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檜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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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의 대표적인 왕실원당으로, 경기도 양주시천보산에 위치한 절.

개설

회암사(檜巖寺)는 경기도 양주시천보산(天寶山)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세기 선종 사찰이었음이 확인되며 고려말 나옹혜근(懶翁慧勤)의 중창을 거쳐 사세가 확대되었다. 특히 지공, 혜근, 자초의 부도와 비석이 나란히 조성되어 여말삼사(麗末三師)의 법통을 상징하는 사찰이기도 했다. 조선초 태조의 행궁으로서도 기능하였으며, 조선전기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자 왕실로부터 대대적인 후원을 받는 사찰이었다. 조선후기 점차 쇠퇴하여 현재는 절터만 남았다.

연원 및 특징

회암사의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늦어도 12세기에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174년(고려 명종 4)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를 방문하여 남루(南樓)와 소루(小樓)에 걸려 있던 원경(圓鏡) 국사(國師)의 글씨를 감상했다는 『보한집(補閑集)』의 내용이 회암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고려후기가 되면 회암사와 관련된 기록이 증가하는데, 14세기 회암사는 선종 소속이었다. 1313년(고려 충숙왕 5) 태고보우(太古普愚)가 회암사에서 출가하였고, 나옹혜근은 회암사에서 수행하던 중 원나라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고려말 회암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370년(고려 공민왕 18) 지공(指空)의 유골을 회암사에 봉안하면서부터인데, 지공의 법통을 계승한 혜근이 회암사에 와 지공의 부도를 세우고 지공의 영골을 안장하였다. 1371(고려 공민왕 19) 왕사에 임명된 혜근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 회암사 중수 공사를 시작하였고, 1376년(고려 우왕 2)에는 회암사 낙성식이 문제가 되어 혜근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밀양영원사(瑩原寺)로 내려가던 중 입적하였다.

혜근의 중수 이후에도 조선전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회암사가 중창되었으나 혜근이 중창했던 당시의 배치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아서 현전하는 절터의 배치는 이색(李穡)이 찬술한 「회암사중창기(檜巖寺重創記)」에 구체적으로 설명된 가람 배치와 거의 일치한다. 회암사 중창은 지공의 수기(授記)에 따라 이루어졌고, 인도의 날란다사가 모델이었다고 전하나 이는 후대 지공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명일 가능성이 크며, 오히려 혜근이 중창한 회암사의 가람 배치는 중국 강남 지역 선찰(禪刹)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혜근 입적 후 왕명으로 회암사에 혜근의 비석과 부도가 조성되었고, 조선 태종대 무학자초(無學自超)의 비석과 부도가 조성되면서 회암사는 지공, 나옹, 무학의 법통을 상징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조선전기

태조는 조선 건국 초기에 회암사 주지 자초를 왕사로 임명하였다. 태조는 자초와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는데,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로 인해 태조대 회암사는 높은 위상을 유지하였으며, 태조는 즉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회암사에 거둥하기도 하였다. 특히 1397년(태조 6) 자초의 부도를 미리 회암사에 조성하게 하였다(『태조실록』 6년 7월 22일). 태상왕이 된 뒤에는 회암사에 여러 차례 전지를 시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회암사를 중수하고 궁실을 지어(『태종실록』 2년 6월 9일) 회암사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태종실록』 2년 8월 2일).

1406년(태종 6) 태종은 사찰의 전지와 노비의 숫자를 정하고, 공인된 수 외에는 모두 속공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파별로 공인 사찰의 숫자를 정하였다. 이때 회암사는 예외로 하여 오히려 전지 100결과 노비 50구를 더 지급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이러한 회암사에 대한 특별 조처는 회암사가 뜻이 있는 승려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회암사에 자주 거동하며 행궁으로 삼고 있던 태상왕 태조에 대한 배려의 성격도 강하였다.

세종대에도 국가에서는 회암사를 불교의 수법도량(修法道場)으로 여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세종실록』 1년 11월 28일) 왕실의 천도재를 설행하는 주요 도량으로 기능하였다. 그리하여 1424년(세종 6) 불교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각각 18개씩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할 때 회암사는 선종 사찰로 공인되었다. 당시 회암사에는 500결의 전지가 있었고, 절에 거주할 수 있는 중은 250명이었다고 하는데, 36개의 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전지와 거주 승려가 있어(『세종실록』 6년 4월 5일), 당시 가장 큰 사찰이었음이 확인된다.

