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李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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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완성

[1541년(중종 36)∼1607년(선조 40) = 6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자는 사무(士武)이고, 호는 우파(雨波)·우계(雨溪), 또는 우계산인(雨溪散人)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인데, 우계공파(雨溪公派)의 파조이다.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도사(都事)이원상(李元祥)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신옥형(申玉衡)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이행(李荇)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이의무(李宜茂)이다. 이조 정랑(正郞)이원록(李元祿)의 조카이기도 하다.

선조 전반기 활동

1567년(선조 즉위년)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고, 1574년(선조 7)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4세였다.[『방목(榜目)』] 바로 성균관(成均館) 권지(權知)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의정부 사록(司祿)으로 전임되었고, 1577년(선조 10)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이때 그는 지위 높은 한 관리의 과실을 숨김없이 기록하였는데, 동료가 그 말을 누설하면서, 결국 평안도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로 좌천되었다. 뒤에 조정으로 들어와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가 형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82년(선조 15)에는 예조 좌랑과 사헌부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인 1583년(선조 16)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는데,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으면서 북청 판관(北靑判官)이 되었으며, 이어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에 임명되었다. 1584년(선조 17) 병조정랑(正郞)을 거쳐 장악원(掌樂院) 정(正)으로 전임되었으며, 함경도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가 백성들의 구호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다. 1585년(선조 18)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함경도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되었다. 1586년(선조 19)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승진하였는데, 그해 5월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서 함경도순찰사(咸鏡道巡察使)를 겸임하였다.(『선조수정실록』 19년 5월 1일)

1588년(선조 21) 12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21년 12월 18일) 1589년(선조 22) 2월 이광은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의 실력을 알아보고 “그대와 같은 인재가 어찌하여 이토록 굴욕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 하며 조정에 보고하여, 그를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선조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그해 겨울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나자, 그 문하생과 도당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고, 반역에 연루되어 체포된 죄인들을 심문하였다. 이때 그는 혐의가 적은 사람들을 임의로 석방해주었는데, 이 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선조수정실록』 23년 3월 1일) 1591년(선조 24) 호조 참판(參判)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그해 3월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고,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면서,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를 겸임하였다.(『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선조 후반기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왜군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였면서,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에 관찰사이광은 전라도에서 근왕병(勤王兵) 4만여 명을 차출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이경복(李慶福)을 중위장으로 삼고,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조방장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으로 삼고,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김수(金睟)와 함께 하삼도(下三道) 군사와 연합하여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선조실록』 25년 6월 21일),(『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하삼도 연합군이 무려 6~7만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당시 조정에서는 하삼도 연합군이 반드시 서울을 수복하리라고 크게 기대하였다. 그러나 하삼도 연합군은 임천을 거쳐 전진하던 가운데 용인(龍仁)에서 왜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다.

