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전(千秋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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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사정전 서쪽에 있는 부속 전각.

개설

천추전(千秋殿)은 경복궁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의 부속 편전으로 동쪽의 만춘전(萬春殿)과 함께 짝을 이루는 건물이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사정전 권역에는 중앙에 사정전, 동서쪽에 각각 만춘전, 천추전이 가로로 배치되었다. 세 전각을 둘러싸는 행각에 의해 독립된 영역을 구성하였다. 사정전은 왕의 일상적인 집무 시설로서 매일 상참(常參)과 경연(經筵) 등이 이루어졌다.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는 데 비해 천추전과 만춘전에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사정전의 쓰임새를 보완하였다. 전각의 이름은 동쪽이 만춘, 서쪽이 천추로서 동쪽을 높이 보았다.

변천 및 현황

태조 당시의 경복궁 창건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세종대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이때 경복궁을 정비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대에 중건되었다. 중건할 때 서사관(書寫官)은 정범조(鄭範朝)였다(『고종실록』 2년 9월 17일). 만춘전이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복원한 것과 달리, 천추전은 고종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형태

「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에는 천추전과 만춘전이 사정전 영역 바깥에 행각으로 연결되어 지금과는 모습이 달랐다. 「북궐도형(北闕圖形)」에 따르면,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모두 24칸의 규모이다. 전후좌우의 1칸은 퇴칸으로 각 6척 규모이며, 다른 칸들은 8척으로 이보다 크다. 정면에서 보아 중앙부 2칸은 대청이고, 좌우에 퇴칸을 포함하여 각 2칸씩을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온돌방의 전면부 퇴칸은 마루이나 측면과 후면은 방으로 시설하였다. 기둥은 각기둥을 썼고 겹처마 팔작지붕이다.「북궐도형」에도 ‘무익공(無翼工)’이라 기록되었다. 지붕에는 회를 바르는 양상도회, 즉 양성바름을 하지 않아 사정전과 위계상 차별을 두었다. 전면 중앙의 대청이 2칸이라 계단을 중앙에 둘 수 없어 두 칸의 대청 중에서 서쪽 칸에 맞춰 치우쳐 설치하였다. 뒷마당에는 온돌과 연결된 2개의 굴뚝이 있다. 천추전 앞쪽 행각에는 내탕고(內帑庫)를 두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경복궁 천추전에서 훙서하였다[『단종실록』 총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흉례」에 따르면, 왕은 편전인 사정전에서 승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1467년(세조 13)에는 세조가 천추전에서 유자광(柳子光)을 인견한 적이 있다(『세조실록』 13년 7월 14일). 1892년(고종 29)에 천추전 북쪽 행각에서 화재가 일어나 용무분(用敷門) 행각까지 번졌으나 더 확장되지 않고 꺼졌다(『고종실록』 29년 10월 13일). 이때의 화재는 김원식(金元植)과 이순만(李順萬)이 파수하다가 파수등이 깨져 바람에 불이 꺼지려 하자 군막 가에 두었는데, 이것이 주변의 기름통에 옮겨 붙어 일어난 것이었다.

참고문헌

  • 「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