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지전(稷山之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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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9월 정유재란 당시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소사평(素沙坪, [소사벌])에서 벌어진 명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개설

일본은 명과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7월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명 역시 원병을 파견하여 조선의 영토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한다. 도성을 향해 북상하던 일본군은 점차 충청지역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명에서 파견된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양호(陽鎬)는 급히 군사를 파견하여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다. 명군은 천안의 소사(素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일본군의 북상 계획은 좌절되었다.

역사적 배경

명과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조선은 전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근거하여 절강병법(浙江兵法)을 도입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였다. 훈련도감에서는 총기를 다루는 포수(砲手)·활을 다루는 사수(射手)·창검을 다루는 살수(殺手) 등의 삼수병을 조련시켰다. 또 조총(鳥銃)을 비롯한 화기를 제작하였다. 방어체계도 국지전에 유리한 제승방략(制勝方略)에서 전면전에 유리한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전환하였다. 또 각종 세금을 쌀로 내게 하는 공물작미법의 실시, 둔전(屯田)의 개간과 염전(鹽田)의 운용, 공명첩(空名帖)의 발행 등을 통해 군량미 확보에도 노력하였다.

한편 명은 강화교섭이 진행되면서 군사를 요동 지역으로 철수시켰다. 하지만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5월 다시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7월에는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처럼 일본군이 다시 침략한 정유재란 때에는 조선이 전열을 정비한 후였고, 명 역시 신속하게 군사를 파견하였다. 때문에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할 수 있었다.

발단

1597년 8월 29일 일본군은 전주를 출발하여 충청도로 진격하였다. 모리수원(毛利秀元)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거느린 군사는 공주를 거쳐 진천, 흑전장정(黑田長政)이 거느린 군사는 직산에 이르렀다.

일본군이 북쪽으로 향하자 선조는 명의 경리양호에게 여러 차례 일본군을 막기 위해 명군의 출격을 요청하였다. 양호는 선조의 뜻을 받아들여 제독(提督)마귀(馬貴)에게 출전을 명했고, 부총병(副摠兵)해생(解生), 참장(參將)양등산(揚登山), 유격장(遊擊將)우백영(牛伯英)과 파귀(頗貴) 등도 남쪽으로 향했다.

경과

9월 7일 명의 부총병 해생이 거느린 명군은 직산 남쪽에 진영을 구축하였다. 명군은 북상하던 일본군을 만났지만 흰옷을 입고 있어 조선인으로 생각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전투는 일본군이 먼저 조총을 발사하여 명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명군과 일본군이 혼전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명의 유격장파새(擺賽)가 거느린 기병 2,000여 기가 도착하였다. 원군이 도착하자 명군은 세 방향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여섯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명군은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직산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500~600여 명이었으며, 명군은 일본군의 수급 30여 개를 베었다(『선조실록』 30년 9월 9일).

남원을 함락시킨 후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직산 전투에서 패한 후 경기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하였다. 이후 왜성을 건축하고 장기농성 태세에 돌입하였다. 명군은 직산 전투의 승리를 평양성 전투, 행주산성 전투와 함께 조선 3대전으로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집문당, 2008.
  • 이형석, 『임진전란사』중, 신현실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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