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과(竊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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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답안지의 피봉을 뜯고 부탁받은 응시자의 피봉을 바꾸어 붙이는 것.

개설

절과(竊科)는 봉미관(封彌官)이나 서리(書吏)를 매수하여 합격한 사람의 시권(試券)의 피봉을 몰래 뜯어서 자기의 피봉을 바꾸어 붙이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붙어야 할 사람이 떨어지고 떨어져야 할 사람이 붙었다. 남의 답안지를 도둑질한 것이므로 절과라 하며 적과(賊科)라고도 하였다. 응시자와 시관(試官), 관련자 모두 처벌받았다.

내용 및 특징

과거 시험장의 부정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제술(製述)해 주는 대술(代述), 과장에서 타인의 제술을 빌리는 차술(借述), 시험장에 몰래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협서(挾書)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남의 답안지를 도둑질하는 절과가 가장 죄질이 나쁜 과거 부정행위로 간주되었다.

과거에서의 절과가 옥사로 커진 사건이 기묘과옥(己卯科獄)이다(『숙종실록』 26년 10월 8일). 과옥이란 과거 부정으로 옥사가 일어난 것을 말하였다. 1699년(숙종 25)의 증광문과복시 때에 있었던 절과가 방방 후에 드러나 부정과 관련된 수십 명이 투옥과 문초를 당하였다. 등록관·봉미관·서리 및 하인들이 짜고 합격 시권에 다른 사람의 피봉을 붙여 부정 합격시킨 것이 발각되어 시관을 비롯한 수십 명이 절도에 유배되고 과거는 파방(罷榜)되었다. 1844년(헌종 10)에 절과 사건을 논하면서 기묘과옥은 증좌가 분명하였으나 당초에 정률(定律)이 없었다 하여 살려 주는 법을 시행하였다고 언급하였다(『헌종실록』 10년 4월 28일).

과거 부정은 과장에서 자주 일어났는데 후기로 갈수록 심해져 엄하게 다스리게 되었다. 『속대전』 「예전」 제과조에는 “대·소 과장에서 다른 사람이 입격된 비봉(秘封)을 몰래 뜯어서 자기 명의로 바꾸어 써서 과거를 절용(窃用)한 자는 일률(一律)로써 논죄한다. 공모하고 지령한 사람도 같다.”고 되어 있었다. 응시자는 물론 시관도 처벌하였다. 일률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반영되어, 대소과에서 절과한 자는 사형죄로 논하고 결탁하여 사주한 자도 같다고 하였다. 절과를 사형죄로 논할 만큼 무겁게 다루었다.

실제로 절과 죄인에 대한 처벌 사례를 보면 사형은 면해 주었다. 1844년(헌종 10)에 비봉을 바꾼 민달용(閔達鏞)을 한 차례 형신(刑訊)을 더하고 제주목 정의현(旌義縣)에 보내어 종으로 삼았다(『헌종실록』 10년 4월 28일).

1874년(고종 11)에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친족을 위하여 절과한 안치원(安致元)을 사안은 사형죄에 관계되나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원악도(遠惡島)에 죽을 때까지 유배시키되 바로 그날 압송하게 하였다(『고종실록』 11년 4월 10일).

절과한 경우 부정과 관련된 사람에 대한 처벌뿐 아니라 과거 자체를 파방하여 부정과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합격을 취소하는 아주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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