이에 전라도관찰사이광은 흩어진 군사를 다시 수습하여 급히 전라도로 돌아왔다. 이때 왜군이 전라도의 전주·금산 지역을 침입하자, 관찰사이광은 급히 광주목사(光州牧使)권율(權慄)을 전라도병마사(全羅道兵馬使)로 삼았다. 권율은 웅치(熊峙)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또 전주에 육박한 왜적을 이정란(李廷鸞)의 전주 의병과 함께 힘을 합쳐 격퇴시켰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이후 대간에서는 관찰사이광이 3도 연합군을 이끌고 용인에서 패전하였다며 탄핵을 하였고, 이에 이광은 파직되어 백의종군하였다.(『선조실록』 25년 7월 22일),(『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 그러나 3도 관찰사 가운데 전라도관찰사이광의 죄가 가장 크다고 하여, 다시 체포되어 하옥되었으며, 의금부에서 엄한 국문(鞫問)을 받고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선조실록』 25년 9월 8일),(『선조실록』 26년 10월 26일),(『선조실록』 26년 10월 27일),(『선조실록』 27년 2월 8일),(『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그리고 1594년(선조 27) 2월 사면을 받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1597년(선조 30) 57세가 되던 해에 그는 전라도 고부(古阜)로 낙향하였다. 그의 외갓집은 대대로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우일향(雨日鄕)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곳을 무척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만년에 이곳 우일향으로 내려가 우계(雨溪)에 영파정(迎波亭)을 짓고 백발회(白髮會)를 만들어, 촌로들과 어울려 낚시를 하고 산수를 즐기며 스스로 호를 우계산인(雨溪散人)이라고 불렀다. 1601년(선조 34) 61세 때 중풍(中風)에 걸려 6년 동안 고생하다가, 1607년(선조 40) 1월 19일 고부군 우일향(雨日鄕)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7세였다. 그는 죽어서 우계산(雨溪山)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충청도 면천(沔川)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문집으로는 <우계집(牛溪集)>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하삼도 근왕병의 용인 대패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왜적이 쳐들어와서 동래성(東萊城)을 점령하고 서울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이광은 즉시 전라도 군사를 통솔하여 왜적을 토벌하겠다고 장계(狀啓)를 하자, 선조가 직접 서찰을 내려 격려하였다. 서울로 향하던 그의 군사가 공주(公州)에 이르렀을 때, 행관(行官 : 전령)이 서울에서 돌아와 통곡하면서 왜적이 서울을 이미 점령하였다는 것과 임금은 이미 도성을 빠져나가 평안도 지방으로 파천하였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군중(軍中)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군사들이 흩어져 대오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관찰사이광이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이산(尼山)의 석교(石橋)를 지키게 하고, 직접 군사들을 설득하며 타일러 다시 안정을 되찾도록 하였다. 그러나 난병(亂兵)들이 칼을 빼들고 장수(將帥)들을 에워싸서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므로, 이광도 전주(全州)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왜적은 3로(路)로 나누어 부산에서 서울로 북상하여 서울을 점령한 다음에 북쪽으로 다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적이 아직 전라도 지역은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이광은 여러 고을에 명령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나누어 지키게 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타이르고 설득하였다. 이에 힘입은 군사들은 다시 왜적과 싸우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해 5월 그는 전라도병마사곽영(郭嶸)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우고, 전라도 여러 고을에서 군사 4만여 명을 차출하여 군사 편제를 짠 후 북정(北征)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충청도관찰사윤선각과 경상도관찰사김수도 함께 근왕병을 일으켜 연합 작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하삼도의 연합군이 6~7만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서울로 진격하여 수원(水原)에 주둔하니, 군대의 위용(威容)이 매우 성대하였다. 행재소(行在所)의 선조도 이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들이 반드시 왜군을 물리치고 서울을 수복하리라고 기대하였다.

3도의 관찰사와 지휘자들이 모여서 작전을 의논하던 중 어떤 장수가 말하기를, “왜적이 이미 서울을 점거하고 있으며 흉악한 예봉(銳鋒)을 한창 떨치고 있는 반면에, 우리 군사들은 괜히 병력이 많다고 허세만 부릴 뿐이지, 실제로는 전투에 익숙하지 못하니, 왜적과 직접 상대해서 싸우게 되면, 분명히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독산성(禿山城)을 굳건하게 지키며 왜적을 유인하여 싸우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승세를 틈타서 서울로 진격한다면 온전하게 승리를 거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지만 관찰사이광은 “군부(君父)께서 위태롭게 적에게 쫓겨 나라 한쪽 구석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번신(藩臣)이 군사를 거느리고 시간을 지체한다면 안 될 일이다. 마땅히 적을 향해 곧장 육박해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 군사가 설령 적과 대적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서도(西道)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길목을 차단하여 행재소를 보호하는 하나의 계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곧장 한강(漢江)의 호현(狐峴)까지 진격해 들어가고 나서, 그 다음 일을 의논토록 하자.”고 명령하였다.

