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종(傔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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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등의 집안일을 관장하거나 관료·상인의 행차에 수행하며 시중들던 하인.

개설

겸종은 원래 관료의 공식적인 행차를 수행하며 각종 시중이나 잡무를 처리하던 종이었다. 혹은 해당 관료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여 처리하였다. 그 신분도 천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겸종의 역할과 신분에 변화가 나타났다. 겸종은 자신의 주공(主公)이 지방관에 임명될 경우 책방(冊房), 중방(中房) 등으로 따라가서 지방관청의 실무를 담당하여 실권을 행사하였다(『명종실록』 18년 6월 4일). 때로는 호조(戶曹) 등 중앙관청의 서리를 맡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노비나 하인이 아닌 양인계층의 사람들이 서울의 명문 집안인 경화문벌(京華門閥)의 겸종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당시 정권에 참여하여 서울 생활을 영위하던 경화문벌가를 주공으로 섬겨 재산 관리를 비롯한 그들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대신 나서서 처리하였다.

겸종은 18·19세기 서울의 독특한 계층으로 존재하였고, 흔히 겸종·문하인(門下人)·문객(門客)으로 불렸다. 그들은 주공가가 권세를 잡으면 선혜청이나 호조의 서리가 될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한밑천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주공가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겸종들의 경쟁

경화문벌가에는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진 겸종 수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연안이씨이만수(李晩秀) 집안은 겸종이 거의 30명에 이르렀다. 철종 연간 좌의정을 지냈던 박영원(朴永元)의 겸종으로 호조서리를 오랫동안 지냈던 이윤선(李潤善)은 그의 부친인 이기혁 때부터 박영원을 주공으로 모셨다. 즉, 대를 이어 한 집안의 겸종을 지냈다.

대신을 지내는 집안에 겸종이 수십 명에 이르고 그중에는 몇 십 년이나 혹은 몇 대에 걸쳐 겸종을 지낸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앙관청의 서리 자리가 비면 순서에 따라 임명되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 주공이 권력을 잡고 있거나 중요한 자리에 줄을 댈 수 있는 지위에 있을 때에나 가능하였다. 겸종들은 그러한 기회를 잡기 위해 여러 가지 꾀를 내기도 하였고, 한편으로 주공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서리 자리를 차지하면 자기의 재물을 늘리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주공가의 경제적 편의도 앞장서서 봐주었다. 이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였다.

2. 경화거족과 겸종의 공생 관계

겸종과 주공의 관계는 매우 끈끈하였다. 겸종이 잦은 사고를 치더라도 쉽게 내쫓지 않았다. 그것은 주공과 겸종의 관계가 단순히 주종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부자지간과 같은 관계로 인식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조태채가(趙泰采家)의 겸종이었던 홍동석(洪東錫)이 선혜청서리를 맡고 있을 때, 간관(諫官)이 자신의 주공인 조태채를 탄핵하는 장계(狀啓)를 옮겨 적도록 하였다. 홍동석은 붓을 던지면서 주공과 겸종의 관계는 부자와 같은 의리가 있고, 따라서 자식이 아버지의 죄를 적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끈끈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겸종 측은 주공의 정치적 영달이 곧 자신들이 서리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었다. 또 그것은 자신과 자기 가문의 경제적 성장, 나아가서는 이를 발판으로 한 신분 상승의 계기가 되었다. 한편 경화문벌 측으로서도 겸종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경화문벌의 살림살이는 가문의 영달과 함께 커질 대로 커졌고 복잡할 대로 복잡해졌다. 이런 살림살이를 수완 있게 요리해 줄 능력과 경험을 갖춘 겸종은 이제 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지방관으로 나갈 경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방행정의 실무를 향리들과 접촉하여 처리하는 한편, 주공의 지방 살림살이를 주공 편에 서서 챙겨 주는 존재로서도 겸종은 필요하였다. 게다가 경화문벌이 중앙권력에 진출할 때 자기 집안의 겸종을 중앙관청의 요소요소에 밀어 넣어 두는 것은 정보의 수집, 연락의 편의 등 자기 집안의 가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공과 겸종은 끈끈한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의 이익을 돌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공과 겸종이라는 개인적인 관계가 관원과 서리, 지방관과 책방이라는 공적인 관계로 아무런 제한 없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당대의 구조적인 모순을 보여 준다. 관리와 서리라는 공적인 자리에서조차 그들은 사적인 관계를 더 중요시하였다. 더구나 이해관계에 의해 결합된 양자의 관계에 부자의 의리라는 유교적 윤리까지 덧붙여져 그러한 측면은 더욱 강해졌다.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유봉학, 「일록 『공사기고(公私記攷)』에 나타난 19세기 서리의 생활상」, 『규장각』 13,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