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국(尹弘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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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6년(선조 9)∼1615년(광해군 7) = 40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정랑(正郞)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다. 자는 장경(長卿)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충청도 서원(西原: 청주) 출신으로서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좌통례(左通禮)윤계훈(尹繼勳)이고, 조부는 윤시우(尹時雨)이다. 아버지는 수운 우판관(水運右判官)윤응상(尹應商)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교하 현감(交河縣監)이원우(李元友)의 딸로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다. 병조 참지(參知)윤안국(尹安國), 윤광국(尹匡國)의 동생이다.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송강(松江)정철(鄭澈)의 손주사위이고, 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광해군 시대 활동

그는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1601년(선조 34)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갑과(甲科) 2위 방안(方案)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처음에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보임되었고, 외직으로 나가서 함경도 북평사(咸鏡道北評事)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없어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복간(復刊)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병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1605년(선조 38) 경상도 울산 판관(蔚山判官)이 되었고, 연서도 찰방(延曙道察訪)과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은사(謝恩使)윤방(尹昉)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부사(副使)이정신(李廷臣)과 함께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에 몸이 아파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있었는데, 이때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11월 6일 오랜 지병으로 서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겨우 40세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4「부호군 증참판 윤공홍국묘표(副護軍贈參判尹公弘國墓表)」 참고, 이하 「묘표」라 약칭.)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평탄하고 행동은 신중하였는데, 평생 의리를 숭상하였고, 근신하는 행동이 천성에서 나왔다. 일찍이 우계(牛溪)성혼(成渾)을 찾아가서 만났는데, 우계성혼이 그와 만나서 학문을 토론하고 극구 그를 칭찬하였다. 그때 두 사람이 주고받은 내용이 『우계집(牛溪集)』의 「일록(日錄)」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대장부는 시원스럽게 처사(處事)해야 하는데, 몸을 굽혀 풍속과 맞추려고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그는 만년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윽한 산속에 들어가서 몸을 의탁하거나, 또는 전원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일찍이 요절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광해군 시대에 살면서 혼란한 정치를 걱정하고 비분강개하였으나, 집안 가속(家屬)들을 엄격하게 단속하여 화가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그는 종신토록 지킨 네 글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다[不忮不求].”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가 바로 신명(身命)을 편안히 가질 수 있었던 기본 신념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으나, 또한 이로 인하여 동년배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그와 교유한 친구는 문경공(文敬公)김집(金集)·참판(參判)이명준(李命俊)·좌랑(佐郞)송방조(宋邦祚)·대사간(大司諫)윤황(尹煌) 등이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고, 송방조는 송시열의 숙부이다. (「묘표」 참고.)

윤홍국의 스승인 사계김장생은 그를 재목으로 여겨 자신의 생질녀이자 정철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하도록 중매하여 주었다. 그는 정철의 가르침을 받고, 학문을 깊이 닦아서, 마침내 나이 26세에 방안(榜眼)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하급 관료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그가 송강정철의 문인이고 손서(孫壻)였으므로 선조 시대 정철의 정치적 부침(浮沈)과 연계되어 출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 시대 권신(權臣) 이이첨이 윤안국·윤홍국 형제를 매우 꺼려하고 미워했기 때문이다.

묘비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석적리(石積里) 발우산(鉢盂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4「부호군 증참판 윤공홍국묘표(副護軍贈參判尹公弘國墓表)」) 죽은 뒤에 광해군 때 사행(使行)한 공훈으로 인하여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 영일정씨(迎日鄭氏)는 진사(進士)정기명(鄭起溟)의 딸인데, 송강정철의 손녀이고, 사계김장생의 생질녀였다.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은 윤하(尹夏)이고, 차남은 윤기(尹夔)이며, 3남은 윤도(尹度)이다. 처음에 윤홍국이 부모를 모두 여의고 형 윤안국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사계김장생은 윤홍국이 형제간에 우애를 게을리 하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을 사랑하여 항상 글을 가르쳐 주었고, 또 매제(妹弟)의 딸을 중매하였다. 김장생의 매제가 바로 송강정철의 큰아들 진사 정기명이었다.(「묘표」 참고.)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문과방목(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간이집(簡易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월사집(月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