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의 활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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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연구자)
(독립협회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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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 독립협회를 신처럼 떠받는다. 시민사회의 원형으로 독립협회를 바라봤다. <font color="FFEB5A"><big>'''킹갓세인트독립협회'''</big></font>.
 
*신용하 : 독립협회를 신처럼 떠받는다. 시민사회의 원형으로 독립협회를 바라봤다. <font color="FFEB5A"><big>'''킹갓세인트독립협회'''</big></font>.
 
*주진오 : 독립협회를 매판적 근왕적이라 비판한다. 독립협회를 일종의 부르주아 개혁 세력으로 그들이 가진 한계에 주목했다. <font color="B9062F"><big>'''모두까기'''</big></font>.
 
*주진오 : 독립협회를 매판적 근왕적이라 비판한다. 독립협회를 일종의 부르주아 개혁 세력으로 그들이 가진 한계에 주목했다. <font color="B9062F"><big>'''모두까기'''</big></font>.
*[곽금선] : 「1898년 독립협회의 정치기획과 忠君愛國」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font color="#04B404"><big>'''''독립협회 오타쿠'''''</big></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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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금선]] : 「1898년 독립협회의 정치기획과 忠君愛國」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font color="#04B404"><big>'''''독립협회 오타쿠'''''</big></font>.
  
 
=='''스토리'''==
 
=='''스토리'''==

2019년 8월 9일 (금) 10:45 판

주제

정의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설립된 정치단체이다. 문명개화를 표방하였다. 1898년 고종과 대립하던 가운데 해산조칙에 의해 해체되었다.

주요인물

독립협회

  • 이완용 : 독립협회 초대 회장. 친일파의 알파이자 오메가.
  • 서재필 : 독립신문 초대 주필로 독립협회의 창립부터 간여하였다. 미국인.
  • 윤치호 : 서재필이 미국으로 귀국한 이후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1897년 5월 이후 사실상 독립협회를 이끌었다. 앞과 뒤가 다른 사람.
  • 안경수 : 박영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로 독립협회 내의 급진적 세력을 대변했다. 급진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1]
  • 현덕호 : 1898년 3월 만민공동회 당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미전상인 출신으로 이후 황국협회에 가입하였다.
  • 박성춘 : 1898년 10월 관민공동회에서 개막 연설을 맡았다. 백정이었으나 속량하고 양민이 된 인물이다.

독립협회 연구자

  • 신용하 : 독립협회를 신처럼 떠받는다. 시민사회의 원형으로 독립협회를 바라봤다. 킹갓세인트독립협회.
  • 주진오 : 독립협회를 매판적 근왕적이라 비판한다. 독립협회를 일종의 부르주아 개혁 세력으로 그들이 가진 한계에 주목했다. 모두까기.
  • 곽금선 : 「1898년 독립협회의 정치기획과 忠君愛國」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독립협회 오타쿠.

스토리

활동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이 사실상의 기관지로 역할하였다.

1897년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같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조선의 독립을 알리고자 하였다.

창립 초기 고위관료의 사교클럽의 성격이 강했지만 1897년 8월을 기점으로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898년에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와 한러은행 설립 등에 반대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다수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중추원의 의회 전환(의회설립), 노륙법 반대 등을 주장하였다.

10월 관민공동회를 통해 헌의 6조와 조칙 5조를 이끌어 냄에 따라 이전까지 자신들이 주장하던 대부분의 정치적 사안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하는 이른바 익명서 사건이 발생하며 주요인사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모든 협회를 혁파하라는 조칙에 따라 독립협회, 황국협회 등의 모든 단체가 해체되고 만다. 이는 곧 11월 만민공동회로 이어졌다. 11월 만민공동회는 종로를 무대로 20일 이상 지속되며 독립협회의 복설 등을 주장했다.

고종은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는데, 이때 동원된 것이 보부상이 기반이 되었던 황국협회였다. 두 단체는 서소문과 공덕동 등지에서 충돌했는데, 결국 독립협회가 승리했다. 11월 22일 독립협회의 복설을 명하는 조칙과 함께 법률 제2호로 「依賴外國致損國體者處斷例」가 반포되며 독립협회의 정치투쟁이 끝내 승리하게 된다.

해체과정

11월 26일 고종은 효유를 통해 만민공동회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말하며 그때까지의 집회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약속은 좀처럼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이에 반발한 또 다른 만민공동회의 개최를 불러왔다. 그런데 이때를 즈음하여 중추원 내에서 박영효를 내각에 입각시키는 투표 결과가 나왔다. 박영효는 당시 역모의 혐의를 받고 일본에서 망명중이었는데, 박영효가 중추원에서 추천되었다는 사실은 이때까지 그들이 주장하고 있었던 충군이 허명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에 여론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불리하고 돌아갔고, 도약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탄핵상소에 따라 12월 25일 만민공동회 해산을 지시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이후 독립협회 또한 자연스레 해체되었고 1898년 동안의 정치투쟁 역시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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