(寶蓮) 장로를 은사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을 혜순(慧淳)이라 하였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구족계 수지: 이듬해인 1923년 3월,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일봉(一鳳)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습니다.&lt;br /&gt;
&lt;br /&gt;
**참선 수행과 ‘매곡’ 법호 수지(1923 ~ 1929)&lt;br /&gt;
내전 연구: 출가 후 스님은 유점사 강원에서 불교 경전(내전)을 6년간 깊이 연구하셨습니다. 언제나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참선을 좋아했으며, 사념처관(四念處觀)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捨敎行禪(사교행선): 27세가 되던 1928년(무진년) 봄, 경전 공부를 접고 오직 참선에만 몰두하기 위해 남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 명산을 돌며 고승들을 참문(參問)하였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학명 선사 친견: 28세가 되던 1929년(기사년) 2월, 호남의 명찰인 내장사(內藏寺)에서 당대의 위대한 선지식이었던 학명(鶴鳴) 선사를 친견하였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깊이 통해 학명 선사로부터 인가(認可)를 받고 매곡(梅谷)이라는 법호를 받으며 입실(入室) 제자가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내장사 중창과 선농불교 실천(1930년대 ~ 1945)&lt;br /&gt;
내장사 7차 중창주: 이후 10여 년 동안 교학과 실천(理事)을 함께 닦으며 수행에 힘써 큰스님의 지위(법계 대종사)에 올랐습니다. 내장사 주지를 3기(三期) 연임하는 동안, 허물어져 가던 법당과 협소한 요사채를 대대적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특히 1938년에는 사찰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며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여, 오늘날 내장사의 기틀을 닦은 ‘제7창 중창주’로 기록되었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선농병행(禪農倂行)의 모범: 스님은 백양사와 내장사에서 강조되던 선농불교(수행하며 일하는 전통)를 직접 실천하기 위해, 내장사 인근 쌍암리에 농원을 설치했습니다. 스님을 따르는 대중들이 스스로 노동하여 식량을 조달하는 자급자족의 수행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lt;br /&gt;
&lt;br /&gt;
**해방 후 불교 재건과 교육 구국 운동(1946 ~ 1954)&lt;br /&gt;
종단 행정의 중책: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승단 조직이 개편되자, 45세가 되던 1946년(병술년) 봄에 불교중앙총무원 교무부장에 취임하여 해방 공간의 불교 재건에 나섰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전북 불교의 수장: 이어 전북불교교무원장(현 교구본사 주지급)으로 추대되어 전라북도 내의 사찰들을 총괄 통리하였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현대식 교육 기관 설립: 인재 양성이 곧 구국이라는 신념으로 재단법인 전북교원(全北敎園)을 조직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김제 금산중학교와 금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평생의 전력을 다했습니다. (※ 정읍 지역의 영생학원 설립 등에도 깊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조계종 및 동국대 이사: 1954년(갑오년) 3월에는 다시 불교중앙총무원 총무부장과 동국대학교 재단이사를 겸임하며, 종단 재단의 완성에 기여하고 일제강점기 왜정이 제정한 사찰령(寺刹令)의 폐단을 타파하는 등 불교 발전에 앞장섰습니다.&lt;br /&gt;
&lt;br /&gt;
**은거와 열반(1954 ~ 1955)&lt;br /&gt;
정혜사 은거: 1950년대 중반, 불교계 내부에 비구-대처 승단 간의 극심한 내분(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크게 한탄하며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전주 정혜사(定慧社)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참선에 몰두하셨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마지막 순간과 임종게: 1955년(을미년) 7월 23일, 홀연히 병을 얻어 몸이 불편해지자 목욕재계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상좌(제자)인 금파(錦波) 스님을 불러 아래와 같은 마지막 임종게를 남기셨습니다.&lt;br /&gt;
&lt;br /&gt;
*임종게(臨終偈)]&lt;br /&gt;
元來不知處(원래부지처) : 원래 머무는 곳을 알지 못했고&lt;br /&gt;
元來不知來(원래부지래) : 원래 오는 것도 알지 못했으며&lt;br /&gt;
不知去(부지거) : 가는 것 또한 알지 못하네.&lt;br /&gt;
畢竟如何(필경여하) : 필경에 이것이 어떠한가?&lt;br /&gt;
喝(할)! : (할을 한 번 크게 외치시고)&lt;br /&gt;
完山七峰屹(완산칠봉흘) : 완산칠봉은 우뚝 솟아 있고&lt;br /&gt;
寒碧樓水流(한벽루수류) : 한벽루 아래 강물은 흘러가는구나.&lt;br /&gt;
[[분류 : 비구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Biguni</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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