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창(朴以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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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4년(태조3)~1451년(문종1) = 58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문종(文宗) 때에 활동한 문신. 호는 소정주(小亭舟)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이조 판서 박안신(朴安臣)의 맏아들이고, 평안도병사(平安道兵史)박이령(朴以寧)의 형이다. 부인 신씨는 신포시(申包趐)의 딸로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의 고모이다.

세종 시대 활동

1414년(태종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式年) 문과 급제하여 처음에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1420년(세종2) 승문원(承文院)주서(注書)로 승진하였고, 1426년(세종8) 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에 임명되어 세종의 신임을 얻었고, 1429년(세종11)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에 임명되어, 함길도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에 소홀한 수령관들을 조사하여 관직을 파면시켰다. 1430년(세종12) 사헌부지평(持平)이 되었고, 1434년(세종16) 내자시(內資寺)소윤(少尹)이 되어, 경기도(京畿道)· 황해도(黃海道)에 파견되어 기민(饑民)의 구제 상황을 시찰하여 보고하였다. 1440년(세종22) 예문관(直藝文館)직관(直館)에 임명되어, 오랑개(吾郞介) 대추장 낭볼칸[浪甫乙看]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자 세종(世宗)이 인견(引見)하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는 임금의 교서를 대신 지어서 연청(宴廳)에서 오랑캐 추장들에게 읽어 주었다. 1443년(세종25)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이때, 세종이 다섯 살에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 난 김시습(金時習)을 승정원(承政院)으로 불러서 시험을 하였는데, 박이창(朴以昌)이 김시습을 무릎 위에 앉히고 시를 짓도록 한 일화가 있다. 1447년(세종29) 인수부(仁壽府) 윤(尹)에 임명되었다가, 공조참판· 예조참판을 거쳐서, 황해도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가 되었다. 1450년(세종32) 호조(戶曹)참판이 되었다가, 평안도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로 나가서,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를 겸임하였다.

문종 시대 활동

1451년(문종1) 중추원(中樞院)부사(副使)에 임명되고, 형조참판을 거쳐서, 경창부(慶昌府) 윤(尹)이 되었다. 또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마침 장마철이라 먼 길에 대비하여 종사관(從事官)들의 의견에 따라 양미(糧米)를 정량(定量)보다 40말을 더 가지고 갔다. 이것이 말썽이 되어, 귀국하면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게 될 처지가 되었다.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1451년 9월 16일 의주(義州) 신안관(新安館)에 이르러, 이날 밤중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결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58세였다.

이러한 사실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부터 보고 받은 문종은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박이창이 법을 범한 것을 마음에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기에 이르렀으니, 내 마음이 측은(惻隱)하기 그지없다. 만 리 길에 몹시 고생한 사람이므로, 나는 처음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중의에 의해 억지로 잡아오게 한 것을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 하였다. 또 치전(致奠)하고 부물(賻物)을 후하게 하사하였으며, 그 일행이 범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었다.

성품과 일화

박이창은 성품이 활달하고 익살스러워서 품위있는 농담을 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능리(能吏)’라고 불렀다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 그의 성품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젊었을 때 고향 상주에 있으면서 놀음놀이를 좋아하고 학문에 별로 힘쓰지 아니하였는데, 향시에 장원을 하였다. 그는 향시장(鄕試場)에 들어가서 문득 스스로 생각하기를, “조교(曹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왕의 아우)처럼 키만 크고 향시장에서 백지를 내고 나오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여, 억지로 붓을 들어 아무렇게나 글을 써서 바쳤더니 장원이 되었다고 익살을 부렸다. 또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에 보임되었는데, 선임자(先任者)들은 그가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고 여러 번 꾸지람을 하고서 50일이 지나도 면신(免新)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그는 스스로 자신이 앉아서 일할 자리로 올라가 앉았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자허면신(自許免新)’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젊어서 기개가 있고 활달하여 소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해학을 잘 하였다.

그러나 강개(慷慨)하고 강직한 성격은 그 아버지 박안신의 기질을 닮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그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451년 9월 16일 의주 신안관에 이르러, 그는 칼로 자기의 목과 배를 찔러서 거의 죽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서장관(書狀官)이익(李翊)에게 “당초에 미곡을 다만 그 정량만을 가져가려고 하였는데, 종사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은 마침 장마비가 내릴 때인데, 동8참(東八站:의주에서 요양遼陽 사이의 9개 역참)에 들어가서 큰 장마를 만나 중도에서 체류하게 되면 양곡이 다 떨어져 반드시 아사(餓死)하게 될 것이라.’고 하며 더 가지고 갈 것을 청하였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여, 드디어 40말을 더 가지고 갔으나, 이것을 반드시 계달(啓達)하려고 하였다. 이제 국법을 범하였으니, 아무리 생각해 보더라도 스스로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고 숨을 거두었다.

묘소와 추증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묘소는 경상도 상주 개운리(開雲里) 대방동(大芳洞) 선영에 있다. 1455년(세조1) 판사(判事)로 추증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으로 녹훈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상주박씨세보(尙州朴氏世譜)』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해동역사(海東繹史)』
  • 『동각잡기(東閣雜記)』
  • 『성호사설(星湖僿說·)』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齎集)』
  • 『필원잡기(筆苑雜記)』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