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磁器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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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2월 4일 (목) 16:1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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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자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여 국가에 납부했던 행정단위.

개설

자기소(磁器所)는 자기(磁器)를 생산하던 소(所)이다. 소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각종 수공업품이나 광산물·수산물·농산물 등을 생산하던 행정단위이다. 자기를 사기(沙器)로 부르는 것처럼 자기소 역시 사기소(沙器所)로 부르기도 했다. 전국에 산재해 있던 자기소에서는 자기를 만들어 국가에 공납했다. 조선 15세기에는 전국에 139개의 자기소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자기소 이외에 전국 185곳에 도기를 생산하여 국가에 납부했던 도기소(陶器所)가 있었다.

자기소는 조선시대 도자사(陶瓷史)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고고학 조사를 통한 실증적인 접근이 가능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자기소는 자기를 생산하여 국가에 공납하던 곳이었다. 기록에는 자기소보다는 주로 사기소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재된 자기소는 전국에 139개소인데 경기도에 14곳, 충청도에 23곳, 경상도에 37곳, 전라도에 31곳, 강원도에 4곳, 황해도에 12곳, 평안도에 13곳, 함길도에 5곳이 있었다. 전국의 자기소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 그리고 무품(無品)으로 구분되었다. 139개의 자기소 중 상품으로 구분된 곳은 경상도 상주에 2곳, 고령에 1곳 그리고 경기도 광주에 1곳 등 총 3지역 4곳에 불과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광주목],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고령현].

자기소는 모든 군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성종실록』 19년 7월 12일). 조선전기에 운영된 가마들 중에는 자기소로 등재되지 않고 그릇을 생산한 가마도 많았다. 그러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주로 그릇의 생산이 원활하고 만들어진 그릇을 도성으로 운송하기에 편리한 지역에 자리한 가마를 자기소로 등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기소는 주변에 자기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과 땔감이 풍부하고 질 좋은 원료가 구비된 곳에 자리했다. 또한 가마와 작업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에 들어섰다. 강원도 횡성(橫城) 등지의 자기소는 이러한 입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개국 초기에는 왕이 사냥이나 강무(講武)를 나가서 머무는 숙소로도 활용되었다(『세종실록』 1년 11월 5일), (『세종실록』 8년 2월 16일).

소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종 수공업품이나 광산물·수산물·농산물 등을 생산하던 곳이다. 만들어진 제품이나 생산물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왕실과 관청으로 납부하였다. 소는 향(鄕)이나 부곡(部曲)과 달리 고려시대 이후에 공물(貢物)의 확보를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는 생산되는 제품과 원료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자기소, 묵소(墨所), 탄소(炭所), 와소(瓦所), 염소(鹽所), 지소(紙所) 등으로 구분하였다.

소는 군(郡)과 현(縣)의 관할에 속하는 보통 마을 중에 수공업품이나 광물 원료를 생산해낼 수 있는 지역을 위주로 국가에 의해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소는 주로 제품과 원료의 생산과 취득이 수월하고 공납품을 도성으로 운송하기에 편리한 곳에 자리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소는 조운로(漕運路)를 이용하기 편리한 해안가나 강가에 자리하거나 중요한 도로 주변에 위치했다(『세조실록』 3년 1월 16일).

조선전기에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의 군현에서 사용되는 수공업품과 광물 원료의 생산을 담당했던 소들은 조선의 군현제도와 공납 제도가 완비됨에 따라 해체되기 시작하여 점차 군현으로 흡수되거나 일반 촌락으로 변화되었다.

변천

고려시대의 자기소는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대구소(大口所)와 전라북도 부안(富安) 혹은 부안(扶安)의 자기소가 있었다. 그 밖에 경기도 고양시 원흥동 일원에 자리했던 건자산소(巾子山所)도 자기소의 기능을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의 자기소는 주로 조선전기의 기록에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의 139개 자기소와 185개 도기소가 등재되었다. 그러나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토산물조에는 전국의 자기소가 32개로 줄어들었으며 4개의 사기소를 별도로 기록했다. 자기소와 사기소를 합쳐도 15세기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에 전국에 자리한 자기소를 통해 필요한 자기를 확보했던 조선 정부는 사옹원(司饔院)에서 필요한 자기를 얻었다. 사옹원은 1467년(세조 13)에 도성과 가장 가까운 상품 자기소였던 경기도 광주의 자기소를 관요(官窯)로 삼아 운영했다. 그러나 사옹원 주도로 궁궐의 그릇을 제작한 이후에도 광주에 자리했던 관영 백자 제작처의 명칭은 그대로 사기소로 언급되었다. 경기도 광주의 자기소가 관요로 운영된 이후에 전국의 자기소는 중앙에 납부할 그릇을 생산하는 대신 점차 각 지방의 수요에 부응하는 자기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 윤용이, 『韓國陶瓷史硏究』, 문예출판사, 1993.
  • 이정신, 『고려시대의 특수행정구역 所 연구』, 혜안,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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