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사(築城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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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이 필요할 때 임시적으로 설치된 축성도감의 관직.

개설

고려중기에 있었던 몽골군의 대규모 침입은 기존 산성의 시험대가 되었으며, 장기 농성이 불가능한 곳은 점차 도태되었고, 포위 공격이 어렵고 수원(水源)이 풍부하며 사람과 말을 충분히 수용할 공간이 있는 험준한 곳으로 입보산성(入保山城)이 이전되었다. 이 시기의 산성은 긴급한 상황하에서 축조되다 보니 자연 정교성이 떨어졌다. 고려말 왜구를 대비하여 수리·구축한 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종대에 전국적으로 3, 4식(息) 즉, 35~47㎞ 거리를 두고 일률적으로 입보산성을 마련하도록 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축조 방식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세종대 이후 읍성 위주의 방위책이 중시되면서 산성은 퇴조하였다. 이러한 변화에서 성종대에 명(明)이 진보(鎭堡)를 설치하자, 내국인의 이탈을 막기 위해 행성 축조가 다시 추진되면서 축성도감을 설치하고 축성사(築城司)를 파견하여 행성 축조를 일임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행성 축조는 성종대와 연산군, 중종 초기까지만 치폐를 거듭하고 시행되지 않다가 임란 이후에 방어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다시 시작하게 된다.

담당 직무

축성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축성사에 대한 기록은 성종대에 처음 등장한다. 축성사는 산성 및 행성 등을 축조할 때 전반적인 실무를 담당한 관리였다.

변천

변경이나 기타 요충지의 방어선에 구축되는 행성은, 세종대의 보다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방어 체제 구축 과정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충청·전라·경상도의 하삼도(下三道)를 중심으로 한 연해 지역에서는 읍성 구축으로, 북방에서는 읍성·영진성보(營鎭城堡) 등의 외곽에 행성을 축조하는 것으로 구획되었다. 행성 축조 사업은 세종의 강력한 추진으로 당대에만 60만 척 이상을 축조하였으나 많은 인력을 동원하는 대역사(大役事)인 데다가 반대하는 의견도 많아 문종대 이후로는 거의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종대에 와서는 명이 남만주 일대에 진보 설치를 계속 확대하면서 중국의 의도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내국인의 이탈을 막기 위한 관문(關門) 설치를 위하여 의주 일대의 행성 축조가 다시 추진되고, 통산 수만 척 이상의 행성이 추가로 축조되었다. 성종대의 이러한 행성 축조를 위해서 축성을 위한 임시 기구인 축성도감을 설치하였고 축성사로 이극균을 임명하였다(『성종실록』 16년 10월 16일). 그러나 축성사라는 관직은 축성도감이 폐지된 후 함께 사라졌다.

참고문헌

  • 유재춘, 「조선전기 행성축조에 관하여」, 『강원사학』 13, 강원대학교사학회, 1998.
  • 유재춘, 「중세 산성의 특징적 유형과 변천」, 『강원사학』 17·18, 강원대학교사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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