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죽현(陰竹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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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음죽현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음죽현(陰竹縣)은 고려 때인 1018년(고려 현종 9)에 충주에 소속되었고, 이후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조선이 개창한 후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감무는 현감(縣監)으로 바뀌고, 충청도에 속해 있던 음죽현은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1593년(선조 26)에 양지에 소속되었다가 복구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이천에 소속되었다가 충주부 음죽군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음죽현에는 고려시대에 이미 감무가 설치되었으나, 조선 개창 후인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현감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감무는 1106년(고려 예종 1)부터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지 못한 말단 지방행정 단위에 파견하기 시작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1413년에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음죽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는데, 후기에 모두 폐지시켰다. 조선후기에 발간된 『여지도서』를 보면, 음죽현에는 6품의 현감이 1명 있었고,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관군관 23명, 아전 22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임무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음죽현은 신라 때 지금의 이름인 음죽(陰竹)이 되었고,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에 충주에 소속되었다가 이후 감무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1년(태종 1)에 여흥군(驪興郡)이 조선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민씨(閔氏)의 내향이라서 여흥부로 승격될 때 음죽현의 북촌(北村) 어서이처(於西伊處)가 여흥부에 소속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현감으로 바뀌고 경기도에 소속되었다(『태종실록』 13년 8월 1일). 1593년(선조 26)에 양지에 소속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는 이천에 소속되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충주부 음죽군으로 승격하였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을이 폐지되고 음성군과 이천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음죽현(陰竹縣)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음죽(陰竹)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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