1431년(세종 13)에는 명나라 사신이 가지고 온 불경을 회암사에 보관하게 하였고(『세종실록』 13년 9월 2일), 1434년(세종 16)에는 회암사 중수를 시작하였다(『세종실록』 16년 4월 10일). 당시 회암사 보광전(寶光殿)에는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수불(繡佛)이 있었는데, 전각이 너무 낡아 종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시주를 받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던 것으로 보이며(『세종실록』 16년 4월 11일), 이 중수에는 효령대군이 참여하고 있었다(『세종실록』 16년 4월 13일). 또한 낙성식을 성대하게 치렀는데, 회암사 중수와 관련된 일련의 불사에 대해 신료들의 비판이 비등하였다. 효령대군을 비롯한 왕실의 회암사에 대한 후원으로 인해 회암사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회암사를 찾았는데, 특히 부녀(婦女)의 사찰 왕래는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었다(『세종실록』 27년 4월 22일).

1464년(세조 10)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베풀었던 원각법회(圓覺法會)에서는 감로(甘露)가 내리고 사리가 분신하는 이적이 있었다(『세조실록』 10년 5월 2일). 이러한 이적 현상은 세조대의 왕권 강화와 관련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대왕대비의 명으로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는데, 이때의 중창과 관련해서는 김수온(金守溫)의 문집인 『식우집(拭疣集)』에 중창기가 전하고 있어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공사는 성종대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세조의 유명(遺命)으로 하성공주(河城公主)가 주관하고 대비가 도와 진행되었다고 한다(『성종실록』 6년 3월 7일).

성종대에 회암사에 속한 전지에 대해 세(稅) 외의 다른 부역은 모두 면제해 주는 특혜를 내렸고(『성종실록』 13년 12월 19일), 왕실 재정을 관리했던 내수사(內需司)가 관리 감독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5년 12월 17일).

회암사는 연산군 후반 폐불에 필적하는 상황에서도 절이 유지가 되었고, 중종대에도 여전히 왕실원당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어, 회암사에서 내지(內旨)를 받아 크게 열었던 도량이 신료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중종실록』 19년 6월 17일). 1549년(명종 4)에는 능침사에서 소란을 피운 유생을 처벌하면서 회암사를 일러 태종대왕의 능침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회암사가 태종의 능침사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명종실록』 4년 9월 8일). 한편 명종대에 회암사는 원칙적으로는 능침사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명하고 큰 사찰이라는 이유로 모든 능의 기신재가 회암사에서 설행되었던 관계로(『명종실록』 11년 9월 3일) 금표가 설치되어 있었다(『명종실록』 11년 9월 4일). 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후원을 받은 보우(普雨)가 회암사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세자가 죽자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성대하게 열기도 하였다(『명종실록』 20년 4월 25일).

(2) 조선후기

회암사는 명종대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으나 이후 절이 불에 타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보우가 유배당한 뒤 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 6월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게 되자 회암사터에 있던 종을 녹여 화포를 주조하였는데(『선조실록』 28년 6월 4일) (『선조실록』 29년 1월 28일), 이때 회암사 종으로 화포를 만들자는 군기시(軍器寺)의 보고에서 옛터에 있는 종 역시 불에 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 회암사 중창 공사가 진행되어 1605년(선조 38)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신 어실(御室)을 조성하였고(『선조실록』 38년 6월 5일), 1626년(인조 4)에는 항산군(恒山君)이정(李楨)이 시주가 되어 회암사에서 불사(佛事)를 크게 벌인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4년 윤6월 20일) (『인조실록』 29년 1월 28일). 이후 회암사와 왕실 혹은 종친과의 관계는 확인되지 않으며, 회암사는 점차 폐사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다만, 1821년(순조 21) 광주(廣州)유학(幼學)이응준(李膺峻)이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 그곳에 자신의 아버지를 묻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세 개의 비석 중 자초의 비석은 태종의 왕명으로 지어 세운 것이어서, 이응준의 행위는 임금이 지은 글을 훼손한 죄에 해당하여 그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기도 하였다(『순조실록』 21년 7월 23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보한집(補閑集)』
  • 『목은집(牧隱集)』
  •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 『식우집(拭疣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허흥식,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 일조각, 1997.
  • 회암사지박물관, 『묻혀 있던 고려말·조선초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그 위용을 드러내다』, 회암사지박물관, 2012.
  •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지박물관, 2012.
  • 강호선, 「고려말 나옹혜근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 남동신, 「여말선초 나옹 현창 운동」, 『한국사연구』165, 2007.
  • 한지만·이상해,「회암사의 연혁과 정청·방장지에 관한 복원적 연구」, 『건축역사연구』1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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