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박람회(美國博覽會)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2:25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1893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

개설

시카고박람회 참가국은 총 47개국이었는데 한국은 중국·일본과 함께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여 정식으로 한국관을 개설하고 출품하였다. 정경원(鄭敬源)은 출품사무대원(出品事務大員)으로 부임하여 그때까지 완공하지 못한 한국관을 완공하고 12명이 출품한 가마·관복·부채·짚신·화승포 등 21종의 16궤 물품을 전시하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윤치호는 한국의 출품이 빈약하기 그지없고 부끄러울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정경원은 미국에서 약 6개월간 머물렀는데, 그때의 체험을 여러 형식의 글로 남겨놓았다.

내용 및 특징

한국인이 세계박람회에 참석한 것은 1883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파견된 민영익(閔泳翊) 일행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참가는 단순한 관람자로서의 입장에 불과하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이듬해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부임하자 1883년 보빙사절로 미국에 파견된 민영익·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이 9월 3일부터 개최된 보스턴박람회를 견학하였다. 이때 민영익이 박람회장을 방문한 뒤 소지하고 있던 자기·화병·주전자 등을 내놓았다고 하지만, 이는 출품 대원 자격이 아닌 비공식적인 일이었다.

실록에 등장하는 미국박람회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되었던 ‘콜럼버스 세계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 이하 ‘시카고박람회’로 약칭)를 지칭하였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시카고박람회는 한국이 참석한 최초의 세계박람회였다. 시카고박람회 참가국은 47개국으로 한국은 중국·일본과 함께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고, 정식으로 한국관을 개설하고 출품하였다. 민영익의 보스턴박람회 참관이 단순한 ‘관람국’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시카고박람회를 계기로 한국은 세계박람회에 독립적인 ‘참가국’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된 것이었다.

변천

고종은 1893년 3월 12일에 출품사무대원으로 정경원을 임명하였다. 공식적인 박람회대표단은 행정사무원 최문현(崔文鉉)과 통역사 안기선(安琪善), 그리고 축하사절단인 국악단원 10명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되었다. 시카고 현지에서는 미국 유학생 박영규와 서병규가 통역으로 임명되어 통역에 익숙하지 않은 안기선의 업무를 대신하였다. 국악단원들은 5월 1일 개막일에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조선전시관이 소재한 제품전시관을 지날 때 풍악을 올린 뒤, 경비 절약을 이유로 5월 3일 귀국길에 올랐다.

박람회대표단 일행은 1893년 3월 25일에 부산항을 출발하여 일본 시모노세키, 고베,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4월 28일 시카고 유니온역에 도착했다. 한국관은 히긴보담의 설계로 이채현 대리공사에 의하여 제품전시관 내 B군 C-D 20-23에 개설하였다. 정경원은 그때까지 완공되지 못한 한국관을 완공하고 12명이 출품한 가마·관복·부채·짚신·화승포 등 21종의 16궤 물품을 전시하였다. 이 중 5종은 박람회 당국으로부터 메달을 받을 정도로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정경원이 귀국한 뒤 고종과 행한 문답에 의하면, 이 5종의 물품은, 옷감·문발·자리·자개장·수를 놓아 만든 병풍이었다. 한국 물건들에 호기심과 관심을 가진 외국인 관람자들을 일일이 응대할 수 없어 물품명과 용도를 종이에 써서 물품에 붙여 놓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밴크로프트(Hubert Howe Bancroft)는 한국관을 둘러보고 ‘장난감 같은 조선 전시관’에 볼품없는 출품이었다는 감상평을 내놓았다. 당시 미국에 체재하고 있던 윤치호 또한 시카고박람회를 구경하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는데, 관람자의 찬사를 받는 일본 전시관에 비하여 한국의 출품은 빈약하기 그지없고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평가하였다.

“박람회에서 두 낮과 밤을 보냈다. 건물의 웅장함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중국 전시관은 아주 형편이 없다. 상아조각 외에는 멋과 섬세함이 도저히 중국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중국화에는 보잘것없는 무늬들뿐인데! 일본 전시관은 모두가 찬사를 보낸다. 일본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시암과 버마도 전시관을 내었다. 조선도 조선 기술, 세련되지 못하고 모자란 것들을 모아 작은 전시관을 내었다. 예술품이라고 내놓은 것이 빈약하기 짝이 없어 부끄러웠다. 반면 그곳에 있는 조선 국기가 나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미드웨이 플레이상스(Midway Plaisance)’ 전시관은 실패이다. 이방 회교도들의 연극은 보잘 것이 없다. 각국 미인이 모인 ‘콘그레스 뷰티(Congress Beauty)’관에는 여러 모양의 다양한 화장을 한 예쁜 여자들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중국 광동 지방 여성이 창피스럽게도 가장 추한 여성이 되었다(『윤치오일기』 1893년 9월 24일).”

출품사무대원 정경원은 미국에서 약 6개월간 머물렀는데, 자신이 보고 듣고 직접 체험한 일상을 여러 형식의 글로 남겼다. 통칭 ‘정경원문서’로 불리는 이 자료들은 후손들이 소장해 오다가 1998년 역사가 이민식에 의하여 발굴되어 『근대 한미 관계사』(백산자료원, 2001)와 『콜럼비아 세계박람회와 한국』(백산자료원, 2006)으로 번역·수록되었다.

참고문헌

  • 윤치호, 『윤치호 영문 일기 2』(한국사료총서 번역서 2), 국사편찬위원회, 2014.
  • 이민식, 『개화기의 한국과 미국 관계: Historical Focus』, 한국학술정보, 2009.
  • 이민식, 『세계박람회 100장면: 1851년 런던 세계박람회에서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까지』, 이담북스, 2012.
  • 이민식, 『세계박람회란 무엇인가?』, KSI한국학술정보(주), 2010.
  • 육영수, 「‘은자(隱者) 나라’ 조선 사대부의 미국문명 견문록: 출품사무대원 정경원과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세계박람회」, 『역사민속학』 제48호, 한국역사민속학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