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승(代身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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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백성들이 납부하기 어려운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그 대가를 받던 승려.

개설

공납(貢納)은 백성이 그 지방의 토산물을 조정에 바치던 일을 말한다. 승려들은 일찍부터 특수 공물, 즉 일반 백성들이 납부하기 어려운 물품을 대신 납부하는 대납(代納)을 해 왔다. 태조 때부터 단종 때까지는 대납을 금지하였지만,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예외 규정을 두었다. 승려들은 대납을 통해 절의 건립과 같은 큰 불사(佛事)에 필요한 막대한 경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재산을 불리는 데 급급하거나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등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각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공납은 왕실을 비롯해 중앙 관청 및 지방 관청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생산되지 않는 공물이나 농가에서 만들기 어려운 가공품 등을 공납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현물을 사서 바쳐야 했는데, 이를 기회로 삼아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인·이노(吏奴)·하급 관리들과 더불어 승려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였다. 이들은 조정과 납공자(納貢者) 사이에서 대납을 함으로써 이익을 챙겼다. 이들이 대납한 공물에는 짚이나 띠를 엮어 비바람 등을 막을 수 있게 만든 초둔(草芚), 정탄(正炭), 토목 공사에 쓰이는 큰 목재인 부등목(不等木), 기와를 구울 때 쓰는 토목(吐木), 궁궐에서 연료로 사용하는 참나무 장작인 소목(燒木), 종이, 금박 가루를 아교풀에 개어 섞은 옻인 금칠(金漆), 꿀, 밤 등이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공물의 대납가(代納價)를 배로 징수하는 폐단이 많았다. 그리하여 태종대에는 관리와 동량승(棟樑僧) 등이 각 관청에 공물을 대납하는 일을 모두 금지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에는 팔도의 관찰사에게 대납을 금할 것을 명하면서도, 민간에서 쉽게 준비할 수 없는 공물에 대해서는 대납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다. 예컨대 교서관(校書館)과, 관곽(棺槨) 판매와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의 간사승(幹事僧)들에게 공물 대납을 맡기기도 하였다. 또한 1450년(세종 32)에는 진관사의 승려 각돈(覺頓)이 초둔을 대납하려 하였는데, 전라도 나주 등 30여 고을에서 다른 사람에게 대납하도록 하자 안평대군에게 호소하여 결국 수령들이 파직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29일). 그 뒤 문종 연간에도 각돈과 같은 대신승의 공물 대납은 계속되었다.

한편 승려들이 대납가를 거둘 때는 무리를 지어 각 고을을 드나들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감사와 수령들이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대납가를 올려 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1469년(예종 1)에는 대신승이 무리를 지어 민가에 가서 대납가를 요구하되, 만약 상환하지 못하면 의복과 잡물(雜物)을 빼앗고 그 값을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기도 하였다. 대신승들은 주로 사원 건축, 불상 조성, 불경 간행 등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공물을 대납하였지만, 불법적인 수단으로 농민의 상납을 막기까지 하는 등 폐해를 낳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고석규, 「16·17세기 공납제 개혁의 방향」, 『한국사론』12, 1985.
  • 김진봉, 「조선전기의 공물방납에 대하여」, 『사학연구』26, 1975.
  • 여은경, 「조선후기 산성의 승군총섭」, 『대구사학』32, 대구사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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