이에 하삼도 연합군은 서둘러 서울로 향하여 진군하였는데, 전라도 군대가 앞장서고, 충청도와 경상도 군대가 그 뒤를 따랐다. 연합군이 마침내 용인의 왜적을 향해 진격하는 상황에서 왜적의 선봉대가 갑자기 전방의 전라도 군사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때 전라도 군사의 선봉장인 백광언(白光彦)과 이지시(李之詩)가 왜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왜적의 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전라도병마사곽영의 군대가 먼저 패배하였고, 후방의 하삼도 군대도 마침내 궤멸하였는데, 그 형세가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아서 어떻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앞서 작전을 의논할 때 경험 많은 장수가 주장한 의견이 과연 그대로 적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삼도의 관찰사들은 황급히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자기 감영(監營)으로 돌아갔다. 관찰사이광도 뿔뿔이 흩어진 전라도 군사들을 불러 모아 전주로 돌아왔는데, 왜적이 전주와 금산(錦山)의 경계까지 추격해왔다. 이런 가운데 전라도병마사곽영이 전사하면서 군사를 통솔할 사람이 없었다. 관찰사이광은 광주목사권율이 장수의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첩문(牒文)을 보내 그를 전라도병마사로 삼아 왜적을 막게 하였다. 그리고 전라도 의병장 황진(黃進) 등을 보내 웅치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는데, 일본인들은 웅치 전투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에서 크게 패배한 3대 전투 중의 하나로 꼽는다. 한편 또 다른 왜군이 전주성(全州城)을 공격하자, 관찰사이광은 의병장 이정란으로 하여금 전주의 의병들을 이끌고 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대항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는 한편, 산골에 군사를 배치하여 밤에 횃불을 죽 늘어세우고 서로 호응하여 신호를 보내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은 골짜기마다 군사가 진을 치고 있다고 판단하여 겁을 먹고 퇴각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이광은 비록 하삼도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수복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전라도를 왜적의 침임에서 보호하는 데는 성공하였던 것이다. 또한 권율과 이순신 같은 명장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용인에서 패전하고 하삼도 군사가 후퇴할 때, 관찰사이광은 충청도관찰사윤선각과 경상도관찰사김수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퇴각하였는데, 서로 작별 인사를 하면서 “우리들이 장차 무슨 형률을 적용 받아 처벌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경상도관찰사김수가 말하기를, “나는 본도(本道)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였고 지금 또 패배하였으니, 나야말로 중하게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고, 충청도관찰사윤선각은 “경기는 나의 지역과 경계하고 있고, 병력은 실제로 내가 유도(誘導)하였으니, 내가 수죄(首罪)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전라도관찰사이광이 웃으면서 “두 분은 명문가의 후계자이니,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나야말로 책임이 막중한데 큰 죄를 지었으니, 아마도 위태로울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이 적중하였다.

그해 가을 대간에서는 관찰사이광에게 하삼도 연합군이 용인에서 왜적에게 패배한 죄를 물어 그를 파직시키고 백의종군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3도의 관찰사 가운데 이광의 죄가 가장 크다며 체포하여 엄한 국문을 하고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또 다시 국문할 것을 명하면서 이광은 구금(拘禁)되어 신문(訊問)을 받으며 그해 겨울을 보냈다. 근왕병에 큰 기대를 걸었던 선조가 용인의 패배를 가장 원통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1594년(선조 27) 봄 나라에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릴 때 이광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광은 원래 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과 힘만으로 출세하였을 뿐 아니라,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업적을 쌓아올렸다. 그러므로 조정 안팎의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삼공(三公)의 자리에 오르리라고 큰 기대를 갖고 있었고, 선조의 믿음과 사랑도 특별하였다. 그러나 용인 전투에서 한 번 패배를 당한 이후에 종신토록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성품과 일화

이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위인의 의표(儀表)를 지니고 있었으며, 명랑하면서 후덕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함이 남달라서 문사(文思)에 탁월하였다. 겨우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시구(詩句)를 지을 줄 알았는데, 전라도 지방의 큰 죽순(竹筍)을 보고 “대나무가 다 커서는 옷이 없는데, 작을 때에는 옷이 있구나[竹大無衣小有衣]”하고 읊었다고 한다.

이광은 1541년(중종 36) 12월 8일 외갓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집안은 대대로 전라도 고부군 우일향에서 살았다. 우일(雨日)은 속칭 우계라고도 불렀으며, 그는 우계산을 무척 사랑하였다. 1555년(명종 10) 15세 때 어머니 평산 신씨가 세상을 떠나자, 두 형 이섭(李涉)과 이용(李溶)을 따라서 무덤 앞에 초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하며 3년 상을 마쳤다. 1558년(명종 13) 18세 때 청주목사(淸州牧使)이증영(李增榮)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인 이증영은 명종의 잠저(潛邸) 때 사부(師傅)였을 만큼 학문에 뛰어났으므로, 이광은 장인 이증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 아버지 이원상(李元祥)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70년(선조 3) 음직으로 선릉(宣陵) 참봉(參奉)이 되었고,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였다. 그때 대책(對策)에서 1등을 차지한 책문(策文)이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범 답안으로 통하였다.

