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서(忠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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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마음과 배려하고 헤아리는 마음을 아울러 일컫는 말.

개설

공자는 자신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고 하였다. 증자(曾子)는 공자의 도를 실천하는데 그 원리를 충(忠)과 서(恕)로 개괄하였다. 증자의 충서(忠恕)는 공자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져, 동양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통해 공자가 주장한 인(仁) 사상을 실천하려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공자는 증자를 불러 나의 도(道)는 하나로 관통하였다 하였다. 증자는 그것을 바로 수긍하고 충서(忠恕)로 이해하였다. 『중용』에서는 충서가 도로 나가는 것이 멀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몸에 베풀어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충과 서의 성리학적 의미는 자기의 순수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이고, 그 순수한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나가는 것이 ‘서’이다. 즉 ‘충’은 내적인 것이고 ‘서’는 외적인 것이므로, 충서는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학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학자들은 충서를 통해 공자의 도와 인 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변천

조선 성종대에 손순효(孫舜孝)는 충서 두 글자에 유념하기를 바랐다. 성종이 충서의 도(道)를 논하라고 하자, 손순효는 "속마음[中心]이 충이 되고 마음과 같음[如心]이 서(恕)가 됩니다."라고 하면서, 왕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마음으로써 자기를 책망하면 충서의 도가 극진할 것이라고 하였다(『성종실록』 13년 12월 15일). 손순효는 녹봉이 없는 양계 지역 만호의 어려움을 상소하면서, 편안한 사람은 위태한 사람의 걱정을 생각하고 배부른 사람은 굶주린 사람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충서의 도리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6년 3월 25일). 중종대 성균관 대사성유숭조(柳崇祖)가 『강목십잠(綱目十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를 바치면서 충서의 마음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효유할 수 없다고 하여 왕이 충서의 도리를 다하도록 하였다. ‘충’은 수기(修己)를 위한 것이고 ‘서’는 치인(治人)을 위한 큰 덕목이기 때문이다.

숙종대 헌납(獻納)이윤문(李允文)의 상소에 의하면, 말세의 인심은 사납고 악독하므로 아무리 관후(寬厚)하고 충서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그 행정(行政)을 위임하더라도 원망이 없도록 하는 것은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였다(『숙종실록』 34년 12월 13일). 말세에는 충서한 사람도 인의 정치를 실현하기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다.

영조대 김상익(金尙翼)은 영조의 능 거둥 정지를 요청하는 신하들을 왕이 엄책한 것과 관련해 상소를 올려, "왕이 거절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엄중하게 꾸짖기를 너무 심히 하시고 조금만 거스린 점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함이 없으시니 ‘충서’ 두 글자가 어디서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여 신료(臣僚)들에 대한 능멸을 멈출 것을 권유하였다(『영조실록』 7년 7월 12일).

정조는 좌의정서명선에게 조정에 빨리 나올 것을 회유하며, "여러 관원을 감독하고 경계하여 모든 직무에 힘쓰게 하며 충서의 도리로 미루어 나가고 광필(匡弼)의 의리로 돕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것이 하나가 되어 법도에 들어맞으면 세상이 다스려지 않고 풍속이 바로잡히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충서의 도리를 언급하였다(『정조실록』 4년 5월 16일).

철종대에 송능상(宋能相)과 권돈인(權敦仁)을 탄핵하는 충청도·전라도 유생 박춘흠(朴春欽) 등의 상소를 접한 철종은 두 현인의 부당한 단락을 모아 말을 만드니 이는 충서의 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물러가도록 명하였다(『철종실록』 2년 9월 9일).

참고문헌

  • 『논어(論語)』
  • 『중용장구(中庸章句)』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