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聖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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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성인의 가르침을 지향하는 학문.

개설

성(聖)에 대한 논의는 『논어(論語)』「옹야(雍也)」에서 자공(子貢)이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어찌 어진 것뿐이겠느냐. 반드시 성인(聖人)일 것이다. 요순(堯舜)도 그와 같이 못함을 걱정했다."고 하였던 데서 비롯한다. 성인은 널리 백성에게 베풀어 대중을 제도하는 인(仁)의 극치라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인륜의 궁극적 경지를 성인이라고 하고, 인간의 덕성이 극대화하여 타인에게 감화를 주는 경지[大而化之之謂聖]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황이 『성학십도』, 이이가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성(聖)의 문제를 본격 조명한 뒤부터 성학(聖學)의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황 역시 성학이란 인을 구하는 데 있으며 이 뜻을 깊이 체득하면 만물일체가 된다고 하였다. 이황은 격물치지의 엄밀함보다 성학을 어떻게 행하느냐에 초점을 두었으며, 성학의 실천공부를 통해 성인에 다가서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이의 『성학집요』는 『대학』의 주제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리에 관한 글을 모으고 자신의 주석을 붙인 것으로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수신과 치도(治道)의 요체를 밝혔다.

내용 및 특징

성학은 공맹 유학을 가리키는 말이나 시대에 따라 여러 용도로 쓰이고 있다. 태종대에는 덕을 이루고 재주를 형성하는(덕과 재주를 이루는) 것은 성학에 의지한다고 하였고(『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세종대에는 성학은 유학자를 높이고 학문을 키워나가는 데 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1월 19일). 영조대에는 성학은 의리를 밝히는 학문이나(『영조실록』 1년 7월 11일)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영조실록』 2년 3월 16일), 덕업(德業)에 나아가는 것(『영조실록』 2년 4월 28일) 등으로 이해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황의 『성학십도』보다는 이이의 『성학집요』가 성학의 교과서로 자주 이용되었다. 특히 이 책은 영조 때에는 경연 교재로 채택되어 군신 간에 성학의 도리를 강론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었다. 즉 영조 5년 홍문관에서 소대(召對) 때 『성학집요』를 진강하도록 아뢴 이후(『영조실록』 5년 윤7월 17일) 여러 차례 유신들과 함께 『성학집요』를 강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사상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儒敎大辭典)』, 박영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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