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군(林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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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임천군(林川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 소속의 군이다. 조선 1394년(태조 3)에 부(府)로 승격했으나 1413년(태종 13)에 군이 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460호, 인구가 1,671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3명, 수호군(守護軍) 2명, 선군(船軍) 287명이었다. 토지는 4,624결인데, 논이 밭보다 조금 더 많았다. 1914년에 부여군에 병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천군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가(加)’를 ‘가(嘉)’로 고쳤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에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가림현(嘉林縣)으로 고치고 영(令)을 두었다. 1333년(고려 충숙왕 2)에 원나라 평장(平章)아발해(阿孛海)의 아내가 된 조씨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지임주사(知林州事)로 승격시켰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4년에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환관이 된 진한룡(陳漢龍)이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자신의 고향이라고 부탁하여 부로 승격하였다가(『태조실록』 3년 4월 9일), 1401년(태종 1)에 복구하였다. 1403년(태종 3)에 조선 출신 명나라 내사(內史)주윤단(朱允端)이 또 요청하여 부로 승격하였다가(『태종실록』 3년 5월 30일), 다시 다음 해에 지임주사로 복구하였다. 1413년에 임천군으로 고쳤다.

임천은 성과 관아 주변은 좁은 산지이지만 산 아래에는 넓은 평야가 있고 논이 많았다. 삼국시대에는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루터를 관장하며, 사비를 외곽에서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동성왕이 관내의 성흥산성(聖興山城)을 쌓았는데, 이곳이 백제 멸망기에 여러 번 격전지가 되었던 가림성으로 추정된다. 임천군은 고려시대에도 통치의 거점이자 중심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중요성은 약화되었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자를 수령으로 임명하는 지역이었다. 훈도 1명이 있었으나 후기에는 폐지하였다.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50명, 아전 50명, 지인 18명, 사령 15명, 관노 22명, 관비 18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는 18개 면으로 구성되었으며, 가호는 편호 4,679호, 인구는 남자 8,395명, 여자 8,594명이었다. 토지는 밭이 1,772결, 논이 크게 증가하여 3,433결이었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부여로 흡수되어 부여군 임천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