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음주의(鄕飮酒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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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시행하는 음주(飮酒) 의례.

개설

개성부(開城府)와 각 도의 주(州)·부(府)·군(郡)·현(縣) 단위로 매년 음력 10월인 맹동(孟冬)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지방관이 관할 지역의 나이 많고 덕이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존경의 뜻으로 읍양(揖讓)의 예를 지켜 술을 마시는 의례이다.

연원 및 변천

지방에서 행하는 음주례는 『세종실록』 「오례」에서 처음 제정되었고(『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향음주의), 이는 다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이어졌다.

1479년(성종 10) 1월 정성근(鄭誠謹)은 향음주례의 규정이 『국조오례의』에 기재되어 있음에도 주·군에서 이를 봉행(奉行)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이 법을 밝혀 각 고을에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성종실록』 10년 1월 20일). 이에 성종은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여 향음주례의 의식(儀式)이 이미 예문(禮文)에 실려 있으므로 그 거행 여부는 오로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성종실록』 10년 1월 22일). 예조 역시 성종의 지적에 동의하면서 유수(留守)와 관찰사(觀察使)에게 향음주례 시행을 독려할 것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 10년 2월 12일).

한편 김종직(金宗直)은 1483년(성종 14) 8월에 시강관(侍講官)으로 경연에 참여하여 자신이 수령으로 재직할 때 향음주례를 시행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향음주례가 풍속 교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성종실록』 14년 8월 16일). 1490년(성종 21) 윤9월에 윤효손(尹孝孫)은 향음주례 시행을 활성화할 방안을 마련할 것을 건의했고, 성종이 이를 수용하여 해당 관서에서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다(『성종실록』 21년 윤9월 5일).

중종대에도 향음주례 시행을 독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타났다. 1516년(중종 11) 1월 중종은 근래 향음주례가 시행되지 않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예조로 하여금 지방관들을 효유(曉諭)하여 향음주례를 제도에 따라 시행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중종실록』 11년 1월 25일). 1517년(중종 12) 3월에는 집의(執義)유보(柳溥)가 향음주례가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당시 상황을 비판하였다(『중종실록』 12년 3월 25일). 하지만 중종이 1526년(중종 21) 7월에 팔도관찰사에게 글을 내려 향음주례 시행을 신칙(申飭)했던 것이나, 1543년(중종 38) 10월에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여 향음주례가 거행되지 않는 상황을 지적한 일을 볼 때, 계속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향음주례가 규정대로 시행된 일은 상당히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중종실록』 21년 7월 21일)(『중종실록』 38년 10월 27일).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향음주의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사 1일 전에 주인(主人)이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와 재행(才行)이 있는 자를 빈(賓)으로 정해 알린다. 이때 주인은 해당 지역 지방관이 담당했다. 행사 당일 학당(學堂)에 향음주례의 자리를 마련한다.

빈과 중빈(衆賓)이 시간에 맞춰 모이면 주인이 나와 맞이한 후 읍양하고 먼저 들어가고 빈과 중빈도 들어간다. 당에 이르면 주인과 빈이 마주서서 빈이 재배(再拜)하면 주인이 답하여 절한다. 집사자가 주탁(酒卓)을 설치하고 술을 따르면 주인이 빈에게 드린다. 빈도 주인에게 수작(酬酌)한다. 뜰에 있는 이들에게는 집사자가 술을 돌린다. 술을 5잔 돌린 후에 주탁을 치운다. 빈과 주인이 일어나면 사정(司正)이 자리로 나와 향음주례 거행의 의미를 설명한다.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2번 절한 후 빈과 중빈이 나가며, 주인은 문 밖에서 전송한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향례합편(鄕禮合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