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군(咸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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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함안군(咸安郡)은 아시량국(阿尸良國)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함안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함주자사(咸州刺史)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함안군이 되어 김주(金州: 현 경상남도 김해시 일원)의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부터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1373년(고려 공민왕 22)부터는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함안군은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지군사는 군수(郡守)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함안군은 진주부(晉州府)에 소속되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함안군의 중심지는 현재의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함안군은 아시량국에서 기원한다. 신라 법흥왕 때 아시량군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함안군으로 개명하여 영현(領縣) 두곳을 거느렸다. 고려 건국 후인 995년(고려 성종 14)에 함주자사가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다시 함안군으로 복구되고 김주에 내속되었다. 1172년에 감무가 처음 파견되었으며, 1373년에 감무를 지군사로 승격하였다. 함안군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1466년(세조 12)에 지군사를 군수로 개칭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함안군은 신라 경덕왕 때 9주 중 강주(康州) 경내의 함안군으로 편성되어 현무현(玄武縣: 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일대로 비정)과 의령현(宜寧縣) 두 곳의 영현을 거느렸다. 당시 함안군에는 지방관으로 군태수(郡太守)가 파견되었다. 함안군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함주자사가 되었으나 곧 폐지되고 함안군으로 복구되어 김주 소속으로 편성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처음 파견하였으며,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지군사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도 함안군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지군사 대신 군수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 함안에는 감무가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함안군수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종4품의 군수와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4품의 문관(文官) 혹은 무관(武官)이 군수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50명, 인리(人吏) 29명, 지인(知印) 17명, 사령(使令) 20명, 관노(官奴) 7명, 관비(官婢) 6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4품의 군수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 함안군의 읍치와 관아는 오늘날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함안군은 조선시대 내내 별다른 연혁 관계의 변동이 확인되지 않는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함안군은 진주부(晉州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함안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3등군으로 편제되었다. 함안군은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현재도 함안군으로 이어진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