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거승(安居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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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에 참여하는 승려, 또는 안거회를 주관하는 승려.

개설

안거(安居)는 불교의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 생존 당시의 인도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의 기후는 여름 우기(雨期)에 비가 많이 내려 수행자들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행 및 포교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뜻하지 않게 살생을 범할 우려가 높았으므로, 석가모니는 수행자들에게 한곳에 머물며 수행할 것을 권하였다. 이처럼 여름 우기에 한곳에 머물며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안거라고 한다. 이 전통이 전래되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승려들도 여름 3개월 동안 안거하였다. 이후 여름뿐 아니라 외부 출입이 어려운 추운 겨울에도 안거하기 시작하면서 하안거(夏安居), 동안거(冬安居)의 수행 풍토가 정착되었다. 한편 안거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마다 힘든 수행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신도들이 승려에게 음식을 베푸는 의식 즉 안거회(安居會)를 개최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안거승(安居僧)은 이러한 안거에 참여하거나 안거회를 주관하는 승려를 말한다.

내용 및 특징

안거회는 조선시대 불교의 고유한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가 번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큰 법회를 열어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반승(飯僧)이 널리 성행하였다. 그에 비해 억불 정책을 표방한 조선시대에는 반승 의식이라는 공식 행사를 개최할 수 없었으므로 이를 대신하여 안거회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왕실 주최의 안거회는 불교를 배척하는 유학자 관료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조선시대 안거회의 구체적인 모습은 전하지 않는데, 여러 사료를 통해 대략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백성들이 재물을 시주하면 그 재원을 바탕으로 안거승 등이 행사를 주관하는데, 넓은 장소에 각종 음식을 마련해 두고 주악(奏樂)과 범패 등이 펼쳐지는 법회 의식을 거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학자들은 이 같은 안거회가 놀고먹는 승려들에게 재물을 허비하는 무익한 일이며, 그 재물로 승려들이 사치를 일삼는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안거간사(安居幹事)라는 승려들이 백성들에게 인과응보의 설을 퍼뜨리며 시주를 권하고 다니는데, 이는 혹세무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세종실록』 24년 1월 5일).

변천

1502년(연산군 8) 회암사에서 안거회를 개최하자, 사헌부에서는 국가에서 금지한 불교 법회를 열었다는 죄목으로 안거승 등을 추문(推問)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부마인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정현조(鄭顯祖)가 재원을 지원한 사실이 밝혀졌다(『연산군일기』 8년 5월 28일). 이에 그를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정현조는 회암사의 안거회에 재정적인 지원을 한 것은 죽은 공주의 재(齋)를 지내도록 면포 몇 필을 주어 수륙재와 승려 공양에 보탬이 되게 한 것뿐이라고 해명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6월 2일). 연산군은 정현조가 재상이 아니므로 관료를 처벌하는 조항에 따를 수 없고, 또 이정도 일로 옥사를 일으킬 수 없다며 무죄 처리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9차례나 계속되었다. 안거회에 재물을 지원한 일을 빌미로 왕실의 불교 지원을 중단시키고 불교를 철저히 억압하려는 의도였다.

참고문헌

  • 이봉춘, 「조선초기 배불사 연구: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 이정주, 「세조대 후반기의 불교적 祥瑞와 恩典」, 『민족문화연구』44,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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