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군(金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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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동남부에 있으며 북쪽으로 황해도 신계군과 강원도 이천군, 동쪽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남쪽으로 황해도 연백·장단·개풍군과 접하는 지역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금천군(金川郡)은 고려시대부터 있던 강음현과 우봉군을 합하여 1651년(효종 2)에 설치되었다. 개성 서북쪽 방어의 요충지이자 예성강 수운의 거점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으며 4세기 말부터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 때에는 수지의(首知矣), 우령(牛嶺), 우잠(牛岑) 등으로 불렸다. 통일신라시대 694년(신라 효소왕 3)에 성을 세웠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우봉군과 강음현을 두었다. 이때 우봉은 한주, 강음은 송악군 소속이었다. 782년(신라 선덕왕 3)에 패강진(浿江鎭)이 세워지면서 우봉이 이속되었다.

고려시대 1018년(고려 현종 9)에 우봉은 평산의 속현이 되었고, 강음 지역은 개성현의 속현이 되었으며, 1062년(고려 문종 16) 이후 모두 개성부 직할령이 되었다. 1106년(고려 예종 1)에는 우봉에 감무가 설치되었고 1145년(고려 인종 22)에는 강음에도 감무가 설치되었다. 우봉과 강음은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경기우도로 편입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에 우봉이 현이 되어 현령이 설치되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강음에 현감을 두었으며 모두 황해도로 이속되었다.

1651년(효종 2)에 예성강 변 조읍포 부근의 교통 및 군사 요충지 방어를 위해 우봉현과 강음현을 합하여 금천군이라 하였다. 두 읍의 소재지가 너무 멀어 주민들이 역참 부역 때문에 피곤하므로 이를 덜어 주기 위한 조치였다(『효종실록』 2년 8월 24일).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군의 이름은 강음 땅 금교의 북쪽, 우봉 땅 오조천의 남쪽에 읍치를 두며 금교와 오조천(五助川)에서 글자를 따서 정하였다.

조직 및 역할

군수는 문무음관 4품이 보임되었다.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40명, 아전 18명, 지인 14명, 사령 12명, 관노 19명, 관비 20명이 있었다.

변천

1678년(숙종 4)에 읍치를 오조천 북쪽 저탄(猪灘)의 남쪽으로 옮겼으며(『숙종실록』 4년 3월 6일), 1755년(영조 31)에 읍치를 다시 금교 북쪽의 원 읍치 자리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에 23부제가 시행되었을 때 개성부 금천군과 토산군으로 분리되었으며, 이듬해에 13도제 시행으로 황해도가 복구되자 황해도 금천군과 토산군이 되었다. 1914년에 토산군이 폐지되어 금천군에 합쳐졌으며 규모가 커졌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김천(金川)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