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琉璃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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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화평문 바깥에 위치한 큰 거리의 이름.

개설

과거의 명칭은 해왕촌(海王村)이었다. 원·명대에 유리를 굽는 가마가 세워져 궁전과 묘우의 유리기와를 공급하면서 유리창이라고 하였다. 청나라 초에 골동품 책방이 이곳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는데, 건륭 연간(1736~1795년)에 이르러 『사고전서』를 수찬하면서부터 학자와 문인들이 북경으로 모여들면서 유리창의 옛 서적들과 자화(字畫)·금석(金石) 및 문방사우 등의 점포가 크게 흥성하면서 문화가로서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청말 유리창에는 133개의 골동품가가 있었다. 1980년 중국 정부는 유리창을 중건을 시작하여 1984년에 준공하였다.

명칭 유래

원·명대에 유리를 굽는 가마가 세워져 궁전과 묘우의 유리기와를 공급하면서 유리창이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유리창은 북경 주변의 작은 촌락인 해왕촌이었다. 원대에 북경에 도읍을 건설하면서 원 정부는 토목공사를 시작하여 4개의 가마터를 설치하였는데 유리창은 그중 하나로 해왕촌에 설치되었다. 명대 내성(內城)을 건설하게 되자 궁전 건설의 필요에 따라 유리창은 관요로서 규모도 확대되었고 환관 중 최고 우두머리인 태감이 관장하게 되었다. 1553년 북경에 외성(外城)을 건설하여 도시 규모가 확대되자 유리창이 위치하였던 곳도 교외에서 성내로 바뀌었다. 그러나 유리 제작이 주변 환경에 오염을 일으킬 수 있어서 가마를 북경 서부의 문두구구(門頭溝區)의 유리거촌(琉璃渠村)으로 옮겼는데 본래의 유리창 터는 그 이름을 유지하게 되었다.

청대에는 만주족이 모든 한관 및 상민들을 남성(南城)에 거주하게 하여 남성에 위치한 선무구에 한인들이 유입되었다. 또 전국 각지의 동향인이나 동종업자들의 친목도모 장소인 회관(會館)도 이 주변에 건설되면서 유리창은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1773년 건륭황제가 『사고전서』의 편찬을 명하자 이에 참여한 관료나 학자들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유리창에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서적과 문방 도구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나 문화가로서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청 말기에 이르러 유리창은 점차 골동품 시장이 들어서서 서점을 능가하여 130여 가구에 이르렀고 중화민국 초에는 200여 가구로 늘어났다.

유리창은 조공 및 무역을 위하여 북경에 온 사신과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더욱 번화해졌다. 조선의 사신들은 그 번화함을 본국에 돌아가 보고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대에 정원시는 유리창은 호족(胡族)과 만족(蠻族) 상인들의 수레가 앞다투어 가느라 바퀴가 서로 부딪칠 정도로 매우 번화한 곳이라고 하였다(『정조실록』 4년 11월 27일). 특히 홍대용이 사행단을 따라갔다가 유리창에서 과거를 보러 온 중국 지식인 엄성(嚴誠) 등과 친분을 맺고 교류한 일은 조선후기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중국 정부는 유리창의 규모를 더욱 확대하여 총 면적이 34,000㎡에 달하였다.

위치 비정

현재 북경 선무구(宣武區) 화평문(和平門)에 있다.

참고문헌

  • 『간정동필담(干净同笔谈)』
  • 『유리창서사기(琉璃廠書肆記)』
  • 『제경세시기성(帝京岁时纪胜)』
  • 鄭天挺·吳澤·楊志玖 主編, 『中國歷史大辭典』, 上海辭書出版社, 2000.
  • 박수밀, 「조선의 중국 서적유입 양상과 그 의미-서반(序班)과 유리창(琉璃廠)의 존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문화연구』 50,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11.
  • 정민, 「연행 기록을 통해본 18~19세기 북경 유리창 서점가」, 『동아시아문화연구』,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11.
  • 楊雨蕾, 「朝鮮燕行錄所記的北京琉璃廠」, 『中國典籍與文化』, 敎育部全國高等院校古籍整理研究工作委員會, 2004.
  • 王振忠, 「朝鮮燕行使者與18世紀北京的琉璃廠」, 『安徽史學』, 安徽省社會科學院, 2011.
  • 任浩, 「琉璃廠變遷史話」, 『藝術市場』, 文化部,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