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도감(築城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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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이 필요할 때면 도성이나 변방에 관계없이 그때마다 설치하여 운영하던 임시 기구.

개설

도감(都監)은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일이 있으면 설치했다가 일이 끝나면 폐지하는’ 성격을 띠었다. 도감은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중요행사나 시급히 처리할 국가사업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하였으며, 때로는 상설 아문보다 높은 권력을 행사하며 사안을 주도하였다. 도감 설치에는 별도의 예산이 필요했으므로, 임시적으로 운영된다 하더라도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는 측면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이러한 도감이 200여 차례가 넘게 설치되었다. 축성도감도 이렇게 설치된 임시기구로 성을 쌓거나 할 때 설치된 기구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산이 많고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입보농성(入保籠城)의 전략을 주로 이용하여 외적에 대응해왔다. 입보농성이란 좌우로 작은 계곡을 이루며 물이 흐르는 곳에 성을 축조하여, 백성들이 그곳에 들어와 외적을 방어하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술은 대략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후기에 가장 성행하여 농한기를 이용하여 산성을 수축하기도 하였다. 이는 왜구가 내륙 깊숙이까지 침범하였기 때문에 내륙지역의 주민들을 산성으로 들어와 지내게 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구가 극복된 이후에는 평지에 읍성을 수축하여 산성과 연해 읍성 및 내지의 읍성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여러 고을이 한꺼번에 성안에 들어올 수 있는 대규모의 산성이 수축되어 경영되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이후로는 산성의 효용성보다는 수륙 진관체제의 정비에 따라 읍성의 축조와 연해 지역 진보의 축조가 이루어져 산성은 유사시에 대비한 군창의 역할로 전락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 대규모 관급공사가 있으면 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도감이 설치되면 최고책임자로 고위관료가 임명되었다. 축성도감은 조선전기에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기구로 중종대 이후에는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축성도감은 조선전기에 산성의 재건 및 보수 등을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되었지만, 나라의 국방 정책이 변경됨에 따라 존속되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조직 및 역할

축성도감은 1492년(성종 23) 6월 5일 기록에서 처음 확인된다(『성종실록』 3년 6월 5일). 1493년(성종 24) 7월 24일에는 축성도감에 의주의 지도를 주어 평안도 북방의 축성 사업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성종실록』 24년 8월 18일). 성종대에 설치된 축성도감은 당시 평안도 지역에서 이루어진 축성 사업을 관장한 것으로 보이나, 이후 그것의 혁파 시기는 나와 있지 않다. 연산군대에는 축성도감을 폐지하라는 분명한 기록이 보인다. 1507년(중종 2)에도 경상도의 삼포 지역에 축성도감이 설치되었는데(『중종실록』 2년 9월 29일), 삼포의 축성이 끝나고 혁파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변천

연산군대의 경우 도성의 수축을 위해 축성도감을 두었고, 성종대에는 평안도의 축성을 위해 설치했다. 즉 축성이 필요할 때면 그때마다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참고문헌

  • 나영훈, 「조선전기 도감의 운영과 관제정비」, 『한국사연구』162, 한국사연구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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