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혜빈 가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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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영조 20)에 1월에 왕세자([[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영풍부원군(永豐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딸(1735~1815, 1762년 [[혜빈(惠嬪)]]에 봉해짐)을 빈으로 맞는 과정을 기록한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思悼世子嘉禮都監儀軌)]]』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1743년(영조 19) 8월부터 세자빈 간택이 시작되어 9월 29일 초간택, 10월 28일 재간택을 거쳐 11월 13일 삼간택에서 뽑힌 신부는 같은 날 별궁인 어의궁(於義宮)으로 나아갔다. 이어 별궁에서 납채·납징·고기·책빈 과정을 거친 후 이듬해 1월 11일 친영의식과 동뢰연을 치렀다. 도감에서는 1월 6일 왕세자빈이 별궁에서 궐로 나아가는 반차도를 전례(前例)에 따라 그려서 [[영조(英祖)]]에게 올렸다. 즉 반차도는 세자빈이 별궁에서 친영의식을 치른 후 동뢰연을 위해 대궐로 나아갈 때의 행렬을 순서대로 그린 것이다. 당시의 반차도는 의식 절차 전반을 관장한 도감 일방에서 제작되었다. | 1744년(영조 20)에 1월에 왕세자([[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영풍부원군(永豐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딸(1735~1815, 1762년 [[혜빈(惠嬪)]]에 봉해짐)을 빈으로 맞는 과정을 기록한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思悼世子嘉禮都監儀軌)]]』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1743년(영조 19) 8월부터 세자빈 간택이 시작되어 9월 29일 초간택, 10월 28일 재간택을 거쳐 11월 13일 삼간택에서 뽑힌 신부는 같은 날 별궁인 어의궁(於義宮)으로 나아갔다. 이어 별궁에서 납채·납징·고기·책빈 과정을 거친 후 이듬해 1월 11일 친영의식과 동뢰연을 치렀다. 도감에서는 1월 6일 왕세자빈이 별궁에서 궐로 나아가는 반차도를 전례(前例)에 따라 그려서 [[영조(英祖)]]에게 올렸다. 즉 반차도는 세자빈이 별궁에서 친영의식을 치른 후 동뢰연을 위해 대궐로 나아갈 때의 행렬을 순서대로 그린 것이다. 당시의 반차도는 의식 절차 전반을 관장한 도감 일방에서 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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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차도는 행렬의 구성과 면수는 1727년(영조 3)에 있었던 효장세자(孝章世子) 가례 때의 반차도와 동일하다. 또한 규장각 소장 분상용 의궤 반차도의 면수 및 구성과 같으나 도장을 쓰지 않고 손으로 그려서 완성하였다. 상들은 밑본을 대고 그린 것처럼 크기가 균일하며 화면이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어 어람을 위해 정성껏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교명·죽책·옥인·명복을 모신 요여들은 직사각형의 단면으로 묘사하고 세자빈의 가마는 입체형으로 묘사하여 차이를 두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송희)[http://www.museum.go.kr/uigwe/banchado/banchaView?dataType=&id=uig_157&searchKeyword=&pageIndex=3&lmenuType=a&pageUnit=10] | 이 반차도는 행렬의 구성과 면수는 1727년(영조 3)에 있었던 효장세자(孝章世子) 가례 때의 반차도와 동일하다. 또한 규장각 소장 분상용 의궤 반차도의 면수 및 구성과 같으나 도장을 쓰지 않고 손으로 그려서 완성하였다. 상들은 밑본을 대고 그린 것처럼 크기가 균일하며 화면이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어 어람을 위해 정성껏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교명·죽책·옥인·명복을 모신 요여들은 직사각형의 단면으로 묘사하고 세자빈의 가마는 입체형으로 묘사하여 차이를 두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송희)[http://www.museum.go.kr/uigwe/banchado/banchaView?dataType=&id=uig_157&searchKeyword=&pageIndex=3&lmenuType=a&pageUnit=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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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3일 (수) 18:59 판
주요 이야기
1744년(영조 20)에 1월에 왕세자(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영풍부원군(永豐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딸(1735~1815, 1762년 혜빈(惠嬪)에 봉해짐)을 빈으로 맞는 과정을 기록한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思悼世子嘉禮都監儀軌)』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1743년(영조 19) 8월부터 세자빈 간택이 시작되어 9월 29일 초간택, 10월 28일 재간택을 거쳐 11월 13일 삼간택에서 뽑힌 신부는 같은 날 별궁인 어의궁(於義宮)으로 나아갔다. 이어 별궁에서 납채·납징·고기·책빈 과정을 거친 후 이듬해 1월 11일 친영의식과 동뢰연을 치렀다. 도감에서는 1월 6일 왕세자빈이 별궁에서 궐로 나아가는 반차도를 전례(前例)에 따라 그려서 영조(英祖)에게 올렸다. 즉 반차도는 세자빈이 별궁에서 친영의식을 치른 후 동뢰연을 위해 대궐로 나아갈 때의 행렬을 순서대로 그린 것이다. 당시의 반차도는 의식 절차 전반을 관장한 도감 일방에서 제작되었다.
이 반차도는 가례의식 후 제작된 6건의 의궤 중 어람용 의궤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가례 반차도는 보통 의궤 맨 뒤에 수록되는 데 반해 이 의궤에서는 예외적으로 일방 의궤 뒤에 수록되어 있다. 행렬은 세자빈 책봉 때 받은 교명·죽책·옥인·명복을 요여에 모시고 의장이 좌우에 도열한 가운데 예물을 지거나 손에 든 각종 짐꾼을 앞세우고 신부의 연(輦)이 나아가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신부 연 앞에는 초롱을 밝히고 향을 피웠으며 앞뒤와 좌우에는 금군과 내관, 별감, 시녀들이 배위하였고 세자 담당 관서인 시강원과 익위사 관원, 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들이 따랐다. 전체 행렬 앞뒤에는 병조의 지침대로 훈련도감 군병 200명이 반으로 나뉘어 배위(陪衛)하였다.
이 반차도는 행렬의 구성과 면수는 1727년(영조 3)에 있었던 효장세자(孝章世子) 가례 때의 반차도와 동일하다. 또한 규장각 소장 분상용 의궤 반차도의 면수 및 구성과 같으나 도장을 쓰지 않고 손으로 그려서 완성하였다. 상들은 밑본을 대고 그린 것처럼 크기가 균일하며 화면이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어 어람을 위해 정성껏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교명·죽책·옥인·명복을 모신 요여들은 직사각형의 단면으로 묘사하고 세자빈의 가마는 입체형으로 묘사하여 차이를 두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송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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