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릉전의(安陵奠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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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神主)의 하나인 우주(虞主)를 세우는 입주(立主)와 우주를 혼전(魂殿)으로 모시는 반우(返虞) 뒤 매장이 끝나면 산릉의 정자각(丁字閣)에서 전(奠)을 올리는 의식.

개설

입주와 반우 뒤 능(陵)의 조성이 끝나면 능 옆에 설치된 정자각에서 영좌(靈座)를 설치한 뒤, 술과 실과(實果) 등의 예찬(禮饌)을 갖추어 거행하는 제사가 전(奠)이다. 이때 잔을 올리는 헌관(獻官)은 산릉관(山陵官)이 맡는다. 예찬은 탁자에 4줄로 진설한다. 첫째 줄에 밀가루 반죽을 밀어 기름에 지진 유밀과인 중박계(中朴桂) 4그릇, 둘째 줄에 찹쌀가루로 만든 유과류의 일종인 홍백산자(紅白散子) 5그릇, 셋째 줄에 약과 5그릇, 넷째 줄에 각색 실과 6그릇을 놓고, 국수[麵], 떡, 국 12그릇을 좌우에 진설한다. 영좌 바로 앞에 작은 탁자[俠卓]를 놓고 각색 채소, 실과, 국수, 국[湯] 등과 잔(盞) 3개를 4줄로 진설한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의식 자체는 큰 변화가 없으나 헌관의 명칭이나 신을 불러오는 의식인 강신(降神)의 방법, 축문의 처리 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헌관의 경우 『세종실록』「오례」에는 산릉사(山陵使)(『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 안릉전의)였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출릉사(出陵使)로 되어 있다. 1422년(세종 4)에 예조(禮曹)에서 아뢴 안릉전의에는 3번 향을 피울 때 집사자(執事者)가 다주(茶酒)를 산릉사에게 주면 산릉사는 이를 받아 차를 땅에 부어 강신하는 뇌다(酹茶)를 행한다고 하였는데(『세종실록』 4년 8월 30일), 이러한 절차가 『세종실록』「오례」의 의주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또한 『세종실록』「오례」나 『국조오례의』에는 의식이 끝난 뒤 사용한 축문(祝文)을 구덩이에 묻는다고 되어 있는데,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대축(大祝)이 구덩이에서 태운 뒤 그 재만을 묻는다고 하였다.

절차 및 내용

의식은 찬자(贊者)가 헌관과 집사자의 자리를 설치하고, 능사(陵司)가 영좌를 정자각 안의 북쪽에 남향으로 설치한다. 전사관(典祀官)과 능사가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들어가 영좌의 왼쪽에 축문을 올려놓고, 향로(香爐), 향합(香盒), 초를 영좌 앞에 설치한다. 예찬을 영좌 앞에 설치한 협탁과 찬탁(饌卓)에 각각 4줄로 진설하고, 술동이를 지게문 밖 왼쪽에 설치하고 잔을 3개 놓아둔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알자(謁者), 찬자, 찬인(贊人)이 먼저 뜰로 들어가 북향하여 4번 절하고 정해진 자리로 돌아간다. 이어서 감찰(監察), 전사관, 대축, 축사(祝史), 재랑(齋郞)이 들어와 찬자의 외침에 따라 몸을 굽혀 4번 절하고 일어나 정해진 자신의 자리로 나아간다. 헌관이 들어와 자리로 나아가 찬자의 말에 따라 꿇어 앉아 엎드려 곡하다 그친다. 4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헌관이 준소(樽所)에 나아가 서쪽으로 서면 집사자가 잔에 술을 받는다. 헌관이 영좌 앞에 꿇어앉아 3번 향을 올린다. 헌관이 집사자에게 잔을 받아 3잔을 연이어 영좌 앞에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꿇어앉는다. 대축이 영좌의 왼쪽에 나아가 꿇어 앉아 축문을 읽는다. 헌관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꿇어 앉아 곡을 하다 그치고 4번 절한다. 헌관은 알자의 인도로 나가고 감찰 및 전사관 이하는 절하는 자리로 돌아가 4번 절하고 나간다. 알자, 찬자, 찬인도 절하는 자리에서 4번 절하고 나간다. 전사관과 능사가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예찬을 거두고, 대축은 축문을 구덩이에 묻는다(『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 안릉전의).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관계망