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諮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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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소속의 정7품 관원.

개설

전통시대 세자의 교육 및 보도(輔導)를 담당하기 위한 관청 및 관직은 신라 경덕왕 때 동궁아관(東宮衙官)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때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이 고려시대의 동궁관(東宮官)으로 이어져, 태자의 교육과 관련한 각종 관직명이 등장한다. 자의(諮議)의 경우 『고려사』 「백관지」 ‘동궁관’에 의하면, 1308년(고려 충선왕 즉위)에 충선왕이 세자부를 설치하고 정3품의 겸관직 자의 1명, 정5품의 익선 1명, 종5품의 반독(伴讀) 1명, 정6품의 직강(直講) 1명, 종6품의 승(丞) 1명, 종6품의 사직(司直) 1명, 정7품의 기실참군(記室參軍) 2명 등 8명의 교육 관료를 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이전의 관제를 개혁할 때 나타난 것이다. 당시 자의는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정3품의 겸관직으로서 세자부의 우두머리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 건국 후에 오랫동안 자의는 왕세자의 교육과 관련된 관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의가 왕세자의 교육 관원으로 등장한 것은 인조반정 이후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공신 세력들은 재야 유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산림(山林)들을 세자시강원에 임용하고자 했다.

그런데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세자시강원의 전임 관원은 문과 출신이어야 임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산림들은 과거 시험을 치지 않았다. 이에 송나라 때의 고사를 모방하여 재야의 학자들을 산림이라는 명목으로 초빙하게 되었다. 당상관은 찬선(贊善)이라 하여 이전의 전임 관원인 보덕(輔德) 위에 두고, 당하관은 익선이라 하여 문학(文學) 아래에 두며, 참하관은 자의라 하여 설서(說書) 다음에 두었다. 익선은 후에 진선(進善)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속대전』에 규정되었는데, 찬선은 정3품, 진선은 정4품, 자의는 정7품이었다. 대상자가 마땅하지 않으면 묘당(廟堂)에 문의하여 유학(幼學)이어도 차출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의 자의는 정3품 겸관이었지만 조선후기의 자의는 정7품으로서 관품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조선시대 세자시강원의 우두머리인 찬선이 당상관 정3품으로서 고려시대의 자의와 같으므로, 시강원의 위계는 고려시대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시대의 시강원에는 더 많은 관료가 배속되어 고려시대보다 훨씬 내실을 기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 건국 직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설치한 삼사(三司)는 재정을 관장하였는데, 이곳에 좌자의·우자의 각 1명씩을 두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삼사는 1401년(태종 1)에 혁파되었다.

담당 직무

자의는 ‘자문하고 의논한다.’ 하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의 세자는 장차 왕이 될 신분이므로 세자의 제왕학 교육 목표 역시 세자 개인의 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선까지도 개발·육성하는 데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저명한 재야 학자를 자의로 임명하여 세자의 품성과 학문을 자문하고 의논하게 하였다. 이로써 세자의 선에 대한 학문적 기초와 실천적 토대를 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자의는 또한 후일 대망(臺望)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관직이었다.

변천

1894년(고종 31) 7월 관제 개정 시 시강원이 궁내부 예하에 편입될 때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895년 시강원이 왕태자궁으로 바뀌면서는 그 모습이 찾아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강학청일기(講學廳日記)』
  • 『시강원지(侍講院志)』
  • 육수화, 『조선시대 왕실교육』, 민속원, 2008.
  • 이기순, 「인조조의 ‘반정공신’ 세력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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