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유석(魂遊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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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陵園)이나 묘(墓)의 봉분 앞에 설치된 직사각형의 돌로 된 상석.

개설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돌이다. 제의(祭儀)를 올릴 때 제물(祭物)을 놓기 위해 만든 돌상은 조선 선조 이전까지는 석상(石床)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왕릉에서 지내는 불교식 제의에서 사용되던 기물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릉에서 직접 제의를 하지 않고 정자각(丁字閣)에서 유교식 제례를 올리게 되자 용도가 없어진 석상을 조선후기에 속칭을 따라 혼유석이라 하였다.

변천 및 특징

(1) 연원 및 변천

왕릉에 석상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이며 고려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일반화되었다. 개성시 개풍군에 위치한 공민왕릉은 공민왕이 생전에 직접 묘의 조성을 진행하여 조형미가 뛰어나고 명나라의 제도를 반영하고 있어 조선시대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는데 불교식 제의에 따라 각각의 봉분 앞에 제물을 올리는 석상을 놓고 절을 하기 위한 배석(拜石)을 설치하였다.

조선초기의 왕릉과 제의는 고려의 전통을 따랐으나 세종대에 와서 왕릉에서 지내는 불교식 제의는 거의 사라지고 정자각에서 지내는 유교식 제의가 정착되었다. 정자각은 왕릉이나 원 앞에 지은 丁(정) 자 모양의 전각이다. 제의의 형식이 바뀌면서 기존에 불교 의례에 사용되던 왕릉 석물들이 많이 사라졌으나 석상과 분묘 앞을 밝혀주는 장명등(長明燈)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조선시대 왕릉에서도 지속적으로 설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전기까지는 주로 석상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다가 선조 때 혼유석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혼유석은 축문(祝文)을 읽어 불러온 혼이 그 위에 앉아서 흠향(歆饗)하는 자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다른 묘제 석물들과는 달리 사대부들의 묘에서 먼저 일반화된 석물이다. 17세기 이후 유행하게 되자 왕릉 석상의 명칭에 적용된 사례이다.

(2) 특징

혼유석 즉, 석상은 주로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지대석 귀퉁이에 받침돌인 족석(足石)을 놓은 후 석상을 올렸다. 석상의 규모는 태종대까지 길이가 11자(약 3.3m)이었다가 세종대에 9자 9치(약 3m)로 줄였으며 정조대에는 8자(약 2.4m)로 규정하였다. 너비는 6자 4치(약 1.9m), 두께는 1자 5치(약 0.5m)로 제작되었다. 4개의 족석 중앙에는 액막이의 의미로 나어두(羅魚頭)를 새겼다. 나어두는 귀신의 얼굴을 돋을새김으로 새긴 것이다. 석상은 봉분이 하나일 때에는 봉분 앞에 놓는 것이 원칙이고, 합장한 경우와 봉분이 두 개 이상인 경우에는 그 수효대로 설치하였다.

일반 백성의 묘에 설치한 혼유석은 봉분-(묘표)-혼유석-상석-향로석의 순서로 봉분 앞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참고문헌

  • 정해득, 『조선 왕릉제도 연구』, 신구문화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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