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부(退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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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과와 무과에서 부자(父子)가 함께 급제할 경우 그 아들의 방방(放榜)을 다음번으로 물려서 하는 것.

개설

조선시대에는 문반 관료를 선발하는 문과와 무과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응시하는 것을 피하게 함으로써, 부자가 함께 급제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특히 왕이 참석한 친림시(親臨試)와 지방에서 시행한 특별 시험인 외방별과(外方別科)에서는 부자(父子)가 함께 응시하는 것은 허용하되, 응시한 부자가 함께 급제하였을 경우에는 그 아들을 급제자 명단을 발표하는 방방에 함께 넣지 않고, 다음번으로 물려 방방함으로써 성리학적 윤리를 밝히도록 하였다. 이렇게 문과에서 급제자 명단 발표를 다음번으로 물려서 하는 것을 퇴부(退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과(武科)에도 해당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으며 삼강오륜의 윤리를 강조한 조선시대에는 문반 관료를 선발하는 문과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응시하는 것을 피하게 하였는데, 궁극적으로는 부자가 함께 급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식년시의 초시와 같이 관시·한성시·향시의 여러 종류가 있는 시험에서는 부자가 함께 초시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지만, 복시의 경우에는 아들로 하여금 다음번 시행되는 식년시의 복시에 응시하도록 하는 진시(陳試)가 『경국대전』에서 규정되었다.

변천

조선후기로 가면서 다양한 이름의 별시(別試)들이 실시되고, 특히 왕이 직접 나와 시험을 주재하는 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정시(庭試)와 같은 친림시와 외방별과가 시행될 때에는 부자가(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응시하는 것은 허용하되, 응시한 부자가 함께 급제하였을 경우에는 그 아들을 급제자 명단을 발표하는 방방에 함께 넣지 않고, 다음번으로 물려 방방함으로써 성리학적 윤리를 밝히도록 하였다. 이렇게 문과에서 급제자 명단 발표를 다음번으로 물려서 하는 것을 퇴부(退付)라고 하였다. 이는 무과에도 해당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무과의 퇴부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717년(숙종 43) 온양 주민을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된 온양별과(溫陽別科)에서 아들 이유춘(李囿春)이 장원(壯元)을 하고, 그 아버지 이성채(李星彩)가 2등으로 급제하자 모두 함께 방방하였다. 이후 이것을 전례삼아(전례로 삼아) 함경도 무과에서도 이춘정(李春禎) 등의 부자를 함께 방방하였다. 더구나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숙종은 “아들이 장원이 된 경우에는 이유춘 부자의 경우처럼 모두 방방할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이 명령은 윤리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원래대로 퇴부의 원칙을 복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숙종실록』 43년 10월 7일). 따라서 다음해 왕은 사헌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친림시와 외방별과에서는 부자가 함께 응시하는 것을 일체 금지시켰으며, 이러한 전교는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을 거쳐 『속대전』에서도 그대로 수록되었다(『숙종실록』 44년 1월 5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속대전(續大典)』
  • 『무과총요(武科總要)』
  • 차미희, 『조선시대 문과제도연구』, 국학자료원, 1999.
  • 차미희, 「조선후기 문과제도-응시자격을 중심으로」, 『사총』 45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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