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현판 이야기
주요 이야기
수원 화성 4대문과 건축물에 걸려있는 현판의 내력을 알고 현판을 보면 그 당시의 역사를 새롭게 알 수 있게 된다. 수원 화성 정문인 장안문, 팔달문, 동북각루 현판글씨는 조윤형(1725-1799)이 썼다. 조윤형은 당대의 명필이었고 특히 조선 정조가 그의 글씨를 좋아하여 수원 화성 뿐만 아니라 화성 행궁의 여러 건물 현판 글씨를 썼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당시에 폭격으로 부서져서 1970년대 새로 써서 걸었고, 동북각루 현판글씨는 1940년대 까지는 조윤형의 해서체 글씨가 걸려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현재 걸려있는 것은 1956년 김기승이 행서체로 쓴 글씨이다.[1]
동북각루의 현판명인 '訪華隨柳亭'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는 뜻으로, 訪花는 송(宋) 나라 정호의 시 「춘일우성」의 “엷은 구름에 산들바람 정오가 가까운 때, 꽃 찾아 버들 따라 앞 개울을 건너노라.(雲淡風輕近午天 傍花隨柳過前川)”라는 구절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隨柳는 버드나무가 많아 ‘유천’(柳川)이라 불렸던 수원천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팔달문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조선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권177에 나온다. "팔달문은 산의 이름이 팔달이므로 문도 팔달이라고 하여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이는 곳이다.(八達門 山名八達門亦號八達 四通八達舟車之會也)"라고 하였다.[2]
화서문 글씨는 수원 화성 축성당시 총 책임자였던 총리대신 채제공(1720-1799)의 글씨이고 북수문의 현판글씨는 유한지(1760-미상)가 예서체로 쓴 것으로 홍수로 두 번이나 누각이 무너졌지만 현판만은 살아남았다. 창룡문 글씨는 유언호(1730-1796)가 썼는데 현재 글씨는 1970년대 복원당시 쓴 것으로 보인다.[3]
동장대 현판은 『화성성역의궤』 재용 편에 기록은 있지만 누가 글씨를 썼는지, 실제 걸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화성유수를 역임했던 민승호가 1873년 경 '鍊武臺'라고 써서 붙였다고 한다. 팔달산 위 서장대에 걸려있는 현판은 조선 정조의 글씨이며 서남각루 현판의 華陽樓 글씨는 조선 정조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추정된다.[4]
주요 노드
- 수원 화성 : 화성은 조선시대 수원부(화성)의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1789년(정조 13) 수원을 팔달산 아래 지금 자리로 옮기고, 5년 후에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에 성곽을 완성하였다.
- 화서문 : 화성의 서쪽 출입문이다.
- 장안문 : 화성의 북쪽 정문이다.
- 창룡문 : 화성의 동쪽 성문이다.
- 팔달문 : 화성의 남쪽 정문이다.
- 북수문 : 화성 북쪽 대천(大川)의 물이 성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 서남각루 : 화성 서남쪽 요충지에 세운 각루이다.
- 동북각루 : 화성 남쪽의 조망이 뛰어난 요충지에 지은 각루이다.
- 동장대 :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이다.
- 서장대 :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네트워크 그래프(지식관계망)
가상현실
주석
- ↑ 한정규, 수원화성 현판을 보며 여행하는 것도 좋아요, 『e수원뉴스』, 작성일: 2017년 5월 19일.
- ↑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57 보물 제402호 팔달문(八達門), 『경인일보』, 작성일: 2016년 8월 9일.
- ↑ 한정규, 수원화성 현판을 보며 여행하는 것도 좋아요, 『e수원뉴스』, 작성일: 2017년 5월 19일.
- ↑ 한정규, 수원화성 현판을 보며 여행하는 것도 좋아요, 『e수원뉴스』, 작성일: 2017년 5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