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간(郭趕)

sillokwiki
Tutor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8월 14일 (금) 11:40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29년(중종 24)∼1593년(선조 26) = 6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성균관 사성(司成)⋅강릉부사(江陵府使)이다. 자(字)는 윤정(允靜)이고, 호(號)는 매당(梅塘), 또는 죽재(竹齋)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현풍 솔례리(率禮里: 솔례촌) 사람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사인(舍人)곽지견(郭之堅)이고, 어머니 상산김씨(商山金氏)는 부사(府使)김수돈(金守敦)의 딸이다. 성균관 사성(司成)곽지번(郭之藩: 곽재우의 조부)의 조카이고,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순절한 안음현감(安陰縣監)곽준(郭䞭)의 4촌 형이다. 현풍곽씨 중에서 행실을 닦아 이름이 난 곽간(郭趕)⋅곽월(郭越: 곽재우의 아버지)⋅곽준(郭䞭) 등 8명의 종형제, 이른바 ‘현풍 팔주(玄風八走)’의 맏형이다.[『성호전집(星湖全集)』 권66]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18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묘지명]

1550년(명종 5) 형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고, 1552년(명종 7)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나가서, 명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의 은자(銀子: 은화)를 수색하는 수은어사(搜銀御史)를 겸임하였다. 당시 사신 일행의 역관(譯官)과 종자(從者)들은 은화를 가지고 중국에 가서 중국 물화를 밀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매에 나섰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금지하였다. 마침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권신(權臣) 심통원(沈通源)의 짐바리가 너무 많은 것을 본 곽간은 짐을 철저히 조사한 후, 밀매한 중국 물화를 압수하여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이 사실이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되자, 심통원은 파직 당하였다.[『명종실록』 11년 11월 2일 1번째기사] 그러나 심통원의 보복을 두려워한 곽간은 거짓으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서울을 떠나서 고향 현풍으로 돌아와 10여 년 동안 은거하였다.

1566년(명종 21) 다시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믿고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키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少尹) 일파에 의하여 파직되었다.[묘지명]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 2월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파(士林派)가 득세하자, 공조⋅예조의 좌랑(佐郎)을 거쳐, 정랑(正郎)이 되었다. 내직(內職)으로는 통례원 좌통례(左通禮), 성균관 사성(司成), 장악원 판사(判事), 사제감⋅종부시 정(正) 등을 역임하였는데, 항상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외직(外職)으로는 청풍(淸風)⋅금산(金山) 현감(縣監), 정선(旌善)⋅흥해(興海)⋅영천(永川) 군수(郡守), 공주목사(公州牧使),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칭송하였다.[묘지명]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간은 그 다음해에 친구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현풍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도 초유사(招諭使)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가 관군과 힘을 합쳐서 왜군과 싸웠다. 경상도 초유사김성일이 전염병에 걸려서 막사(幕舍)에서 갑자기 돌아가자, 의병과 관군의 연합 전선이 와해되면서, 결국 친구 서사원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고향 현풍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귀향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 1593년(선조 26) 7월 23일 죽었는데, 향년이 65세였다. 문집으로 『죽재문집(竹齋文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기질이 호방(豪放)하고 기량이 컸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명종 때 벼슬길에 다시 나갔으나, 문정왕후가 불사(佛事)를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다가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하여 파직당하자, 고향 현풍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때 낙동강 가에 ‘창주정(滄洲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詩)를 지으며 즐겼는데, 이때 대다수 원고가 임진왜란의 병란(兵亂)을 겪으면서 불에 타 없어졌다. 그가 죽은 뒤에 그 후손들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남은 약간의 시문(詩文)을 모아 『죽재문집(竹齋文集)』을 간행하였는데, 그가 남긴 시문(詩文)에서 그의 호방한 기상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엿보인다.[묘지명] 당시 곽간이 가깝게 교유(交遊)한 사람들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한강(寒岡) 정구(鄭逑),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등인데, 도의(道義)로써 교유하며, 때때로 서로 만나 밤새도록 성리학의 심오한 이론을 토론하는 한편, 어려운 시국을 걱정하였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로서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들이었다. 선조 때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될 때 영남학파는 동인이 되고, 기호학파는 서인이 되었다. 그 뒤에 4색 당파로 나뉘어 당쟁(黨爭)을 벌이면서,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졌는데, 조식의 제자들은 대다수 북인이 되었다. 1590년(선조 23)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서인의 영수인 좌의정정철(鄭澈)이 최영경을 체포하여, 정여립의 패거리로 몰아서 곤장을 때려 죽였는데, 최영경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결백을 주장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현풍현(玄風縣) 구지봉(仇知峰)에 있는데, 부인 박씨(朴氏)와 합장되었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그 무덤에 묻었다.[『만구집(晩求集)』 권13]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사헌부 >감찰(監察)박순(朴純)의 딸인데,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방목>] 장남 곽재용(郭再容)은 장사랑(將仕朗)를 지냈고, 차남 곽재정(郭再定)은 참의(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장녀는 승지이언영(李彦英)의 처가 되었다. 서자는 곽순생(郭舜生)이고, 서녀는 학유(學諭)박사제(朴思齊)의 첩이 되었다.[묘지명]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대일록(孤臺日錄)』
  • 『대암집(大菴集)』
  • 『동주집(東州集)』
  • 『두와집(蠹窩集)』
  • 『만구집(晩求集)』
  • 『면우집(俛宇集)』
  • 『서애집(西厓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재집(穌齋集』
  • 『완정집(浣亭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죽재문집(竹齋文集)』
  • 『지봉유설(芝峯類說)』
  • 『후조당집(後彫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