그는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데에 매우 능숙하였다. 송사와 관련된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아전 몇 명으로 하여금 양쪽에서 붓을 잡게 하고, 귀로 보고를 듣고 입으로 판결하면서 신속하게 결재하였는데도, 어느 것 하나라도 사리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병무(兵務)와 재정에 관한 일을 처리를 하는 경우에도 번거롭게 하거나 수고스럽게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그러나 집안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평소 집안에 식량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 서울이나 지방에서 살 때에도 모두 자기 집이 없었고, 집안의 기물(器物)도 귀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함경도관찰사를 4년 동안 연임하면서 많은 공로를 세웠지만, 청렴함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였다. 임기를 마치고 영흥(永興)을 떠날 때,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오직 책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그때가 마침 한 겨울이어서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관아의 창고에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녹비(鹿皮) 수백 장이 있었으므로, 영흥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가도록 간청하였다. 그들이 하도 강권(强勸)하는 바람에 이광은 녹비 한 장을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길주(吉州)에 들렀는데, 떠날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영흥에서 가져온 녹피 한 장을 관아의 창고에 슬그머니 넣어 두고 길을 떠났다.

당시 함흥(咸興)의 감영에서는 예전부터 세포(細布)와 초피(貂皮 : 담비 가죽)를 납부하도록 하여 함경도관찰사가 사사로운 용도로 쓰면서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후백(李後白)과 정언신(鄭彦信)이 잇따라 함경도관찰사가 되면서 그 숫자를 반으로 줄였으나, 이광 또한 관찰사로 부임한 후 이것을 모조리 견감(蠲減)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는 관청에서 업무를 볼 때,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친척이나 옛 친구들이 소식을 전하면서 선물을 보내오면 일체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함경도에 근무할 던 어느 날 아들에게 문서를 점검해 보라고 하였다. 아들은 아직 뜯지도 않은 채 쌓여있는 집에서 온 문안 서찰 수십 통을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바쳤는데, 이광은 웃으면서 “이것은 평안하다는 소식을 전해 온 서찰일 것이다. 나는 겉봉만 보고도 벌써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글을 지을 때 내용의 흐름에 중점을 두었고, 글을 아름답게 다듬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가할 때에는 붓이 가는 대로 시를 지어서 읊었는데, 가필(加筆)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자손들이 흩어진 원고를 모아 문집 『우계집(雨溪集)』을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시인권필(權韠) 등의 문인들이 그 글을 보고 탄복하기를, “이는 명가(名家)도 따라 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면천군(沔川郡) 창택리(滄澤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이식(李植)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 지금 무덤은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추동리에 있다. 증조할아버지 이의무 이후 3대가 모두 면천군 창택리에 안장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자손들이 대부분 이곳에 장지(葬地)를 잡게 되었으므로, 이광의 자손들은 전라도 고부군 우일향에서 충청도 면천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그는 세상을 뜬 지 26년이 지난 1633년(인조 11) 신원(伸寃)되었으며, 관작(官爵) 또한 회복되었다.

부인 덕산 이씨(德山李氏)는 청주목사(淸州牧使)이증영(李增榮)의 딸인데,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안지(李安止)는 일찍 죽었고, 차남 이안직(李安直)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냈으며, 3남 이안진(李安眞)은 직언(直言)으로 선발되어, 영덕현령(盈德縣令)을 지냈다. 외동딸은 현감(縣監)남철(南澈)에게 출가하였는데,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손자 이위(李椲)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택당집(澤堂集)』
  • 『기재사초(寄齋史草)』
  • 『간이집(簡易集)』
  • 『갈암집(葛庵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문소만록(聞韶漫錄)』
  • 『백사집(白沙集)』
  • 『용재집(容齋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심리록(審理錄)』
  • 『서애집(西厓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음집(淸陰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갑진만록(甲辰漫錄)』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홍재전서(弘齋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우계집(雨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