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언해(小學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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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선조 20) 선조(宣祖)의 명에 따라 유학의 규범과 윤리를 익혀 실천하고자 『소학(小學)』을 언해한 책.

개설

『소학언해(小學諺解)』는 1587년 왕명의 따라 주자(朱子)의 『소학』을 한글로 풀이하여 교정청에서 간행한 책이다. 『소학』은 중종(中宗) 때 처음 번역되어 『번역소학(飜譯小學)』의 이름으로 간행된 적이 있었으나, 너무 의역에 치우쳤다는 비판이 있었으므로, 선조 때 직역을 원칙으로 해서 『소학언해』를 간행하게 되었다.

『소학언해』는 책 첫머리에 ‘범례’가 있고, 끝에 이산해(李山海)의 발문과 간행에 관여한 관원의 명단이 붙어 있어 편찬 간행에 관한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발문은 1587년 4월로 되어 있고, 내사기(內賜記)는 이듬해 1월로 되어 있다. 이 교정청본의 복각본(覆刻本)이 임진왜란 전후에 몇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편찬/발간 경위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육 방침의 하나는 『소학』의 규범과 윤리 같은 것을 몸에 익혀 실천하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고, 따라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유학 경전으로 『소학』을 꼽았다. 1425년(세종 7)에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소학』이 음훈주해(音訓註解)가 미비하다 하여, 명(明)나라에 파견하는 사신에게 『집성소학(集成小學)』 100권을 구입해 오도록 하였으며, 3년 후에는 주자소(鑄字所)에서 이를 인쇄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는 사부학당(四部學堂:서울의 동부·서부·중부·남부에 설치되었던 사학(四學)의 다른 이름)의 생도들이 『소학』을 어린이가 배우는 학문으로 여겨 평소에는 잘 읽지 않고 있다가 성균관 진학 자격을 주는 승보시(陞補試)가 있게 되면 임시로 섭렵한다는 폐단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조선 전반기에 발행된 『구결소학(口訣小學)』ㆍ『소학편람(小學便覽)』은 『소학』의 주석서에 가까웠기 때문에 1518년(중종 13) 『번역소학』을 간행하여 『소학』 전체를 우리말로 풀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지나치게 의역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의역을 통해서 공부한 사람들이 『소학』의 본뜻을 온전히 배우지 못하였고, 본뜻을 알기 위해서 『번역소학』을 공부한 후에도 또다시 『소학』을 보아야 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에 선조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직역을 위주로 한 『소학언해』를 간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만족할 수가 없어서 이후 영조(英祖) 때 『소학언해』를 다시 번역하여, 『어제소학언해(御製小學諺解)』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들 『소학언해』는 모두 주자의 『소학』을 직역하는데 목적을 둔 책이므로, 그 내용은 사실상 『소학』과 다를 바가 없다.

서지 사항

총 6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규장각과 도산서원(陶山書院)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소학』은 송(宋)나라 주자가 엮은 것이라고 씌어 있으나, 실은 그의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주자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1187년에 완성되었으며, 내편(內篇) 4권, 외편(外篇) 2권의 전 6권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이다. 명(明)나라 진선(陳選)의 『소학집주(小學集註)』 6권을 비롯하여 명·청(淸) 시대를 거치며 많은 주석서가 나왔으며,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들어와 사대부의 자제들이 8세가 되면 유학의 초보로 이를 배웠다. 이 책은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서, 유학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그 내용은 내편은 입교(入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으로 되어 있는데, 사학(四學)·향교·서원·서당 등 당시의 모든 유학 교육기관에서는 이를 필수 교과목으로 다루었다.

한편 『소학언해』는 교정청에서 간행된 다른 언해본들과 함께 16세기 말엽의 국어 자료로써 큰 가치를 지닌다. 종래 이런 자료를 확인할 수 없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였던 변화가 그 이전에 이미 일어났음을 증명한 것이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ㅿ’을 들 수 있다. 본문에서 ‘ㅿ’의 용례는 “복죄여”, “치운 후에” 등 이른바 강세의 ‘’에 국한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가 때로는 “고텨지라 여”, “모톤 후에아”에서와 같이 ‘, 아’로도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 강세의 조사 이외에도 ‘ㅿ’의 예가 더러 있으나, 이 자음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없어졌다는 것이 통설이었지만, 이 책이 간행된 시기에 이미 완전히 소실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방점 표기에 있어서도 심한 혼란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중세국어와 근대국어의 중요한 차이를 이루는 여러 음운변화, 문법변화가 이 때에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점에서 『소학언해』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ㆁ'은 사용되고 있으며, 분철 현상이 많이 나타남으로써, 임란 후의 실용적 정신의 반영된 것을 보여주며, 모음조화 현상이 파괴되고, 접미사 ‘오/우’가 없어지기 시작하고, 구개음화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특이한 사실로 부동사(副動詞) 어미 ‘-며’가 이 책에서 간혹 ‘-먀’로 나타난다. 그리고 ‘톄(體)’의 사용이 확대되어 조격조사가 붙은 ‘톄로’의 예가 이 책에서 발견된다. 이 ‘톄로’가 ‘텨로→쳐로→처럼’과 같은 경로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또한 15세기에 ‘ㄹ-ㅇ’형으로 활용되는 단어들이, 예를 들면 ‘느르+어/닐어, 오+아/올아, 다+아/달아'로 활용이 되는 바, 이러한 변화는 주로 ', 르 불규칙 활용’에서만 나타나는데, 『소학언해』에선 이것이 ‘ㄹ-ㄹ’형으로 나타난다. 즉 '니르+어/닐러'는 현대어의 '르 불규칙 활용' 형태, 예를 들면 ‘이르+어/일러’와 같은 'ㄹ-ㄹ형'으로 바뀐다.

이 밖에도 중세국어와 근대국어의 중요한 차이를 이루는 음운변화와 문법변화가 이때에 일어났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남풍현, 『도산서원 소장 교정청본 소학언해 해제』, 1991.
  • 이기문, 「소학언해에 대하여」, 『한글』127, 한글학회, 1960.
  • 이숭녕, 「소학언해의 무인본과 교정청본의 비교연구」, 『진단학보』36, 진단학회, 1973.
  • 이현희, 「소학의 언해본」, 『국어사 자료와 국어학의 연구』, 1993.
  • 정호완, 「『소학언해』의 해적이」, 『역주 소학언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