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방(赴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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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변방인 함경도와 평안도, 혹은 연해 도서(島嶼) 등지의 국경에 군역을 지기 위해 가는 일.

개설

조선시대 양민이 변방(邊方)에 군역(軍役)을 담당하기 위해 가는 길이나, 혹은 군역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부방은 방어에 달려간다는 말로 국경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시대 부방은 북방 야인을 막기 위해 변경 요지의 군진(軍陣)에 나가는 보병이나, 남서해의 도서나 항구에 배정되던 수군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부터 농민들 대부분이 담당한 군역에서 가장 큰 고역이 변방에 나가는 부방이었다. 이에 따라 부방 군인에 대하여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수군이나 육군으로서 서북의 국경 방어에 나간 자로서 병으로 사망하면 그의 본가(本家)를 1년 동안 복호하고, 공무로 인하여 익사한 자는 3년 동안 복호하며, 수군이나 육군으로서 전사(戰死)한 자는 5년 동안만 복호하는 것으로 복호의 기준이 정해졌다(『세종실록』 7년 12월 16일). 이와 함께 세종대에는 노약자의 부방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경원(慶源)에 부방군(赴防軍)으로 왔던 단천 이북 각 고을에 거주하는 갑사(甲士) 중에는 늙고 병든 사람도 있어서 방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시위(侍衛)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이들을 거주하는 고을에서 군역을 치르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2년 1월 5일).

세종대는 북방 야인의 침략에 민감한 시기로 부방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예컨대 경원부(慶源府)와 용성(龍城)의 유방군(留防軍)은 달마다 1소(所)에 150명씩 교대하여 부방했는데, 언제나 풀이 우거지는 4, 5월과 8, 9월 및 10월에 부방하였다. 그런데 봄철 3개월은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서 말을 먹이기가 곤란하고, 6월과 7월은 장마로 물이 깊은데 배가 없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고, 11월과 12월은 눈이 깊이 쌓이고 추위가 심하기 때문에, 7개월 동안에는 변경을 침범하는 야인이 없었다. 그럼에도 방어상 중요도 여부를 구별하지 않고 달마다 150명씩을 1년 동안 계속 부방시켰다.

부방군은 안변에서 경원까지 20여 일의 노정(路程)으로 부방하는 데만 3개월을 소비하였다. 그 노정 와중에 눈비로 인해 길이 끊겨서 도중에 지체하였다가, 식량이 떨어지고 사람과 말이 얼고 굶주리게 되는 폐단이 발생하여 폐해가 많았다. 더욱이 경성(鏡城) 이북에 거주하는 120호를 경원에 이속(移屬)시키고, 길주의 명간(明間) 이북에 거주하는 244호를 경성(鏡城)에 떼다 붙인 뒤로는, 그 고을의 군정(軍丁)이 평상시에 변방을 수호하였으므로 부방군이 늘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배경으로 방어상 중요한 5개월은 경원과 용성에서 각각 100명씩으로 부방하게 하고, 중요하지 않은 7개월간은 50명씩으로 부방하게 하며, 여기에서 1년에 면제되는 1,900명은 다음 해에 부방하게 하여 부방의 고통을 해소하였다(『세종실록』 12년 10월 29일)(『세종실록』 15년 1월 11일).

부방은 해당 병사만이 아니라 그들을 인솔해오는 수령을 비롯한 인원들에게도 고역이었다. 평안도의 경우, 각 고을의 수령들이 각기 그 관(官)의 군졸(軍卒)을 인솔하고 윤번으로 연변(沿邊)에 부방하였다. 그런데 각 고을이 멀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혀 있어 식량 등 필요한 물자 수송에 소요되는 말이 70~80필에 이르고, 이에 따르는 인원도 100명을 넘었기 때문에, 부방군만이 아니라 부방에 참여하는 인원과 마필(馬匹)이 상하는 경우가 많았다(『세종실록』 18년 윤6월 1일). 이런 이유로 인해 세종대 부방은 지역민을 이용하는 것으로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이 지역에 부방하였던 하삼도민의 제대(除隊)를 통해 이루어졌다(『세종실록』 15년 11월 21일).

변천

부방의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속해서 제기되었으며, 부방을 회피하는 일도 많았다. 이는 15세기 후반 이후 전개되는 군역의 부실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에 부방에 3회 빠진 군사 및 색리(色吏)는 온 집안을 변방에 옮기고, 수령이 단속하지 못하여 10명 이상이 부방에 빠지면 수령을 파직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중종실록』 4년 4월 1일).

부방은 명종대에 이르러 북방만이 아니라 왜구에 대한 대비로 남서 해안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1555년(명종 10) 5월 12일 을묘왜변이 발생하기 3일 전 영남과 호남은 흉년이 극도에 달하여 부방하는 군졸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어 변방 방비가 허술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왜구의 침략을 예보한 상황에서 변방 방비가 부방과 같이 논의되었다. 북쪽에 배치된 부방군을 이동시키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군병의 지휘를 용이하게 하는 장수를 선임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미봉책에 그쳤으며, 결국 3일 후에 왜변을 당하는 뼈아픈 실수를 저지른다(『명종실록』 10년 5월 12일).

부방이 변방 방어의 최선임을 알면서도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거치면서도 크게 개선된 안은 나오지 않았다.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1643년(인조 21)에도 서변(西邊)에 부방한 군병들이 6개월 만에 서로 교체되는 줄 알고 추위를 막을 도구를 가지고 가지 않았음에도 12개월 만에 교체하라는 명을 내릴 정도로 부방군에 대한 배려는 물론 전술적인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인조실록』 21년 7월 17일).

특히 조선후기로 갈수록 군역이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는 상황에서 부방군도 예외는 아니어서, 70세에 가까운 노인이 포함되는 일도 발생하였다. 결국 숙종은 60이 넘은 자는 모두 부방에서 제외하라는 조치를 취했지만, 부방이 군역 중에서 고역이며 회피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숙종실록』 36년 7월 14일). 경종대에도 노인의 부방은 지속되어 부모의 나이가 70인 외아들인 경우에도 부방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그들의 부방을 면제하고 납미(納米)도 면제해 주거나, 한 가호(家戶)에서 3~4인이 종군한 경우에는 1인을 면제시키는 규정을 만들었다(『영조실록』 46년 2월 3일). 정조대에는 식년과 출신들로 부방에 종군한 자들은 내금위에 입속된 후로는 근무 월수에 구애하지 않고 초사(初仕)에 응할 수 있는 혜택을 주었다(『정조실록』 22년 6월 17일). 경종에서 정조대에 이르는 사례들은 부방에 어떤 혜택이나 사례가 없으면 누구나 응하지 않는 군역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의의

조선시대 부방은 변방의 국경을 수호하는 것으로 양인의 대다수가 담당했던 군역이다. 이는 부방이 시간이 지날수록 누구나 회피할 수밖에 없는 천직(賤職)임과 동시에 별다른 보상이 따르지 않는 군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조선초기부터 특권계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양인이 의무적으로 부방에 임하게 한 것은 국가와 영토의식을 고양시키는 순기능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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