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달수(權達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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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9년(예종1)∼1504년(연산군10) = 36세]. 조선 전기 연산군 때 문신. 자는 통지(通之)이고, 호는 동계(桐溪)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공주목사(公州牧使)권유순(權有順)의 손자이고, 대사헌권민수(權敏手)의 동생이다. 이보정(李補丁)의 외손자이고, 정계금(鄭繼金)의 사위이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24세이던 1492년(성종23)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1495년(연산군1) 임금이 문장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용산(龍山)의 독서당(讀書堂)에서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유학자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뽑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서, 이조 좌랑 ·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동지사(冬至使)의 종사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98년(연산군4)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서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연산군 폭정의 피화

1504년(연산군10)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廢妃尹氏: 제헌왕후)를 추존(追尊)하려 하자, 그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는데, 많은 동료와 간관(諫官)들이 그의 주장에 따랐다. 크게 노한 연산군이 모두 의금부에 하옥하고, 권달수는 곤장 60대를 때리고 용궁(龍宮)으로 유배시키는 한편, 나머지 사람들도 조정에서 추방하였다. 반년이 지나 연산군이 전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다시 체포하여 처벌하려고 하니, 그는 “반대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간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권달수만 저자에서 극형을 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였다. 권달수가 체포되었을 때 경상도 함창(咸昌)에 있던 부인 정씨(鄭氏)는 밥알 하나도 입에 넣지 않고 물만 마시다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통곡하다가, “나를 한 구덩이에 묻어주면 좋겠다.” 하고, 숨을 거두었다.

무덤과 추모

묘소는 경상도 상주 함창 율곡(栗谷)에 있는데, 부인 정씨도 합장하였다. 중종 때 권달수에게 도승지를 추증하고,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에게 정문(旌門) 복호(復戶)하였다. 숙종 때 함창현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패관잡기(稗官雜記)』
  • 『용재집(容齋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사계전서(沙溪全書)』
  • 『허암유집(虛菴遺集)』
  • 『음애집(陰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