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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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주희(朱熹)가 편찬한 역사서.

개설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희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정통론에 의거하여 재편집하여 편찬한 책이다. 『강목통감(綱目通鑑)』 또는 『강목(綱目)』으로 줄여 칭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도 수차례 수입 및 인쇄되어 사대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왕실에서는 경연에서 자주 활용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자치통감강목』은 중국에 다녀오는 사신이 구해오거나 중국의 황제에게 하사받기도 했으나(『태종실록』 3년 9월 13일, 『세종실록』 8년 11월 24일 1번째기사, 『세종실록』 15년 12월 13일 1번째기사) 조선 초기부터 직접 인쇄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世宗) 때에는 왕이 주자소(鑄字所)에 직접 명하여 책을 인쇄하고 집현전(集賢殿)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게 하였다.(『세종실록』 3년 3월 24일) 또 내고(內庫)의 왜지(倭紙) 9백 59첩을 내어 인쇄하게 명하기도 했다.(『세종실록』 9년 11월 3일)

세종 20년(1438)에 이르러서는 『자치통감강목』에 추가적인 주를 달아 『자치통감강목훈의(資治通鑑綱目訓義)』를 찬집하였는데, 이계전(李季甸), 김문(金汶), 이사철(李思哲), 최항(崔恒) 등이 관여하였다.(『문종실록』 1년 8월 30일)

서지 사항

59권 151책. 세종 때 간행된 판본은 현재 개인 소장 중이며 보물 제552호로 지정되었다. 해당 판본은 완질이 아닌 권19의 하에 해당한다. 사건의 제목에 해당하는 강(綱)은 병진자(丙辰字)를 사용하였고, 사건의 내용에 해당하는 목(目)은 갑인자(甲寅字)를 사용하였다. 세종 때의 다른 판본도 전하는데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권16만이 전한다. 이 판본은 서울 유형문화제 제181호로 지정되었다. 선조(宣祖) 때의 목각본 또한 남아있는데, 개인 소장이며 24책이 전한다. 보물 제905호로 지정되었다. 또 직지사(直指寺)에서 간행한 판본도 남아있다. 이 판본은 고려대학교 도서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도서관, 화봉문고 등에서 소장 중이다. 이 중 고려대 소장본이 전체 151책 중 142책이 보존된 것이다. 그밖에 각종 필사본이 전하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도 소장하고 있다.

구성/내용

『자치통감강목』은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을 송나라의 주희, 즉 주자(朱子)가 재편집한 것이다. 주자는 공자(公子)가 편찬한 『춘추(春秋)』의 체제와 필법에 의거하여 사실을 크게 ‘강’으로 묶고 그 사실에 대한 기사를 ‘목’으로 구별하여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정통론에 입각하여 서술한 책으로 사실을 기록한다기보다는 의리와 명분을 분명히 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직지사 판본에는 미암(眉巖)유희춘(柳希春)의 발문(跋文)이 추가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초기에는 형벌을 내릴 때에 참고하기도 했고,(『태종실록』 5년 12월 28일) 왕과 세자가 경연에서 두루 사용하기도 했다.(『정종실록』 2년 6월 2일, 『세종실록』 2년 윤1월 1일 2번째기사, 『세종실록』 9년 1월 22일 1번째기사, 『성종실록』 5년 3월 3일 1번째기사, 『연산군일기』 2년 1월 23일 1번째기사, 『중종실록』 1년 9월 26일 3번째기사, 『인종실록』 1년 윤1월 29일 2번째기사, 『명종실록』 16년 5월 11일 1번째기사, 『선조실록』 18년 4월 17일 3번째기사, 『현종실록』 10년 1월 17일 2번째 기사, 『숙종실록』 5년 1월 19일 1번째기사, 『영조실록』 1년 1월 13일 5번째기사, 『정조실록』 21년 5월 8일 1번째기사, 『순조실록』 3년 4월 1일 2번째기사) 역대 조선의 왕들은 이 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세종은 인쇄한 책에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성균직학(成均直學)과 (校書著作郞)을 의금부에 가두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0년 1월 4일) 심지어 역산법(曆算法)을 통하여 『자치통감강목』에 일식(日食)이 정확히 언제인지 추산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6년 8월 11일) 활쏘기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에게 왕이 포상으로 하사하기도 했으며,(『성종실록』 13년 4월 30일) 절도사(節度使) 등의 지방관이 책을 요청하기도 했다.(『성종실록』 4년 4월 12일) 『통감훈의(通鑑訓義)』나 『근사록(近思錄)』 등과 더불어 지방 향교에 하사하기도 했고,[『세종실록』 26년 8월 14일] 각종 상소를 올릴 때나 건의를 할 때에 중요한 전거가 되기도 했다.(『세종실록』 24년 2월 24일, 『광해군일기』 5년 11월 6일, 『영조실록』 1년 7월 7일 3번째기사, 『고종실록』 34년 5월 26일 3번째기사) 특히 세종은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20번에서 30번, 그리고 약간의 과장이 있겠지만 100번을 읽은 부분도 있었다 한다.(『세종실록』 5년 12월 23일, 『명종실록』 3년 3월 14일 3번째기사) 정조 때에는 『자치통감강목』에서 정조 자신이 의문나는 것들 695개 항목을 뽑아 문목을 만들어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눠주고 답을 쓰게 하여 『강목강의(綱目講義)』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정조실록』 15년 5월 3일)

이후 조선의 역사서 편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태종실록(太宗實錄)』은 『자치통감강목』의 체재(體裁)를 기준으로 삼아 간행되었다.(『문종실록』 2년 3월 29일)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시에도 참고했던 것으로 보이며,(『세종실록』 6년 8월 11일, 『세종실록』 14년 8월 10일 2번째기사) 안정복이 영조 35년(1758)에 완성한 『동사강목(東史綱目)』의 표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내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책으로, 선비들의 필독서라고 할만큼 많은 이들이 읽었다. 『자치통감』의 분량이 워낙 방대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주자가 이 책을 편찬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많이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각종 문집에서도 『자치통감강목』을 즐겨 읽었다는 표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고봉집(高峯集)』, 『갈암집(葛庵集)』, 『간이집(簡易集)』, 『매천집(梅泉集)』] 왕실에서는 경연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실록은 물론이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나 『일성록(日省錄)』에도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중종(中宗) 때에는 세자가 이 책을 다 읽었다 하여 잔치를 벌인 적도 있었다.[『국조보감』]

유희춘의 발문에 드러나듯, 16세기 이후에는 이 책이 유학의 경전들과 비슷한 위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유희춘은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자치통감강목』이 『대학연의(大學衍義)』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기도 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중요하게 여겨진 책이고, 이 책을 대하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그들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남겨진 판본들은 당시 인쇄술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고봉집(高峯集)』
  • 『갈암집(葛庵集)』
  • 『매천집(梅泉集)』
  • 『간이집(簡易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가기록유산(http://www.memorykorea.go.kr/)
  • 송일기·오정환, 「김천 직지사 간행의 『자치통감강목』 연구」, 『한국비블리아학회지』21-4, 한국비블리아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