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언해(中庸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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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대에 『중용(中庸)』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 한 책.

개설

『중용언해(中庸諺解)』는 선조의 명에 따라 중국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중용』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 한 책이다. 1책 55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587년(선조 20)에 완성되었다. 간행은 1590년(선조 23) 교정청(校正廳)에서 담당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언해 사업이 본격화한 것은 선조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에 유숭조(柳崇祖)·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은 경전(經典)에 토를 붙이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유희춘(柳希春)은 1574년(선조 7)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언해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고 먼저 『대학(大學)』, 『논어(論語)』의 주석서를 만들어 바쳤다.(『선조실록』 7년 10월 19일)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선조는 1585년(선조 18)에 교정청을 설치하고, 경서에 구결을 달아 언해를 하도록 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 18년 1월 1일) 그리고 이렇게 간행한 교정청본을 관본(官本)이라고 하여 개인본과 구별하였다. 이 사업에는 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한백겸(韓百謙)·정개청(鄭介淸)·정철(鄭澈) 등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이듬해인 1586년(선조 19) 『소학(小學)』을 시작으로 1587년(선조 20)에는 사서삼경의 언해가 모두 끝이 났다.(『선조실록』 20년 12월 25일) 그리고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 중인 원간본에 ‘만력십팔년칠월일(萬曆十八年七月日)’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1590년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35.4cm, 가로 23.6cm이다. 교정청에서 금속활자인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로 간행하였고,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원간본이 도산서원에 소장 중이다.

『중용언해』는 다른 사서의 언해와 마찬가지로 여러 번 중간되어 그 이본(異本)이 많은데, 많은 본들이 ‘만력사십년(萬曆四十年)’, ‘숭정사년(崇禎四年)’, ‘강희이십삼년(康熙二十三年)’, ‘강희삼십이년(康熙三十二年)’의 내사기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각각 1612년(광해군 4)·1631년(인조 9)·1684년(숙종 10)·1693년(숙종 19)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1693년판만 원종목활자본(元宗木活字本)이고 나머지는 모두 목판본이다.

이 밖에 ‘세경오중춘개간전주하경룡장판(歲庚午仲春開刊全州河慶龍藏板)’, ‘경진신간내각장판(庚辰新刊內閣藏板)’, ‘무자신간영영장판(戊子新刊嶺營藏板)’, ‘임술계춘영영중간(壬戌季春嶺營重刊)’, ‘병오맹추함경감영개간(丙午孟秋咸鏡監營開刊)’의 간기를 가진 것도 있다. 모두 목판본인데 각각 1810년(순조 10)·1820년(순조 20)·1828년(순조 28)·1862년(철종 13)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고, 함경감영본은 그 간행연도를 알 수 없다.

구성/내용

사서 중의 하나인 『중용』은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서, 불편불의(不偏不倚) 무과불급(無過不及)한 중용의 도를 드러내고 이를 실현하는 힘으로 성(誠)을 들고 있다. 즉 ‘중(中)’은 도덕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일체 정감의 뿌리이자, 일체 현상의 근원이다. 『중용』에서 ‘중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라고 한다. ‘용(庸)’의 의미에 대해 정현(鄭玄)은 ‘용(庸)은 용(用)이다’라고 하면서, ‘용(庸)은 상(常)이다. 중(中)을 쓰는 것이 떳떳한 도리다’고 하였다. 주희는 평상(平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용(庸)에는 용(用)과 상(常)의 뜻이 있음을 담고 있다. 떳떳한 이치는 항상 쓸 수 있는 ‘상용(常用)’이며, 상용할 수 있는 것은 평범해 보이는 중도(中道)라는 것이다.

사서의 언해들은 모두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 국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책들은 표기법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으나, 다만 선조 대에 나온 본들에는 방점(傍點)이 표기되어 있지만 광해군 대의 본이나 기타 본에는 방점 표시가 없다. 광해군 대의 본을 중심으로 볼 때 표기법 중 특기할 만한 것은 ‘ㅿ’자와 ‘ㆁ’자의 사용을 들 수 있다. ‘ㅿ’자는 ‘ㅇ’이나 ‘ㅅ’으로 나타나 상당히 혼란된 양상을 보이며 한자음의 표기에는 ‘ㅿ’자가 많이 쓰였다. 어두자음군은 ‘ㅂ’계와 ‘ㅅ’계가 두루 쓰였다. ‘되―(爲)’는 ‘도외―’, ‘도이―’, ‘되―’가 공존하고 있으며, ‘―’의 사동형은 ‘이―’, ‘이―’가 다 쓰였다. 그리고 ‘―도다’에 대한 ‘―두다’가 보이고, 비교를 나타내는 조사에는 ‘―에셔’, ‘―도곤’, ‘―두곤’이 쓰이고 있어, 이 책은 16세기와 17세기를 잇는 과도적 교량의 특성을 보인 것이라 생각된다.

『중용언해』의 원간본인 도산서원본은 방점을 표기한 마지막 문헌이므로 성조(聲調)의 붕괴 과정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중세 국어와 근대 국어의 분기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언어 사실이 반영되어 있어, 국어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책에서는 어중(語中)에서 ‘일쯔기’에서처럼 ‘ㅉ’이 보이고, ‘ㅿ’은 강조를 나타내는 접미사인 ‘’와 ‘誠이’, ‘小人쇼’ 등에서처럼 한자음에만 사용되고 있으며, 분철표기(分綴表記)도 많이 나타나, ‘몸으로’, ‘사을’, ‘親홈이’, ‘너김은’, ‘몸을’, ‘이’ 등처럼 쓰인다. 그리고 ‘받[外]’과 같은 표기도 보인다.

내사본이나 간기가 있는 책은 모두 10행 19자본과 10행 17자본으로 대별될 수 있다. 선조 대에 나온 본에만 방점이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ㅿ’과 ‘ㆁ’은 선조본·광해군본에 사용되고 있고, 인조본·숙종본은 혼용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 언해문의 한글표기에만 차이가 조금 있을 뿐, 어휘상 · 문법상의 차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헌들로서는 표기법사(表記法史)나 음운사(音韻史) 연구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문법사나 어휘사의 연구에는 많은 도움을 받기는 어렵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김학주, 『대학·중용』,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 성백효,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9.
  • 이숭녕, 「대학 언해의 율곡본과 관본과의 비교연구」, 『동교민태식박사고희기념 유교학논총』, 1972.
  •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자료에 대한 종합적 연구」, 『규장각』 3, 서울대학교,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