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지승(梨峙之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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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8일 또는 8월 17일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출하는 일본군을 이치(배고개)에서 격퇴한 전투.

개설

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권율(權慄)과 동복현감(同福縣監)황진(黃進) 등이 지휘한 조선의 관군이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이 이끄는 일본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육전에서의 최초의 승리인 이치 전투의 승리 덕분에 조선은 일본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도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한성에 있던 소조천륭경은 충청도 금산(錦山)을 함락시킨 후 전라도 전주로, 안국사(安國寺)혜경(惠瓊)은 무주(茂朱)에서 진안(鎭安)으로 남하하여 전주로 향하였다.

발단

남원을 방어 중이던 권율은 일본군의 전라도 지역 진출을 막기 위해 웅치(熊峙)에 주둔 중인 조선군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전주성으로 향하기 위해 진산군(珍山郡: 현 충청남도 금산)과 고산현(高山縣: 현 전라북도 완주군) 경계의 이치로 접근하자, 이곳으로 옮겨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경과

소조천륭경이 거느린 일본군은 금산성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이치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권율과 황진은 부하장수 위대기(魏大奇)·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전투에서 황진은 일본군의 조총에 맞는 총상을 입었고, 일본군이 목책을 뚫고 조선군의 진으로 돌입하는 등의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권율의 독려로 전투를 이어갔고, 결국 조선군은 일본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치 전투는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고 기록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때문에 일본군은 조선에서의 3대첩의 하나로 이치 전투를 꼽기도 한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이치 전투에서 조선 관군에게 패한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으로의 진출에 실패했다. 반면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지켜낸 조선은 군량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논쟁점

이치 전투의 전개 과정은 여러 문헌을 통해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전투가 행해진 날짜가 언제인가 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이치 전투는 1592년(선조 25) 7월 8일 행해졌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선조수정실록』에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가 함께 수술되고 있는데(『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웅치 전투의 날짜가 7월 8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중잡록』의 다른 기록에 “20일에 왜군이 금산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를 토대로 전투 일을 7월 20일로 추정하기도 하고, 『쇄미록(瑣尾錄)』의 기사를 토대로 8월 17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이치 전투가 벌어진 날짜는 이와 직접 관계가 있는 웅치 전투나 금산 전투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백사선생집(白沙先生集)』
  • 『쇄미록(瑣尾錄)』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집문당, 2008.
  • 이형석, 『임진전란사』상, 신현실사, 1977.
  • 곽호제,「임진왜란기 이치대첩의 의의와 재검토」, 『충남사학』12, 2000.
  • 김상기,「임진왜란기 권율의 이치대첩」, 『충남사학』12, 2000.
  • 최영희, 「임진왜란사에서의 이치대첩의 의의」, 『충남사학』12, 2000.
  • 하태규,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동향과 호남방어」, 『한일관계사연구』26,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