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기(王士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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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 관료.

개설

1583년(명 만력 11)에 진사가 되었으며, 복주(福州)와 중경(重慶)에서 지부(知府: 한자 추가)를 지냈다. 양응룡(楊應龍)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산동포정사사우참정(山東布政使司右參政)으로 유정(劉綎)의 군대를 감독하였다. 남원·순천 등을 오가며 예교성 공략을 독전하고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떠난 뒤 남쪽 지역을 돌아보고 돌아갔다.

가계

그를 포함해 네 형제 사송(士崧)·사기(士琦)·사창(士昌)·사업(士業) 중에서 향교의 교생, 즉 공생(貢生) 출신인 사업을 제외하고 세 명이 진사에 급제하였다. 또한 그의 아버지 왕종목(王宗沐)그리고 왕사기와 셋째 왕사창 모두 관직이 도어사겸순무(都禦史兼巡撫)까지 올랐다.

활동 사항

진사시에 합격한 뒤 남경공부주사(南京工部主事)에 임명되었고, 뒤에 병부 낭중(郎中)을 지냈다. 1590년에 복주의 지부(知府)에 임명되었고, 1595년에는 중경의 지부를 지냈다. 파주선위사(播州宣慰使)인 양응룡이 모반을 일으키자 단기로 나아가 해결하였고 일이 평정되자 사천안찰부사(四川按察副使)로 승진하였다. 정유재란 시기인 1598년 6월 산동포정사사우참정(山東布政使司右參政)으로 임명되어 총병유정과 함께 군문(軍門)형개(邢玠)를 따라 조선으로 왔다.

8월 19일에 남쪽으로 내려가 유정과 진린(陳璘)을 모두 지휘하고 9월 6일에 한양으로 돌아와 형개를 만나 군대에 관한 일을 의논했다. 진린·유정 등이 순천 왜교성의 소서행장을 공략할 때 남원 용두산(龍頭山) 아래에 나아가 머물면서 철병을 하겠다며 군량 운송을 다그쳤다(『선조실록』 31년 10월 27일).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유정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왜교성 공략은 실패로 끝났다. 때마침 풍신수길의 죽음이 알려졌는데 유정은 왜교성의 적장 소서행장과 화의를 맺고 금백(金帛)과 인질을 서로 교환한 다음 소서행장의 군사가 완전히 철수하게 한 뒤에 빈 성에 들어갔다. 왕사기가 소서행장과 비밀리에 강화하려는 계획은 조선 조정에도 전해졌다(『선조실록』 31년 11월 11일). 본래 형개는 왜교(曳橋)에서 행장(行長)을 포위하기 위해 먼저 수군을 보내 남해(南海)의 일본군을 격파해 그 소굴을 친 뒤 적의 돌아갈 길을 끊고자 하였다. 왕사기는 이 일을 유정과 상의하였으나 유정이 거부하자 그의 뜻을 따랐다. 소서행장이 달아나자 유정을 따라 빈 성에 들어가 일본군의 보루를 두루 살펴본 뒤 남원으로 돌아왔다. 12월에 성주(星州)로 돌아오고 정월에 한양으로 왔다가 4월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 이후 하남좌포정사(河南左布政使)로 승진하였고 이후 산서성(山西省)의 좌·우포정사(左·右布政司) 등의 직을 지내다가 1616년 우도어사(右都禦史)로 대동순무(大同巡撫)가 되었다. 1618년 강남순무(江南巡撫)에 임명되었으나 직을 수행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저술 및 작품

『봉공기략(封貢紀略)』, 『삼운주조고(三雲籌組考)』, 『동정기략(東征紀略)』

묘소

절강성(浙江省) 임해시(臨海市) 장가도진(張家渡鎭)왕장산(王藏山) 기슭에 묘소가 있다. 임해시 중점문물보호단위(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절강통지(浙江通志)』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이민웅, 「조·명 연합함대의 형성과 노량해전 경과」, 『역사학보』178, 역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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