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패(捕盜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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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야간에 다방면으로 도적을 체포하기 위해 외방의 한량과 아전 가운데 선별된 관리.

내용

조선초기 포도 활동은 군병과 형조 혹은 지방관 등이 본 업무 외에 부수적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기존의 포도책으로 도적을 단속하기 어렵게 되자, 1451년(문종 1) 형조(刑曹) 판서(判書)허후(許詡)가 포도 전담관인 포도패(捕盜牌)를 조직하자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포도패 설치에 대한 찬반 논쟁은 ‘포도(捕盜)’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의견으로 귀결됨에 따라, 포도패의 설치가 무산되었다.

이후 1457년(세조 3) 세조가 포도책을 마련하면서 포도패가 조직되었다. 이때 포도패는 외방의 한량(閑良)과 아전(衙前) 가운데 선별되었고, 야간에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도적을 체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용례

刑曹判書許詡嘗啓 中外盜賊興行 請令京中軍士 作捕盜牌 搜捕 下政府 議之 河演皇甫仁南智以爲 宜如詡所啓(『문종실록』 1년 6월 4일)

참고문헌

  • 차인배, 「朝鮮時代 捕盜廳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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