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종원(郭宗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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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년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 사간(司諫)이다. 자(字)는 춘경(春卿)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곽황(郭隍)이고, 어머니 박씨(朴氏)는 박인효(朴仁孝)의 딸이다. 사헌부 장령(掌令)곽종번(郭宗藩)의 동생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형 곽종번과 함께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83년(성종 14)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사마방목>]

1485년(성종 16) 알성시(謁聖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이후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94년(성종 25) 영안도(永安道: 함경도) 도사(都事)로 나갔는데, 그때 영안도 관찰사(觀察使)는 성준(成俊)이었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6년(연산군 2)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된 후, 선릉(宣陵: 성종의 왕릉)의 참봉(參奉)을 승직(僧職)으로 임명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아뢰었으나, 연산군이 들어주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 김종직(金宗直)의 사초(史草)를 고발하면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때 훈구파(勳舊派)가 김종직을 위시한 사림파(士林派)를 모조리 제거하였으나, 곽종원과 곽종번 형제는 김종직의 제자가 아니었으므로, 화(禍)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 후 김종직의 제자들이 사라진 조정에서 곽종원과 곽종번 형제는 신진 사류를 대표하는 사림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503년(연산군 9)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이후에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져 정치는 돌보지 않고, 전국에서 말과 미녀를 궁중으로 뽑아 올린 후, 대궐 후원(後苑)에서 내관(內官)과 말을 타고 미녀들과 음란한 짓을 하였다. 이에 사간곽종원은 대간 김제신(金悌臣)⋅이자건(李自健)⋅윤빈(柳濱)과 함께내관들이 후원에서 말을 타는 문제에 대하여 간하였으나, 연산군은 신하가 감히 궁중의 일을 누설하였다고 하며 대발 노발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임사홍(任士洪)의 밀고에 의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성종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비(尹妃)의 폐출(廢黜)에 관여한 성준(成俊)⋅윤필상(尹弼商) 등 훈구파 대신들이 모조리 체포되어 극형을 당하였다. 이때 연산군은 자신의 비행을 파헤치는 사림파까지도 함께 소탕하였다. 연산군은 그해 윤4월 28일, 자신의 비행을 간한 곽종원을 김제신(金悌臣)⋅이자건(李自健)⋅윤빈(柳濱)과 함께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분노를 삭이지 못한 연산군은 그 다음날 곽종원과 김제신을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해 5월 1일, 형 곽종번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할 때, 곽종원의 시신도 함께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해졌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고 격렬하여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였다. 곽종원은 형 곽종번과 함께 연산군 때 대간(臺諫)의 관직에 있었는데, 그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연산군의 불의를 말하다가, 왕의 미움과 분노를 사서, <갑자사화> 때 형 곽종번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경상도 감사이점(李坫)은 도승지 출신으로 연산군에게 아부하는 자였는데, 1503년(연산군 9) 8월, 경상도에서 잡은 흰 꿩[白雉]을 왕에게 진상하였다. 임금이 선정(善政)을 베풀면, 하늘에서 흰 꿩이나 흰 사슴 등을 보내준다는 ‘천명(天命) 사상’을 믿었던 당시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이것을 성대(盛代)의 길상(吉祥)이라고 여겨서, 임금에게 축하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 정치를 하는 시대에 흰 꿩을 길상(吉祥)이라며 임금에게 바치는 행위는 아첨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에 같은 해 9월, 대사간유헌(柳軒), 사간곽종원, 집의유세침(柳世琛), 장령유숭조(柳崇祖)와 유희철(柳希轍), 헌납(獻納)정사걸(鄭士傑), 정언김언평(金彦平)과 서후(徐厚)는 “경상 감사이점이 흰 꿩을 바쳤는데, 이것은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이므로, 그를 체직시키고 국문(鞫問)하도록 하소서.”하고 아뢰자, 연산군은 “이것은 반드시 그 뜻이 있을 것이다.”라며 분노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이점이 연산군에게 길상(吉祥)이라며 흰 꿩을 바친 것을 아첨하는 행위라고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곽종원이었다. 1505년(연산군 11) 3월 연산군은 “곽종원이 제일 먼저 흰 꿩의 일을 아첨하는 것이라며 발설하였다고 하는데, 곽종원은 이미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니, 그 자손에게 곤장 70대를 더 때리고 해외(海外)로 출송(黜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곽종원의 아들은 이미 곤장 1백대를 맞고 먼 변방에 노비가 되었는데, 이 명령으로 곤장 70대를 더 맞고 바닷가 외딴섬으로 추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5월, 승지권균(權鈞)이 연산군에게 “유빈(柳濱)이 공술(供述)하기를, ‘지평(持平)곽종원(郭宗元)이 대궐 후원에서 말 타는 사람을 보고 신 등에게 말하였는데, 대사헌김제신(金悌臣)이 신 등과 상의하기를 「궁궐 후원에는 보행하는 자라도 왕래하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말을 타고 왕래하는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내전에 들어가 아뢴다면 그 연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하고, 함께 내전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아뢴 것이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1일 10번째기사] 대간의 관원들은 대궐의 후원에서 연산군이 내관들과 어울려 말을 타고 미녀들과 음란한 짓을 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어서 승지가 3정승과 의금부 당상관(堂上官)의 뜻을 연산군에게 전하기를, “유빈이 말을 하기는 하였지만, 유빈이 직접 본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곽종원의 입에서 나왔고, 의논하자고 주장한 자는 김제신이니, 그들의 죄가 너무나 큽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곽종원이 직접 보고 이를 말하였다고 하더라도, 유빈이 이를 금지시키고 말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감제신과 함께 의논하고 아뢰었으니, 그 죄가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면서 궁중의 일을 누설한 죄로 곽종원과 김제신⋅유빈을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분노를 삭이지 못한 연산군은 그 다음날 곽종원과 김제신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도록 명하였다.

묘소와 후손

곽종원은 참형(斬刑)당한 후에,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해졌다. 그 시신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으므로, 묘소가 없다.

1504년(연산군 10) 5월, 곽종원이 처형된 후 연산군은 그의 아들에게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먼 변방으로 보내 노비로 삼았다가, 1505년(연산군 11) 3월, 곤장 70대를 더 때리고 바닷가 외딴 섬으로 추방시켰다. 그때마다 연산군은 반드시 승지를 현장에 파견하여 곤장 때리는 것을 직접 감독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 1506년(중종 1) 나라에서 그 아들을 찾아 석방시키고 벼슬을 하사하였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