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마수(齊馬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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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지른 관원에게 말고삐를 쥐고 말머리와 나란히 가게 함으로써 모욕을 주는 관청의 벌. 또는 사마시 합격자가 행하는 하나의 관례.

개설

제마수(齊馬首)는 글자 그대로 말머리와 나란히 한다는 뜻인데,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타고 가는 상황일 때는 동항(同行)의 의미를 갖고, 한 사람이 말을 몰고 갈 때는 행제마비(行齊馬轡), 즉 노비처럼 말고삐를 쥐고 말머리와 나란히 간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모욕감을 주는 벌의 종류임을 나타낸다. 회마수(回馬首)는 두 사람이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말을 타고 오다가 서로 만나면 벼슬자리가 낮은 사람이 말머리를 돌려 길을 비켜서는 것을 말한다. 양반들의 통행 수단이 주로 말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예의와 풍속이 생겨났다.

제마수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난 벌칙이지만 쓰임에 따라 ①잘못을 저지른 관원에게 말고삐를 쥐고 말머리와 나란히 가게 함으로써 모욕을 주는 관청의 벌, ②생원·진사 입격자 중 재력이 있는 집에서 장원한 자와 동항으로 유가(遊街)하는 조건으로 입격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베푸는 잔치, ③향촌에서 향약을 어긴 상계원(上契員)에게 말머리와 나란히 가게 하여 모욕을 주거나 아니면 이를 대신하여 계원들에게 음식 등으로 향응을 베풀게 하는 벌 등으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졌다. 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의미는 첫 번째에서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추관지』「잡의(雜儀)」 중 낭관청헌이란 항목에 "정랑과 좌랑이 길에서 만나면 좌랑이 말을 피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예의를 담당한 서리가 공사를 담당한 정랑에게 고하여 말머리와 나란히 나아가게 한다."라고 하였고, "공식적인 모임에서 정랑이 들어온 다음 좌랑이 뒤늦게 들어왔을 때 그 날로 말머리와 나란히 나아가게 한다.[馬頭齊進]"고 하였다.

걷는 사람을 말머리와 나란히 나아가게 하는 것은 말몰이꾼처럼 행동하게 하여 수치감을 주기 위해서다. 향촌 공동체에서 제마수라는 벌을 내릴 때는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대개는 제마수연(齊馬首宴)이라고 하여 이를 음식 향응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연원 및 변천

제마수 벌칙은 이미 조선초기에 관청에서 행해졌다. 1407년(태종 7) 11월 25일에 삼관(三館), 즉 성균관·예문관·교서관 유생들이 의정부에 잡과 출신자들과의 차이를 인정해 달라고 건의한 기사 내용의 일부다. "제원(諸員)이 까닭 없이 한 번 불참한 자는 치부(置簿)하여 과(過)를 기록하고, 두 번 불참한 자는 벌로서 가볍게 제마수를 행하고, 세 번 불참한 자는 중하게 제마수를 행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권학하는 훌륭한 방법입니다"(『태종실록』 7년 11월 25일). 이 기사에서는 위의 세 가지 정의 중 두 번째나 세 번째 정의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다음의 중종 때와 명종 때의 기사는 제마수에 관한 두 번째 정의, 즉 재력이 있는 집 출신의 입격자가 장원한 자와 말머리를 같이하고 유가하는 조건으로 함께 입격한 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베푸는 잔치의 사례다. 1535년(중종 30) 3월 19일에 조정을 비방한 신급제자 유경인(柳敬仁)과 진우(陳宇)의 공초(供招) 내용 중 "진우가 사적으로 장임중이란 자를 다그쳐 허항(許沆)의 하인 집에서 거의 예닐곱 번에 이르도록 벌례연을 행하였고, 후에 이로 해서 함께 입격한 자들끼리 행하는 제마수연 행사를 면하였으니 사풍(士風)에 크게 관계된다."(『중종실록』 30년 3월 19일)는 기사는 과거와 관련한 제마수연 관행을 나타낸다.

다음날, 즉 1535년(중종 30) 3월 20일에 대사헌허항 등이 유경인 등의 일에 자신들이 연루된 것을 해명하면서 자신이 홍문관의 관원으로 있을 때 동료들 간의 사습(士習)으로 처음 생원이 되면 제마수연을 방중(榜中)의 집에서 베푸는 것이 상례였다고 하였다(『중종실록』 30년 3월 20일).

1548년(명종 3) 2월 12일의 기사에도 덕응이란 사람의 신은(新恩), 즉 처음 과거 급제 때 그 집에서 제마수를 행한다기에 그의 집에 한 번 갔다 왔을 뿐이라고 하여 이것 역시 과거 급제자들 간에 행해졌던 향응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명종실록』 3년 2월 12일).

정극인(丁克仁)의 『불우헌집』 권1에는 태인현에 사는 유학자들에게 부치는 시 「기태인제유(寄泰仁諸儒)」가 있다. 그 중에 "유서 깊은 고을에서 제마수를 행하는 것은 서로의 나이를 잘 모르기 때문[古縣宜乎齊馬首 人問甲子誤相知]"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대해 이재(頤齋)황윤석(黃胤錫)은 "생원·진사 입격자 발표가 나면 그 중 세력과 재력이 있는 집을 택하여 함께 입격한 자들에게 음식을 베풀게 하고 거리를 돌 때 장원과 나란히 하게 하는 것을 제마수라 불렀다.[每生員進士之新榜也 必擇其中家力有裕者 使之供饌同榜人 出街得與壯元並行 故稱以齊馬首]"라고 주를 달았다.

『성호선생전집』 권65에 좌의정춘성부원군남공묘지명(左議政春城府院君南公墓誌銘), 즉 남이웅(南以雄)의 묘지명이 실려 있다. 남이웅은 의령남씨 집안으로 1575년(선조 8) 3월 25일에 태어났다. 1606년(선조 39)에 진사 시험에 일등을 하여 잔치를 열었는데 속칭 이것을 제마수회(齊馬首會)라고 하였다고 한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1741년(영조 17) 2월 14일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제마(齊馬), 즉 말머리를 같이하는 것이나 회마(回馬), 즉 말머리를 돌리는 것 등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예의의 기준임을 알 수 있다. 즉 의정부의 관속이 "종신은 대신과 말머리를 나란히 할 수 없다[宗臣不可與大臣齊馬首]"라고 하자 종신이 이에 반발한 것이나, 교자(轎子)를 멈추고 근신하자 말머리를 돌려 길을 양보하였다는 등의 내용이 그러하다. 즉 제마수는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동급(同級), 또는 동항의 의미로, 또는 굴욕의 의미로, 나아가서는 굴욕을 행하는 대신 베푸는 향응이란 뜻으로 변형되어간 것이다.

참고문헌

  • 『추관지(秋官志)』
  • 『불우헌집(不憂軒集)』
  • 『성호선생전서(星湖先生全書)』
  • 김용덕, 『향청연구』, 한국연구원, 1978.
  • 정구복, 「고문서 용어풀이 -제마수(齊馬首), 손도(損徒)-」, 『고문서연구』5, 1994.
  • 정승모, 「조선후기 지역사회구조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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